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망하면 하루 전으로 회귀합니다

74화: 안개 속의 심연
서대문 지하의 허브 쐐기가 파괴되면서 발생한 연쇄 반응은 강우의 예상보다 훨씬 극적이었다.
비밀 거점의 메인 연산 장치 모니터에 떠 있던 전 세계의 붉은 마력 좌표들이 하나둘씩 깜빡이며 소멸하기 시작했다. 아시아 대륙 곳곳에 침투해 있던 '심연의 눈'의 전초기지 쐐기 다섯 개가 서울의 동력 중추가 끊어짐에 따라 에너지를 공급받지 못하고 차례대로 기능 정지 상태에 빠진 것이었다.
"성공했군요."
모니터의 주파수들이 녹색으로 가라앉는 것을 보며 강우가 지그시 읊조렸다.
사무실 소파에 앉아 가쁜 숨을 몰아쉬던 유지원은 차갑게 얼어붙은 손끝을 비비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곁에는 임무를 무사히 완수하고 복귀한 태성 길드의 마법 기동대원들이 장비를 정리하고 있었다. 감사국 수사관들이 대학가 지하로 들이닥치기 직전, 배양 튜브 속의 실종자들을 전원 지상 안전 구역으로 인계하고 흔적 없이 철수하는 데 성공한 직후였다.
"고마워요, 강우 씨. 당신이 그 세 군데의 인과 균열점을 짚어주지 않았다면…… 전 지금쯤 서울과 함께 재가 되어 사라졌을 거예요."
유지원의 진심 어린 감사에 강우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지원 씨의 빙결 마력이 극도로 정교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아무리 약점을 알아도 그 타이밍에 세 지점을 동시에 동결하는 건 지원 씨가 아니면 불가능했습니다."
그때, 무기 거치대 옆의 간이 침대에 누워 휴식을 취하고 있던 백현우가 몸을 일으켰다. 24시간 동안의 마동 조율을 마친 그의 눈빛에는 다시금 S급 특유의 묵직한 마력이 서려 있었다.
"지원 꼬맹이의 무용담을 들으니 내 온몸이 다 근질근질하군. 그 엄청난 쐐기의 자폭 시퀀스를 얼음 레이저 세 줄기로 막아 세우다니, 태성 길드의 후계자다운 솜씨다."
백현우는 껄껄 웃으며 강우를 돌아보았다.
"그나저나 섀도우. 아시아 전역의 쐐기들이 전부 비활성화되었다면, 이제 한시름 놓은 건가? 광신도 놈들의 그 빌어먹을 의식도 완전히 무산된 거고?"
백현우의 질문에 강우는 모니터 화면을 가볍게 탭했다.
지도의 아시아 대륙은 평화로운 초록빛으로 물들었지만, 단 한 곳, 아시아와 아메리카 대륙을 잇는 드넓은 태평양의 한가운데에 위치한 특정 좌표만큼은 여전히 검붉은 빛을 내뿜으며 웅웅거리고 있었다.
"아닙니다. 아직 가장 크고 무거운 불씨가 남아 있습니다."
강우의 단호한 목소리에 사무실 내부의 공기가 다시금 차갑게 굳어졌다.
"태평양 괌 제도 동쪽 약 300킬로미터 해상. 해저 5,000미터 깊이에 위치한 특수 A급 해상 게이트 '심연의 소용돌이(Abyssal Vortex)'입니다."
강우가 좌표를 클릭하자, 바다 한가운데에 거대한 검은 소용돌이가 치고 있는 위성 사진과 함께 GHA(글로벌 헌터 연합)의 극비 경계망 레이더 정보가 화면에 펼쳐졌다.
"이곳은 본래 GHA가 직접 관리하며 일반 헌터들의 접근을 철저히 금지해 온 통제구역입니다. 하지만 심연의 눈 광신도들은 오래전부터 GHA 내부의 부패한 고위 세력들과 결탁해, 이 해상 던전 깊은 곳에 자신들의 '최종 게이트웨이 쐐기'를 구축해 두었습니다."
유지원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최종 게이트웨이…… 그렇다면 아까 파괴한 서울의 쐐기나 가평의 쐐기들은 전부 이 최종 쐐기를 작동시키기 위한 바람잡이에 불과했다는 건가요?"
"예. 아시아의 전초 쐐기들이 에너지를 모아 태평양의 최종 쐐기로 송신하는 구조였습니다. 비록 우리가 허브를 끊어 에너지 전송을 차단했지만, 최종 쐐기 자체에는 이미 의식을 가동하기에 충분한 독자적 마력이 축적되어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 쐐기는 차원의 가장 얇은 틈새를 뚫고 심연의 군주 본체를 소환하기 위한 통로를 넓히고 있습니다."
강우의 눈빛이 깊고 무겁게 침잠했다.
"의식이 완성되는 예정 시각은 정확히 36시간 뒤입니다. 만약 36시간 내에 저 최종 쐐기를 파괴하지 못한다면, 태평양 한가운데에서 초대형 던전 브레이크가 발생하여 거대한 쓰나미와 함께 심연의 괴수 군단이 전 세계의 해안선을 일제히 습격할 겁니다. 그것이 바로 지구 종말의 시작입니다."
"36시간이라…… 시간은 촉박하고, 적들의 본진은 바다 밑바닥이로군. 게다가 GHA의 통제구역이라니."
백현우가 이마를 짚으며 실소했다.
"그 미친 GHA 녀석들이 자신들의 통제구역에 우리가 들어가는 걸 순순히 허락할 리가 없지. 특히 아서 맥클레인을 그렇게 쫓아냈으니, 지금쯤 한국에 이 빠득빠득 갈고 있을 텐데."
"예. 공식적인 루트로는 접근조차 불가능합니다. 해상 경계선에 진입하는 순간 GHA의 초계함대와 S급 함대 헌터들이 우리를 무단 침입자로 규정하고 요격할 겁니다."
강우는 전술 패드에 침투 경로를 그렸다.
"따라서 우리는 비공식적인 정면 돌파를 감행해야 합니다. 태성 길드의 특수 마동 잠수정을 이용해 GHA의 해상 레이더망을 강제로 마비시킨 뒤, 해저 5,000미터의 던전 입구로 다이렉트 침투합니다. 던전 내부에 진입한 뒤에는 GHA의 경비 병력과 심연의 눈 사제단 모두를 상대로 한 거대한 난전이 벌어질 겁니다."
강우가 백현우와 유지원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백현우 씨의 공간을 가르는 파괴력, 그리고 유지원 씨의 바다 전체를 얼려버릴 수 있는 광역 빙결 능력이 동시에 필요합니다. 이 작전은 제가 하루 전으로 회귀할 수 있는 권능이 있다 해도, 단 한 번의 실수로 해저 깊은 곳에서 수압에 짓눌려 몰살당할 수 있는 극도의 위험한 전장입니다."
강우의 말에는 거짓이 없었다. 해저 던전이라는 특수성상, 한 번의 침수가 발생하면 회귀고 나발이고 즉사할 수 있었다. 그만큼 철저하고 정교한 설계가 요구되는 최악의 난이도였다.
하지만 백현우는 오히려 입꼬리를 올리며 대검을 짊어졌다.
"해저 5,000미터라니, 죽기 딱 좋은 깊이로군. 하지만 그래서 더 마음에 든다. GHA 나부랭이들과 광신도 놈들의 대가리를 동시에 깨부술 수 있는 판이라니, 내 대검이 벌써부터 울어대는군."
유지원 역시 깊은 호흡을 내쉬며 강우의 손을 잡았다.
"저도 가겠어요, 강우 씨. 서울을 지켜낸 것처럼, 이번에도 당신의 눈과 귀가 되어 저 깊은 심연의 바다를 완전히 얼려버리겠어요."
"좋습니다."
강우는 모니터의 붉은 태평양 좌표를 응시하며 나직하게 작전의 시작을 선포했다.
"심연의 가장 깊은 곳으로 진격합니다."
인류의 존망을 건 마지막 결전을 향해, 설계자의 세 체스말이 거대한 안개 속으로 발을 내딛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