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망하면 하루 전으로 회귀합니다

79화: 그림자의 포고
GHA 기동수사대의 굴욕적인 철수 이후, 감시관 헬레나 폰 브라운은 자신의 한국 주둔 사무실에서 밤새도록 줄담배를 피우며 머리를 싸매고 있었다.
섀도우가 그녀의 개인 비자금 통로를 쥐고 흔들었을 뿐만 아니라, GHA 본부 최고 사령부에서 작성한 극비 헌터 전략 코드까지 완벽하게 해킹해 쥐고 있다는 것은 그녀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공포였다.
"감시관님……."
보좌관이 조심스럽게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 '섀도우'라는 인물로부터 비밀 암호화 회선을 통해 다이렉트 통신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보안 검사를 거쳤으나 역추적은 불가능한 상태입니다. 연결할까요?"
헬레나는 담배꽁초를 재떨이에 거칠게 비벼 끄며 고개를 끄덕였다.
"연결해."
스으윽.
탁상 위의 메인 통신 단말기가 홀로그램 화면을 뿜어냈다. 화면에는 아무런 형상도 없이 칠흑처럼 어두운 그림자의 아지랑이만이 일렁이고 있었고, 변조된 차갑고 기계적인 음성이 흘러나왔다.
- 감시관 헬레나 폰 브라운. 얼굴색이 제법 좋아 보이지 않는군요.
"섀도우……! 네놈은 대체 누구냐! GHA 본부를 상대로 이 따위 인질극을 벌이고도 무사할 줄 아나! 네 정체가 밝혀지는 순간 전 세계의 S급 추격조가 네 숨통을 끊어 놓을 것이다!"
헬레나는 위협적인 기세를 내뿜으며 으름장을 놓았다. S급 헌터로서 지닌 그녀의 마력 위압감이 통신 장치를 통해 전해질 것처럼 공기가 싸늘해졌다.
그러나 섀도우의 반응은 차가운 냉소뿐이었다.
- 저의 정체를 찾는 것보다, 당신의 목숨을 걱정하는 것이 더 이로울 겁니다.
화면 한구석에 여러 개의 문서 패킷들이 순식간에 펼쳐졌다. GHA 최고 작전사령부가 수립한 '아시아 전선 방치 및 미국 본토 정예병 귀환 계획'의 원본 파일들이었다.
- 이 문서가 내일 아침 전 세계 헌터 연합 지부들과 언론에 릴리즈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 것 같습니까? GHA는 주권 국가들을 미끼로 삼았다는 비난 아래 공중분해 될 것이고, 당신 역시 그 공모자이자 비리 헌터로 가장 먼저 법정에 서거나 분노한 헌터들의 손에 찢겨 죽을 겁니다.
헬레나의 입술이 잘게 떨렸다. 섀도우의 말이 백퍼센트 진실이었기 때문이다. 대격변이라는 인류 멸망의 위기 속에서, GHA 본부의 배신이 폭로되는 순간 조직의 통제력은 그 즉시 연기처럼 사라질 터였다.
"……바라는 게 뭐냐. 돈인가? 아니면 한국 감사국의 공식적인 완전 독립?"
- 저는 그보다 큰 판을 원합니다.
그림자의 일렁임이 더욱 짙어졌다.
- 다가올 4일 동안, 대한민국 전선의 모든 헌터 배치와 지휘 권한을 저에게 양도하십시오. 공식적으로는 헬레나 감시관 당신이 지휘하는 것처럼 연출하되, 실제 전술 가이드라인은 제가 제공하는 루트를 100% 따르는 겁니다.
"뭐라고?! 연합 주둔군의 지휘권을 일개 익명의 정보원에게 넘기라고?! 제정신이냐!"
- 선택하십시오. 제 아래에서 인류를 구한 명예로운 사령관으로 남을 것인지, 아니면 내일 아침 파멸의 심연으로 떨어질 것인지. 남은 시간은 30초입니다.
헬레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손가락뼈가 하얗게 드러날 정도로 힘이 들어갔지만, 그녀에게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섀도우는 이미 그녀의 목덜미를 완전히 쥐고 흔들고 있었다.
"……좋다. 비공식적으로 네 전술 명령을 수용하겠다. 하지만 만약 네가 짜놓은 방어선이 무너져 내린다면, 난 즉시 내 부대를 이끌고 한국을 포기할 것이다."
- 현명한 선택입니다. 작전 회선을 열어두겠습니다.
뚝――.
통신이 끊어지자 헬레나는 털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S급 여제라 불리던 그녀가, 얼굴조차 모르는 무마력자의 그림자 아래 무릎을 꿇은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대격변 2일 전.
마포의 비밀 거점에는 전례 없는 붉은 경보가 메인 스크린 가득 휘몰아치고 있었다. 서울 북부, 노원구와 도봉구를 잇는 수락산과 도봉산 산자락 일대의 상공이 피빛으로 갈라지며 세 개의 대형 게이트가 연쇄적으로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삐비비비빅――!
[위험: 서울 북부 방어선 1차 대형 게이트 붕괴 임박. 남은 시간 3시간. 등장 마물 예상 등급: A급 상위 마물 군단 및 S급 돌격 대장 '아바돈의 발톱'.]
"때가 왔군요."
강우가 안경을 고쳐 쓰며 모니터 앞으로 다가섰다.
사무실에는 이미 백현우와 유지원이 전투 무장을 마친 채 대기하고 있었고, 통신 화면에는 GHA 감시관 헬레나의 굳은 얼굴이 실시간 연동되어 있었다.
"헬레나 감시관. GHA 본부 작전대 30명을 도봉산 서쪽 계곡의 3번 거점에 배치하십시오. 그곳은 2시간 뒤 몬스터의 퇴로가 될 곳입니다. 백현우 씨는 수락산 남쪽 입구인 1번 거점에서 대기하며, 기어 나오는 S급 돌격 대장의 목을 직접 꺾어주셔야 합니다."
강우의 거침없는 지휘가 시작되었다.
"유지원 씨는 태성 길드 정예 마법대를 이끌고 중앙 계곡 방어선에 빙결 차단벽을 형성해 주십시오. 몬스터들의 기동성을 최대한 묶어두는 것이 핵심입니다."
"알겠어요, 강우 씨!"
"어이 섀도우, 드디어 내 대검이 제대로 일할 판이 깔렸군. 수락산 입구는 먼지 하나 남기지 않고 다 쪼개주마."
백현우가 광오하게 웃으며 공간을 가르고 먼저 신형을 감추었다.
유지원 역시 대원들을 이끌고 문을 나섰고, GHA의 헬레나 역시 강우가 보내준 전술 동선에 따라 어금니를 깨물며 군대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강우는 홀로 남은 사무실에서 수십 대의 연산 모니터를 응시했다.
이것은 그가 이전 스무 번이 넘는 사망 루프를 돌며, 서울 북부 방어선이 무너져 온 가족과 시민들이 몰살당했던 참상을 온몸으로 겪어내며 얻어낸 완벽한 승리의 공식이었다.
"이번에는 단 한 명도 죽게 놔두지 않습니다."
강우의 눈동자 속에는 전 세계 헌터 군단을 장막 뒤에서 지배하는 절대 지휘관으로서의 형형한 그림자의 빛이 깊고 찬란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대격변의 날의 재림, 그 거대한 전쟁의 첫 번째 포성이 서울 북부 산자락에서 마침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