사망하면 하루 전으로 회귀합니다

98화: 무(無)의 나선
스으으윽――.
강우가 다시 의식을 되찾았을 때, 눈앞에 펼쳐진 것은 더 이상 마포의 지하실조차 아니었다.
그곳은 완전한 백색의 무색(無色) 아공간이었다. 지하실의 가구도, 컴퓨터 모니터도, 심지어 딛고 선 지면의 감각조차 반투명한 은빛 아우라가 되어 스멀스멀 흐르고 있었다. 강우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지만, 손끝 역시 은빛 인과율 가루가 되어 허공으로 끊임없이 스러져 내리고 있었다.
존재의 영구 소멸. 시간과 공간의 두 안광이 깨진 여파로, 강우는 세상의 물리적 타임라인에서 완전히 지워지기 직전의 '인과의 무덤'에 도달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백색의 공간 중앙, 오직 단 하나의 거대하고 핏빛으로 불타는 안광, 즉 군주의 마지막 보루이자 영혼의 핵인 '인과의 안광'만이 세상을 집어삼킬 듯 웅웅거리고 있었다.
- 결국 여기까지 기어들어 왔구나. 하지만 이미 늦었다. 너의 육체도, 너의 영혼도, 그리고 네가 소중히 지키려 했던 기억의 편린들마저 이 무(無)의 나선 속에서 영구히 추방될 것이다.
군주의 차가운 선언과 동시에, 세 번째 안광에서 보이지 않는 투명한 파동이 방출되었다.
그 파동이 스치고 지나갈 때마다, 강우의 머릿속에 저장되어 있던 소중한 기억들이 거울이 깨지듯 와장창 깨져나갔다.
여동생 선희의 해맑은 웃음소리, 유지원이 남긴 따뜻한 차의 향기, 백현우가 껄껄 웃으며 휘두르던 대검의 기세……. 강우의 절대 잔류 기억을 지탱하던 조각들이 하나둘씩 모래처럼 흩날려 스러졌다. 기억의 붕괴는 곧 존재의 죽음보다 더 끔찍한 절대적인 소멸이었다.
- 모든 것을 잊고, 영원히 멈춘 시간의 감옥 속에 갇혀 잠들라.
강우의 두 다리가 완전히 은빛 가루가 되어 사라지고, 몸뚱이 전체가 흐릿해져 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강우는 흩어지는 기억의 파편들 속에서, 단 하나의 부러지지 않는 영혼의 골격을 끄집어냈다. 그것은 마력이 전혀 없는 무능력자 한강우가, 단지 가족을 지키고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어제'가 아닌 '내일'로 걸어가고 싶어 했던 지극히 평범하고 단단한 소년의 의지 그 자체였다.
"……잊지 않는다."
강우의 눈동자가 은빛 아우라 속에서 날카롭고 시리게 타올랐다.
"선희의 웃음도, 지원 씨의 눈물도, 백현우 씨의 칼끝도…… 내가 백 번을 죽어가며 지켜낸 그 모든 인과율의 조각들은, 내 영혼의 뼈대에 문신처럼 새겨져 있다! 마력 한 줌 없는 무능력자 한강우의 영혼은, 네깟 군주의 소멸 장막에 지워지지 않는다!"
강우는 자신의 흐려지는 오른손을 들어, 뼈대만 남은 의지의 단검을 굳게 쥐었다. 이 단검은 마력이 0.00%인 강우의 순수한 물리적 영혼 그 자체였기에, 군주가 펼친 시공간 소멸 장막에 하등의 간섭을 받지 않고 정면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강우는 존재가 완전히 먼지가 되기 직전의 그 마지막 0.1초의 타이밍에, 공중에 떠 있던 마지막 세 번째 '인과의 안광'의 붉은 동공 중심을 향해 자신의 영혼째로 몸을 던졌다.
"함께 돌아간다, 괴물 새끼야!"
팍――!
"크으으으으아아아악――!"
단검의 끝이 세 번째 안광의 붉은 동공 한가운데를 관통했다.
그 찰나, 군주의 단명 비명소리가 온 무색의 우주를 뒤흔들었고, 세 번째 안광이 은빛 거울처럼 수천수만 개의 조각으로 요란하게 바작 깨져나갔다. 군주의 최종 정신체가 절대 소멸의 늪 속에 빨려 들어가며 연기처럼 완전히 지워져 버렸다.
쿠구구구구구――!
군주가 소멸함과 동시에, 흐려지던 강우의 손발과 사라져 가던 기억의 편린들이 오차 범위 0.01초 내에 급속도로 원래의 색과 형상을 되찾으며 재결합하기 시작했다. 백색의 아공간이 와장창 부서져 나가고, 원래의 낡고 조용한 마포 비밀 거점의 모습이 삼차원 그래픽처럼 복원되며 덮였다.
달커덩――.
강우는 땀과 피를 뻘뻘 흘리며, 원래의 지하실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화면의 컴퓨터 모니터들이 정상적인 파란 빛을 내뿜으며 켜졌고, 탁상 위의 시계 바늘이 마침내 밤 12시 01분을 가리키며 평화롭게 째깍거리기 시작했다. 거점 내부의 중력도, 시공간도 모두 완벽하게 안정되어 있었다.
강우는 단검을 내려놓고, 가쁜 숨을 몰아쉬며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가슴 속에 흐르던 붉고 사악한 심연의 주파수는 완전히 지워져 있었고, 그를 묶고 있던 백 번의 잔인한 죽음의 인과의 실타래 역시 조용히 끊어져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처단했군."
강우의 옅은 미소가 마포의 차가운 지하 공기 속에 번져 나갔다. 마침내 지구를 위협하던 심연의 군주 본체를 완전히 분쇄하고, 백 번째 루프의 기나긴 사투 속에서 완벽한 승리를 쥐어 잡은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