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망하면 하루 전으로 회귀합니다

94화: 그림자가 걷힌 세상
태성 길드의 비밀 해상 플랫폼인 '네오 아크'의 삼중 격벽 의료실.
기계장치의 나직한 작동음만이 울리는 하얀 방 안의 병상 위에, 산소호흡기를 착용한 채 강우가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비록 전신 슈트의 충격 흡수 장치 덕분에 목숨은 건졌으나, S급 괴수의 압도적인 손아귀 압력을 직접 견뎌낸 탓에 목과 어깨 주변은 조밀하게 얼어붙은 붕대로 감싸여 있었다.
의료실의 두꺼운 특수 유리창 너머 복도에는, 전 세계에서 가장 강한 무력을 지닌 S급 헌터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도열해 서 있었다.
그들은 아무런 대화도 나누지 않고, 그저 침대에 누워 있는 무마력자 소년, 한강우를 조용하고 무거운 눈빛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이 소년이…… 지구 전체를 구원한 그 보이지 않는 황제 섀도우란 말이지."
프랑스의 빛의 기사 장 피에르가 굳은 얼굴로 나직하게 탄식했다.
"S급 헌터들도 환각에 휘말려 제 동료를 베고, 중력장에 밀려 낭떠러지로 낙사해가던 그 끔찍한 절망의 미로를…… 마력이 전혀 없는 이 어린 소년은 오직 자신의 뇌세포와 처절한 연산력으로 통과해 냈다는 거군. 그것도 우리가 알지 못하는 무수한 죽음을 반복해 가면서."
일본의 카토 유이치 역시 굳게 닫힌 문을 보며 자신의 검자루를 잡은 손을 세차게 떨었다.
"우리는 그저 섀도우의 지시에 따라 칼을 휘두르고 마법을 쏘았을 뿐이다. 그 정교한 예언의 타이밍을 만들기 위해 소년이 매번 흘려야 했을 피의 흔적을 생각하면…… 내 이 검끝에 깃든 S급의 무력이 한없이 가볍게 느껴지는군."
백현우는 팔짱을 낀 채 벽에 기대어 서서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
"어이, GHA의 여제 헬레나. 본부 녀석들이 섀도우의 정체를 알면 어떻게 나올지 잘 알 텐데?"
헬레나 폰 브라운은 자신의 백금발 머리칼을 뒤로 쓸어 넘기며 차가운 안광을 번뜩였다.
"GHA 본부의 잔당들이 이 소년의 존재를 알아채는 순간, 어떻게든 섀도우라는 이름을 납치하거나 말살해 자신들의 통제 시스템에 집어넣으려 들겠지. 하지만 걱정 마라, 백현우. 오늘 이 방 안을 지켜본 우리 열두 명의 S급 최강자들은 이미 암묵적인 철혈 동맹을 맺었다. 섀도우의 정체는 영원히 안개 속에 묻힐 것이고, 만약 본부가 이 소년에게 털끝 하나라도 건드린다면…… 우리는 기꺼이 전 세계적인 헌터 반란을 기동할 준비가 되어 있다."
헬레나의 단호한 선언에, 장 피에르와 카토를 비롯한 각국의 S급 헌터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에게 섀도우는 자신들의 목숨을 구한 은인을 넘어, 인류가 멸망의 인과에서 살아남을 수 있도록 지켜준 단 하나의 위대한 설계자였기 때문이었다.
사흘 뒤, 강우는 의식을 되찾고 천천히 눈을 떴다.
산소마스크를 벗어 던지며 상체를 비스듬히 일으키는 강우의 곁에는, 붉어진 눈으로 밤을 지새운 유지원이 간이의자에 앉아 그의 손을 굳게 쥔 채 졸고 있었다.
스윽.
강우가 미세한 움직임을 보이자, 유지원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번쩍 눈을 떴다.
"어……! 강우 씨! 깨어났군요! 몸은 좀 어때요?! 의사를 부를게요!"
"괜찮습니다, 지원 씨. 목소리가 조금 잠겼을 뿐, 뼈가 으스러지진 않았습니다."
강우는 물통을 들어 따뜻한 물을 한 모금 마신 뒤 물었다.
"전 세계의 전황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유지원은 손수건으로 기쁨의 눈물을 닦아내며, 머리맡의 대형 모니터 화면을 가볍게 탭해 주었다.
화면 가득, 전 세계의 뉴스 속보들이 초록색 '안정' 등급의 그래픽과 함께 쏟아지고 있었다.
"완벽해요. 신들의 무덤 최종 쐐기가 파괴되면서 전 세계에 요동치던 마력 역류 주파수가 완전히 소멸했어요. 특히 놀라운 건…… 전 세계에 활성화되어 있던 수백 개의 대형 및 중소형 게이트들이 급격한 에너지 소모 상태에 빠지더니, 하나둘씩 자연 소멸해가기 시작했다는 거예요!"
유지원의 말에 강우의 눈동자가 흔들림 없이 가라앉았다.
"게이트 시스템 자체의 붕괴 주기가 앞당겨진 거군요."
"네. 전문가들은 지구에 유입되던 심연의 근원 통로가 완전히 차단됨으로써, 지구의 대기 전체가 원래의 마력 0% 상태로 돌아가는 자연 정화 주기에 들어섰다고 보고 있어요. 이 속도라면 1년 내로 지구상의 모든 게이트와 몬스터는 흔적도 없이 사라질 거예요."
인류가 마력의 지옥으로부터 벗어나 평범한 일상을 되찾을 평화의 서막이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강우는 여전히 안심하지 못했다. 그의 인과 연산 뇌세포들은 마지막 최종 결전의 톱니바퀴가 돌아가고 있음을 짚어내고 있었다.
"지원 씨. 게이트 시스템이 소멸하기 직전, 최후의 대발악이 한 번 더 남아 있습니다."
"최후의 발악이라고요?"
"예. 심연의 군주 본체는 비록 소환이 좌절되었으나, 붕괴하는 시공간의 틈새에서 자신의 마지막 '인과 역행 끈'을 대한민국 서울의 비밀 마포 거점을 향해 다이렉트로 던질 겁니다. 녀석의 목표는 저의 이 '하루 전 회귀' 능력을 강제로 강탈하여, 자신이 패배했던 과거의 인과를 통째로 리셋하려는 겁니다."
강우는 침대 밑의 단검 주머니를 매만졌다.
"대격변의 날의 종막은, 저와 군주 본체와의 단독 인과율 전쟁이 될 겁니다. 만약 제가 지면 이 모든 평화의 우주는 연기처럼 사라지고 인류는 다시 그 비참한 죽음의 루프로 돌아갑니다."
강우의 단호하고 매서운 눈빛 속에, 다가올 제6막 '리셋의 끝에서'를 대비하는 설계자의 마지막 아지랑이가 깊고 짙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평화로운 소년으로 돌아가기 위한, 최후의 결전이 마포의 어둠 속에서 그 조용한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