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망하면 하루 전으로 회귀합니다

53화: 예언자의 그림자
쿠구구구구궁――!
최종 보스 '나락의 서리여왕'의 폭사와 함께, 성채를 지탱하고 있던 거대한 얼음 벽들이 푸른색 마력 파편이 되어 사방으로 무너져 내렸다. 던전을 휘감고 있던 맹렬한 눈보라와 한기가 급격히 잦아들며, 차원의 왜곡 현상이 서서히 제자리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게이트가 닫히기 시작한다는 신호였다.
"후우…… 후우……."
성채 구석의 부서진 얼음 벽에 기댄 강우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피 묻은 오른손을 내려다보았다. 허벅지와 어깨를 뚫었던 서리 화살의 상처에서 흘러내린 피가 빙판 바닥을 붉게 적시고 있었으나, 냉기가 동반된 마비 독소 때문에 통증보다는 아득한 무감각함이 먼저 밀려왔다.
"강우 씨!"
유지원이 헐레벌떡 달려와 강우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녀는 황급히 품에서 최상급 감사국 회복 포션을 꺼내 강우의 상처 부위에 부었다. 푸른색 치료 마력이 강우의 상처를 감싸 안으며 찢어진 살점을 정교하게 메워 나가기 시작했다.
"괜찮아요? 왜 그런 무모한 짓을…… 조금만 늦었어도 서리 화살이 심장을 꿰뚫었을 거예요!"
유지원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고, 눈가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강우는 힘겹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제가 괜찮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17번이나…… 겪어본 일입니다. 이 상처 역시 계획된 오차 범위 내입니다."
그들의 대화 소리에, 저만치서 보스의 잔해를 정리하던 박성태와 레이드 대원들이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그들의 시선은 강우의 발밑에 떨어져 있는, 피 묻은 슬레지해머(오함마)에 머물렀다.
마도 전기 차단으로 모두가 무력화되어 죽어가던 그 순간.
보스의 마력 감지 장벽을 무시하고 들어가 그 무겁고 단단한 기둥 네 개를 맨몸으로 부수어 억눌려 있던 헌터들의 마력을 해방시켜 준 장본인. 그가 다름 아닌 무능력자 조교인 한강우였다는 사실을, 그들은 마침내 똑똑히 알게 되었다.
터벅, 터벅.
박성태가 무거운 발걸음으로 다가왔다. 그의 얼굴은 부끄러움과 경악으로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털썩.
모두의 예상을 깨고, 태성 길드의 A급 정예 전사인 박성태가 강우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깊게 숙였다.
"……한강우 조교. 아니, 섀도우 님."
박성태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제가 어리석었습니다. 마력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당신을 무능력자라 멸시하고, 공격대장이라는 허울 좋은 완장에 취해 아군을 사지로 몰아넣었습니다. 당신이 기둥을 부수지 않았다면, 우리는 지금쯤 저 얼음 괴물의 밥이 되어 있었을 겁니다. 나 같은 놈의 목숨을 구해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그리고 죄송합니다."
그의 진심 어린 사죄에 뒤에 서 있던 대원들과 생도들 역시 깊은 경의를 표하며 허리를 숙였다.
그들이 보기에 강우는 더 이상 무능력자가 아니었다.
마력 수치 따위는 가볍게 초월한 존재. 보이지 않는 곳에서 판을 설계하고, 죽음의 변수들을 해체하며 헌터들을 통제하는 어둠 속의 황제, 섀도우 그 자체였다.
강우는 포션의 온기가 상처를 아물게 하자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바닥의 오함마를 주워 배낭에 다시 집어넣었다.
"고개를 드십시오, 박 팀장님. 사죄는 살아서 나간 뒤에 해도 늦지 않습니다. 던전이 닫히고 있으니 전원 신속하게 퇴각합니다. 그리고……."
강우의 눈동자가 대원들을 차갑게 훑었다.
"제 정체에 대해서는 아시겠지만 절대비밀입니다. 만약 밖에서 제 이름 한 글자라도 새어 나간다면, 다음 던전 브레이크 때 당신들을 구하러 갈 섀도우는 존재하지 않을 겁니다."
"예! 명심하겠습니다!"
대원들이 우렁차게 대답했다.
오전 11시 15분. 강남 테헤란로.
통제선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수백 명의 보도진과 국방부 요원, 그리고 헌터 협회 관계자들은 일제히 숨을 죽인 채 갈라진 게이트 틈새를 주시하고 있었다.
A급 최상위 변이 던전이 발생했다는 징후가 뒤늦게 포착되면서, 협회는 최악의 강남 던전 브레이크 사태를 대비해 S급 헌터 호출권까지 만지작거리던 참이었다.
그때, 거대한 얼음 게이트가 파르르 떨리더니 스르르 녹아내리며 소멸했다.
그리고 흩날리는 서리 안개 너머로, 유지원 팀장과 박성태를 선두로 한 레이드 대원 15명이 위풍당당하게 밖으로 걸어 나왔.
단 한 명의 사망자도 없었으며, 중상자 역시 존재하지 않는 완벽한 무결점 생환이었다.
"와아아아아!"
"클리어했다! A급 던전이 돌파됐어!"
대기하고 있던 기자들과 시민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지르며 통제선 안으로 들이닥쳤다. 마이크와 카메라가 유지원과 박성태의 코앞까지 들이대어졌다.
"유지원 팀장님! 전대미문의 A급 변이 던전을 단 한 명의 낙오자도 없이 돌파하셨는데 비결이 무엇입니까?!"
"박성태 팀장님! 내부 기믹이 실시간으로 변한다는 보고가 있었는데 어떻게 대처하셨습니까?!"
기자들의 쏟아지는 질문에, 박성태는 마이크를 잡고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희가 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직…… 유지원 팀장님을 통해 흘러 들어온, 보이지 않는 위대한 설계자 '섀도우' 님의 완벽한 전술 공략도가 있었기에 가능한 기적이었습니다."
그의 폭탄선언에 기자들이 눈을 크게 떴다.
"섀도우라고요?! 영등포 트리플 브레이크와 사관학교 비리 폭로 사건의 그 섀도우 말씀이십니까?!"
"그렇습니다."
유지원이 마이크를 이어받아 단호하게 쐐기를 박았다.
"섀도우 님은 이 세상의 모든 인과와 던전의 흐름을 꿰뚫어 보시는 분입니다. 그분의 예언 같은 설계가 없었다면, 우리는 오늘 강남 한복판에서 차가운 얼음 조각상이 되었을 겁니다. 그분은 우리 대한민국 헌터계의 가장 위대한 '보이지 않는 등불'이십니다."
유지원의 그 찬란한 선언은 언론을 타고 전 세계 각성자 포럼으로 실시간 전파되었다.
'섀도우'라는 이름은 이제 단순한 정보 브로커의 수준을 넘어, 던전을 통제하고 인류를 구원하는 '신의 눈을 가진 예언자'로 격상되어 회자되기 시작했다.
그 난리법석의 현장.
기자들의 틈바구니를 헤치고, 낡은 가죽 재킷을 입은 한 소년이 조용히 통제선 밖으로 걸어 나가 지하철역 계단으로 향하고 있었다.
강우는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스마트폰으로 올라오는 포럼의 뉴스들을 보며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등불이라니…… 너무 과분한 칭호군."
그는 지하철 승강장의 벤치에 앉아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전신에 남아 있던 17번의 죽음의 흔적들이 깨끗하게 아물어 가고 있었다.
마침내 제3막 '무능력자의 게임 판도'의 가장 큰 폭풍이 평화롭게 끝을 맺었다.
강우는 지그시 눈을 감으며 다음 체스판의 움직임을 준비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