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망하면 하루 전으로 회귀합니다

18화: 인과의 지배자
두 번째 루프. 다시 들어선 C급 던전 [독거미의 둥지].
눅눅하고 끈적한 점액질의 냄새와 붉은빛의 일그러진 게이트 입구는 어제와 똑같았지만, 그 안을 걷고 있는 강우의 머릿속은 이미 완전히 다른 체스판이 구동 중이었다.
"어이, 신참. 빨리 짐 들어!"
어제와 똑같이 날아오는 무거운 가죽 배낭.
강우는 어제처럼 꼴사납게 구르는 대신, 배낭을 가볍게 어깨로 받아치며 고개를 숙였다.
"예, 알겠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유순했으나, 눈동자는 이미 사냥감을 포착한 포식자의 그것이었다.
동굴 내부로 진입한 강우는 채무자들이 곡괭이질을 시작하자마자, 자신의 등에 멘 짐가방의 위치를 교묘하게 틀어 경비 헌터들의 시선 사각지대로 이동했다.
그는 주머니에서 손가락만 한 크기의 초소형 전파 차단기와 해킹 단말기를 꺼냈다.
이 단말기에는 어제 도청한 무전 신호를 바탕으로 제작한 골든 키의 사설 결계 주파수 교란 코드가 입력되어 있었다.
탁.
강우는 결계 제어 장치가 숨겨진 동굴 좌측 암벽 틈새에 전파 차단기를 밀어 넣었다.
이로써 골든 키 본사에서 사설 던전의 상황을 실시간으로 감시하던 원격 모니터링 신호는 동결되었다. 본사 모니터에는 던전이 아무런 문제 없이 안전하게 구동 중인 평온한 화면이 루프물처럼 반복 재생될 터였다.
그 후 강우는 채굴 현장으로 돌아와, 조용히 채무자들의 틈바구니로 파고들었다.
그의 곁에는 사채 빚 독촉에 짓눌려 헵더기 같은 몰골을 하고 있던 중년의 사내가 떨리는 손으로 곡괭이를 휘두르고 있었다.
강우는 귓가에 들릴 듯 말 듯 한 나지막한 목소리로 사내에게 속삭였다.
"아저씨, 10분 뒤에 이 던전이 폭주할 겁니다."
"……뭐, 뭐라고?"
사내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강우를 바라보았다. 강우는 곡괭이질을 멈추지 않은 채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독거미 떼가 사방에서 쏟아질 겁니다. 경비 헌터들은 여러분을 버리고 동굴 입구 우측의 예비 포탈로 도망치려 할 거예요. 내가 신호를 주면, 지체하지 말고 사람들을 모아 예비 포탈이 있는 곳으로 달리십시오."
"그,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꼬맹이 너 미쳤어?!"
"살고 싶으면 내 말을 믿으셔야 합니다. 경비들을 믿다간 10분 뒤에 모두 거미 밥이 될 겁니다."
강우의 눈동자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그 기묘한 확신과 냉철함에 사내는 마른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내는 조용히 주변의 동료 채무자들에게 귓속말로 강우의 경고를 전달하기 시작했다. 불신의 눈초리들이 강우를 향했지만, 죽음의 그늘이 드리운 던전 안에서 채무자들은 본능적으로 이상한 기류를 감지하고 몸을 바짝 긴장시켰다.
시간은 흘러 마침내 진입 후 1시간 12분.
어제 던전이 붕괴하고 거미 떼가 팝업했던 바로 그 시각이었다.
지이이이잉―――――.
동굴 내부의 마력 흐름이 기이하게 뒤틀리며 천장의 거미 알들이 부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어? 결계 제어 장치 압력이 왜 이러지?!"
"대장! 또 오작동입니다! 몬스터 팝업 제어가 안 돼요!"
어제와 똑같은 부하 헌터들의 비명.
경비 대장 배철수는 혀를 차며 무기를 챙겼다.
"쳇, 장비가 또 말썽이군. 야! 채무자 놈들은 놔두고 예비 포탈로 퇴각한다! 서둘러!"
배철수 일당이 채무자들을 버려둔 채 동굴 입구 우측 벽면의 비밀 홈으로 달려갔다.
그 홈에는 비상 탈출용 예비 포탈 제어 패널이 설치되어 있었다. 배철수가 패널에 보안 코드를 입력하기 위해 손가락을 움직였다.
[보안 코드: 8842#]
어제 강우가 도청을 통해 알아낸 바로 그 비밀번호였다.
하지만 배철수가 번호를 입력하고 엔터를 누르는 순간, 패널 화면에 붉은색 경고등이 들어왔다.
삐이이익!
[오류: 관리자 권한이 만료되었습니다. 시스템 접근이 차단됩니다.]
"뭐, 뭐야?! 코드가 왜 안 먹혀?!"
배철수가 사색이 되어 패널을 두들겼다.
"그 코드의 암호화 키를 제가 5분 전에 미리 변경해 두었기 때문입니다."
어둠 속에서 강우가 해킹 단말기를 쥔 채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의 뒤로는 이미 약속된 신호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인 채무자들과 짐꾼 이십여 명이 배철수 일당의 뒤를 포위하듯 늘어서 있었다.
"너…… 네놈이 한강우?! 네가 어떻게 결계 패널을 건드린 거야?!"
배철수가 믿을 수 없다는 듯 강우를 향해 검을 겨누었다.
그때, 천장의 거미 알들이 일제히 갈라지며 수만 마리의 독거미 떼가 바닥으로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사아아아악!
"끼이이이익!"
굶주린 독거미들의 안광이 동굴 안을 붉게 물들였다.
거미들은 도망치지 못하고 제자리에 묶인 배철수 일당과 강우의 무리를 향해 빠르게 좁혀오기 시작했다.
"이 빌어먹을 새끼가! 당장 포탈 안 열어?! 안 열면 여기서 네놈부터 찢어 죽이겠다!"
배철수가 마력을 뿜어내며 강우를 향해 덮쳐들려 했다.
하지만 강우는 눈동자 하나 까딱하지 않고, 단말기의 터치스크린을 켰다.
"열어 드려야죠."
위잉―――――!
강우가 단말기를 조작하자, 배철수 일당의 뒤편이 아닌, 채무자들과 강우가 서 있는 동굴 우측 안전지대의 벽면에서 푸른색의 정상 포탈이 찬란하게 솟구쳐 올랐.
강우가 미리 주파수를 해킹해 입구를 임의로 변경해 둔 정상 탈출 포탈이었다.
"아저씨, 지금입니다! 모두 포탈로 들어가세요!"
강우의 외침에 채무자들과 짐꾼들이 앞다투어 포탈 속으로 뛰어들었다.
"이, 이 자식들이! 비켜! 우리도 나가야 해!"
배철수 일당이 그 대열에 끼어들기 위해 달리려 했다.
그러나 강우는 차갑게 미소 지으며 오른손을 바닥으로 뻗었다.
[스킬 '심연의 손길' 발동.]
바닥의 그림자가 거대한 검은 장벽이 되어 배철수 일당의 앞길을 완전히 가로막았다.
그 장벽은 배철수의 검에 실린 푸른 마력을 포식하며 더욱 단단하게 굳어졌다.
"으앗! 마력이 차단됐어!"
"한강우! 네놈이 정녕 죽고 싶어 환장했느냐!"
배철수가 절규했다.
그의 등 뒤로는 이미 집채만 한 거대 독거미들의 여왕이 둥지 심층부에서 기어 나와 배철수의 목덜미를 노리고 있었다.
"당신들이 채무자들에게 했던 짓을, 이제 거미들에게 고스란히 돌려받으십시오."
강우는 마지막 채무자가 포탈을 통과하는 것을 확인한 뒤, 자신 역시 포탈 안으로 몸을 던졌다.
그가 사라짐과 동시에 검은 그림자 장벽이 무너지며, 배철수 일당의 비명 소리가 독거미들의 포효 소리와 함께 어두운 둥지 속에 영원히 갇혀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