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망하면 하루 전으로 회귀합니다

36화: 사관학교의 그림자
서울 북한산 자락에 위치한 '대한 헌터 사관학교'는 명실상부한 대한민국 엘리트 각성자들의 요람이었다. 매년 엄격한 심사를 거쳐 선발된 수백 명의 각성자 생도들이 이곳에서 정예 헌터가 되기 위한 훈련을 받았다. 대형 길드의 후계자들, 그리고 세간의 주목을 받는 천재들이 모이는 만큼, 이곳은 거대 길드들의 보이지 않는 이권 싸움과 정치적 알력 다툼이 가장 치열하게 일어나는 각축장이기도 했다.
이 찬란하고 오만한 요람에, 한 무능력자가 발을 들여놓았다.
"거기, 한강우 조교! 멍하니 서 있지 말고 이 상자나 빨리 옮겨!"
"아, 네! 바로 옮기겠습니다."
강우는 헌터 사관학교의 훈련용 가죽 재킷을 입은 채 땀을 뻘뻘 흘리며 무거운 특수 장비 상자를 짊어졌다.
그가 사관학교에 들어온 신분은 생도가 아닌, 최하급 계약직 '던전 분석 및 장비 운반 조교'였다. 마력 반응 0%의 무능력자였지만, 영등포 대참사 때 섀도우의 지시로 만들어진 공로 중 일부(민간인 대피 유도 보조)를 유지원이 조작하여 추천서를 써준 덕분이었다.
"쯧쯧, 마력도 없는 놈이 사관학교 교정을 밟다니 세상 참 좋아졌군."
"그러게 말이야. 특별 전형이니 뭐니 하더니, 결국 그냥 인간 노예 한 마리 들여온 거잖아?"
교정 테이블에 앉아 있던 A반 생도들이 강우를 쳐다보며 들으라는 듯 낄낄거렸다. 그들의 가슴팍에는 번쩍이는 은빛 사관학교 배지가 붙어 있었다.
강우는 그들의 비아냥을 들은 체도 하지 않고 묵묵히 짐을 날랐다. 그의 차가운 눈동자는 상자 아래로 비치는 교정의 지형지물과, 사관학교 전역에 흐르는 마력 배관의 구조를 끊임없이 분석하고 있었다.
"비웃어라. 마음껏 떠들어두는 게 좋을 거다."
강우의 입꼬리가 보이지 않게 살짝 올라갔다.
그가 이곳에 온 진짜 목적은 하나였다.
유지원을 노리는 태성 길드의 비리 세력인 최현준 부길드장 라인, 그리고 그들과 연계된 사관학교 내부의 부패한 교관들이 벌일 '모의 던전 사고 테러'를 내부에서 완벽하게 박살 내기 위함이었다.
그때, 저 멀리 사관학교 본관 정문 앞이 시끌벅적해졌다.
검은색 고급 세단 여러 대가 들어서고, 그 안에서 단정한 단발머리에 차가운 푸른빛 눈동자를 지닌 여성이 내렸다. 태성 길드의 자랑이자, 국가 각성자 감사국 1조 팀장, 유지원 A급 헌터였다.
"와, 유지원 헌터다……!"
"정말 예쁘다. 실물로 보니까 마력 파동이 장난이 아닌데?"
생도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경외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유지원은 사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선배이자, 생도들의 롤모델이었다. 그녀는 이번 사관학교와 감사국, 그리고 대형 길드들이 합동으로 참여하는 '모의 던전 평가 훈련'의 특별 감독관 겸 외부 강사 자격으로 초청받은 상태였다.
경호원들과 교관들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걷던 유지원은, 문득 운동장 한구석에서 묵묵히 짐 상자를 나르고 있는 한 조교를 보았다.
후드를 눌러써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 수수한 체구와 독특한 걸음걸이는 그녀의 기억 속에 강렬하게 박혀 있는 누군가를 연상시켰다.
"……어?"
유지원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유지원 팀장님? 무슨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옆에서 안내하던 교무처장 최강민이 의아한 듯 물었다. 최강민은 최현준 부길드장의 친인척이자, 사관학교 내부에서 온갖 비리를 주도하는 핵심 인물 중 하나였다.
유지원은 애써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잠시 낯익은 사람을 본 것 같아서요. 계속 가시죠."
그녀는 다시 걸음을 옮겼지만, 눈빛은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설마…… 섀도우가 여기에 와 있는 건가? 조교 신분으로?'
그렇다면 섀도우가 경고했던 그 '모의 던전 테러'가 정말로 코앞으로 다가왔다는 증거였다.
그날 밤 11시. 사관학교 뒤편의 낡은 보일러실 지하.
희미한 백열등 불빛 아래에서 강우는 개인용 태블릿 컴퓨터를 켜고 사관학교의 내부 기밀망에서 해킹해 온 자료들을 정밀 분석하고 있었다.
"최강민 교무처장. 최현준 부길드장으로부터 정기적으로 막대한 비자금을 송금받은 흔적이 있군. 그리고 장비 납품 업체인 '현성 마도구'와 결탁해 생도들이 사용하는 모의 던전용 차단 아티팩트의 촉매를 불량품으로 바꿔치기했어."
모의 던전 훈련은 생도들의 안전을 위해 위험 상황 발생 시 게이트를 강제로 닫거나 생도들을 외부로 워프시키는 '차단 아티팩트'를 설치해 두고 진행된다.
만약 이 아티팩트가 결정적인 순간에 오작동한다면, 안전해야 할 모의 던전은 한순간에 몬스터가 끓어넘치는 아비규환의 진짜 던전으로 돌변하게 된다.
"훈련은 내일 오전 10시. 장소는 사관학교 지하에 구축된 인공 게이트 [시뮬레이터 던전 B-3]."
강우는 태블릿을 끄고 품에서 무전기를 꺼냈다.
치이익.
"유지원 씨. 제 목소리가 들립니까?"
- "섀도우……! 정말 사관학교에 조교로 들어와 있는 건가요? 낮에 운동장에서 본 사람이 당신 맞죠?"
유지원의 다급한 음성이 무전기를 타고 전해졌다.
"제 신분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일 오전 10시 훈련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최강민 교무처장이 아티팩트 조작을 마쳤습니다. 훈련이 시작된 지 정확히 30분 뒤, 던전 내부의 마력 증폭기가 과부하를 일으키며 외부 차단 장벽이 봉쇄될 겁니다. 그리고 C급 난이도로 세팅되었던 인공 게이트가 일시적으로 B급 상위 수준으로 폭주하게 됩니다."
- "B급 상위라니요?! 거기는 아직 미숙한 생도 수십 명이 들어가서 훈련받는 곳이에요! 장벽까지 봉쇄되면 전멸할 수도 있어요!"
"그것이 최현준과 최강민이 원하는 시나리오입니다. 대형 사고를 유발해 당신의 현장 감독 소홀 책임을 묻고, 감사국을 코너로 몰아넣으려는 심산이죠. 물론 그 과정에서 당신이 사고사로 위장되어 목숨을 잃는다면 그들에게는 금상첨화일 테고요."
유지원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 "지금 당장 교장에게 보고하고 훈련을 전면 중단시키겠어요!"
"소용없습니다. 최강민이 이미 교장과 다른 이사진들에게 뇌물을 먹여 포섭해 둔 상태입니다. 증거 없이 움직였다간 역으로 명예훼손과 길드 음해 혐의로 당신만 고립될 뿐입니다."
- "그럼 어쩌라는 건가요? 생도들이 죽어가는 걸 보고만 있으란 말이에요?!"
강우는 차가운 어둠 속에서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제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독이 든 잔을 기꺼이 들이키고, 역으로 그들의 목구멍에 쏟아부어야 한다고."
- "설마……."
"내일 훈련은 그대로 진행합니다. 다만, 던전이 폭주하기 직전 10분의 골든타임이 존재합니다. 제가 던전 내부의 마력 흐름을 실시간으로 조작해, B급으로 폭주하는 던전의 핵심 기믹과 몬스터 패턴을 완전히 해체해 버리겠습니다. 유지원 씨는 제가 무전으로 지시하는 전술적 동선에 맞춰 생도들을 완벽하게 지휘하여 무사히 탈출시키면 됩니다."
무전기 저편에서 긴장된 침묵이 이어졌다.
이것은 목숨을 건 도박이었다. 만약 섀도우의 분석이 1초라도 어긋나거나, 던전 내부의 함정을 꿰뚫지 못한다면 유지원 본인을 포함한 수십 명의 생도가 지하 던전에서 뼈도 추리지 못하고 마수의 먹이가 될 터였다.
하지만 유지원에게는 선택지가 없었다. 그리고 영등포에서 이미 기적을 직접 보여주었던 섀도우였기에, 그녀의 가슴 깊은 곳에는 그에 대한 맹목적인 신뢰가 싹터 있었다.
- "……믿겠어요, 섀도우. 전 어떻게 움직이면 되죠?"
"내일 아침 9시 50분. 던전 진입 전에 감사국 전용 마도 통신기를 켜 두십시오. 제가 그 주파수를 해킹해 당신에게만 들리는 신호를 쏘겠습니다. 그리고 절대로 최강민의 눈치를 보지 말고 당당하게 행동하십시오. 쥐새끼들을 덫으로 몰아넣는 것은 사냥꾼의 몫입니다."
무전을 끊은 강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어둠 속에서 보일러실 구석에 숨겨두었던 훈련용 보조 장비 백팩을 멨다. 백팩 안에는 무능력자인 그가 모의 던전 내부의 마력 라인을 교란할 때 쓸 은닉형 마력 바이패스 장치들과 단검들이 들어 있었다.
"체스판의 말들을 움직일 시간이다."
강우의 눈동자가 깊은 어둠 속에서 형형하게 빛났다.
사관학교의 찬란한 불빛 아래, 보이지 않는 그림자가 서서히 드리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