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당 전담 힐러가 되었다

3화: 도망 못 가는 귀빈
강이현은 의자에 앉자마자 탈출 경로부터 세었다.
문 하나. 문밖 보초 둘. 천장 환풍구 하나. 환풍구는 손바닥 두 개만 했고 나사를 풀 도구도 없었다.
휴대폰은 가방에서 사라져 있었다. 창문은 없었다. 벽은 방음재로 덮여 있었고 바닥에는 피를 닦은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귀빈 대기실이라고 부르기에는 지나치게 정직한 감금실이었다.
"물입니다."
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가 생수병을 두 손으로 내밀었다. 손등에는 불에 탄 나뭇가지 같은 문신이 있었다. 조금 전까지 이현에게 총을 겨누던 사람 중 하나였다.
이현은 병뚜껑을 확인했다.
"새 병으로 주십시오."
남자의 어깨가 굳었다.
"독을 의심하십니까?"
"환자가 누구든 의료진 탈수는 치료 성공률을 낮춥니다."
사실은 의심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면 여기서 물 한 모금도 못 마실 가능성이 있었다.
남자는 아주 진지하게 고개를 숙였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는 새 병을 가지러 뛰어갔다. 이현은 그 뒷모습을 보며 입술 안쪽을 깨물었다.
명심하지 말고 문이나 열어 줬으면 좋겠다.
차무진은 치료 이후 다시 강철 침상에 누워 있었다. 통증은 가라앉았지만 완치가 아니었다. 등뼈 깊은 곳의 검은 결절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것이 다시 붉은 마력을 되돌려 보내면 이 지하 아지트는 그대로 터질 것이다.
그 사실 때문에 이현은 도망칠 수도 없었다.
아니. 도망치고 싶기는 했다. 다만 그가 사라진 뒤 차무진이 폭주하면 골목 하나가 아니라 지하 시장 전체가 날아갈 수 있었다.
문이 열렸다.
이번에는 여자가 들어왔다. 짧은 검은 머리와 날카로운 눈매. 차무진의 침상 옆에서 계속 이현을 감시하던 간부였다.
"유라다."
"강이현입니다."
"안다. 회장님이 세 번 확인하셨다."
세 번.
이현은 그 숫자에 어쩐지 피곤해졌다.
유라는 테이블 위에 소독약과 붕대와 새 물병을 정렬했다. 정렬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군대식이었다. 병뚜껑 방향까지 같았다.
"필요한 물품을 말해라. 최대한 맞춘다."
"휴대폰이요."
"그건 안 된다."
"택시비요."
"그것도 안 된다."
"그럼 최대한이라는 말은 빼는 게 좋겠습니다."
유라의 눈썹이 조금 올라갔다. 문밖 보초들이 숨을 죽였다.
이현은 아차 싶었지만 이미 늦었다. 그런데 유라는 화내지 않았다. 오히려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한 표현을 선호하시는군."
아니다. 그냥 보내 달라는 뜻이었다.
"회장님이 지시하셨다. 선생님은 다치면 안 된다. 굶어도 안 되고 잠을 못 자도 안 된다. 다만 나가면 안 된다."
"앞뒤가 모순됩니다."
"우리도 그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회장님 명령이다."
이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논리로 이길 수 있는 조직이 아니었다.
그때 복도 쪽에서 비명이 들렸다.
짧고 탁한 소리였다. 뒤이어 무언가 벽에 부딪혔다.
유라가 고개를 돌렸다. 문밖 보초들이 동시에 무기를 잡았다.
"뭡니까."
이현의 입에서 질문이 먼저 나왔다.
"신경 쓸 일 아니다."
"환자 소리 같았습니다."
"조직원 하나가 발작했다. 회장님 상태 확인이 우선이라 뒤로 미뤘다."
이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리가 아직 후들거렸다.
"보겠습니다."
유라가 막아섰다.
"회장님 재진찰 전까지 체력 보존이 우선이다."
"발작 환자를 복도에 두면 소란이 커집니다."
"묶어 두면 된다."
"묶어서 해결됐으면 아까 차무진 씨도 멀쩡했겠죠."
복도가 조용해졌다. 유라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이현은 뒤늦게 자신이 차무진을 이름으로 불렀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나 유라는 그 부분보다 다른 말을 들은 듯했다.
"회장님을 예로 들어 판단하신 건가."
"의학적으로 비슷한 위험이 있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럼 봐라."
유라가 옆으로 비켰다.
복도 끝에는 남자 하나가 바닥에 눌려 있었다. 조직원 셋이 팔과 다리를 잡고 있었고 한 명은 목덜미에 마력 억제 주사를 들이대고 있었다. 남자의 눈 흰자가 검게 물들고 있었다. 손끝에서는 푸른 불꽃이 튀었다.
이현은 가까이 다가가다 멈췄다.
"무기 내리십시오."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주사도요."
억제 주사를 든 남자가 유라를 보았다. 유라는 이현을 보았다.
이현은 숨을 들이마셨다.
"그 상태로 누르면 안쪽에서 더 튑니다. 주사 놓다가 심장 쪽 회로가 막히면 사망합니다."
정확한 의학 지식인지는 자신도 몰랐다. 하지만 손끝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푸른 불꽃은 피부 위가 아니라 흉골 아래에서 엉키고 있었다.
유라가 손을 들었다.
"내려."
무기가 하나씩 내려갔다. 조직원들은 환자를 누르던 힘도 줄였다. 환자의 몸이 한 번 크게 떨렸다.
이현은 그 옆에 무릎을 꿇었다.
"이름은요."
"도식."
"도식 씨. 들리면 손가락을 움직이십시오."
환자는 대답하지 못했다. 대신 손가락 끝에서 푸른 불꽃이 바닥을 태웠다.
이현은 그의 손목을 잡았다.
차무진 때와는 달랐다. 거대한 용광로가 아니라 과부하 난 전선 같았다. 얇은 회로가 여러 군데에서 끊겼고 끊긴 곳마다 마력이 새고 있었다.
이현의 손끝에서 회색빛이 피어났다.
주변에서 낮은 탄성이 번졌다.
"조용히."
이현은 작게 말했다.
자기 귀에 들으려고 한 말이었다. 그러나 복도 전체가 숨을 죽였다.
회색빛은 푸른 불꽃을 덮지 않았다. 새는 지점을 찾아 얇게 감았다. 끊긴 회로를 완전히 붙이는 건 불가능했다. 대신 마력이 한곳에 모이지 않도록 길을 나누었다.
도식의 호흡이 조금 낮아졌다.
그 순간 이현의 손끝이 저렸다.
차무진을 치료할 때처럼 머릿속이 갈라지는 수준은 아니었다. 하지만 손목 안쪽에서 낯선 피로가 올라왔다. 마치 오래 쓰지 않은 근육을 억지로 당긴 느낌이었다.
역시 공짜가 아니다.
이현은 이를 악물고 마지막 새는 지점을 눌렀다.
도식의 눈동자에서 검은빛이 빠졌다. 몸을 누르고 있던 조직원들이 힘을 뺐다. 남자는 거칠게 숨을 들이마셨다.
"살아 있습니다."
이현은 손을 놓았다.
말하자마자 주변 공기가 바뀌었다.
방금 전까지 자신을 감시하던 시선들이 아래로 내려갔다. 누군가는 고개를 숙였고 누군가는 무전기를 움켜쥐었다.
"선생님이 또 살리셨다."
누가 중얼거렸는지 몰랐다.
이현은 그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또라는 말은 다음도 있다는 뜻이었다.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제 동생이 손을 못 씁니다."
"저는 어깨 회로가 찢겼습니다."
"회장님 허락만 있으면 먼저 봐 주실 수 있습니까?"
목소리들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복도 저편 문들이 열렸다. 붕대를 감은 자들과 창백한 얼굴의 조직원들이 하나둘 나타났다.
이현은 그 숫자를 보고 등골이 서늘해졌다.
전부 받으면 죽는다.
죽는 건 과장이 아니었다. 차무진 한 명만으로 손끝이 떨렸다. 도식까지 보고 나니 손목 안쪽이 얼얼했다. 이대로 줄줄이 치료하면 자신이 먼저 쓰러질 것이다.
하지만 안 받겠다고만 하면 이들 중 누군가는 폭주할 것이다. 폭주하면 다시 자신이 불려 나온다. 그때는 더 나쁜 상태일 것이다.
이현은 벽에 기대지 않으려고 발끝에 힘을 줬다.
"모두 멈추십시오."
복도가 조용해졌다.
본인은 살려 달라는 뜻으로 한 말이었다. 빌런들은 명령으로 들은 듯했다.
이현은 그 오해를 이용하기로 했다. 정정해서 좋아질 일이 아니었다.
"지금부터 진료 순서를 임의로 바꾸지 않습니다. 발작 중인 환자와 폭주 위험 환자가 우선입니다. 그 외에는 기다리십시오."
유라가 눈을 가늘게 떴다.
"순서를 누가 정하지?"
"제가 정합니다."
말하고 나서 이현은 바로 덧붙였다.
"환자를 본 사람이 정해야 합니다."
너무 거창하게 들리지 않게 하려는 보충이었다. 효과는 없었다. 조직원들의 얼굴이 더 굳었다.
"그리고 치료 중에는 무기 금지입니다. 환자와 의료진을 위협하면 치료를 중단합니다."
"의료진이라면 선생님을 말하나."
"지금 여기에는 저뿐입니다."
말하고 보니 더 비참했다.
유라는 잠시 이현을 보았다. 그녀의 시선은 이현의 떨리는 손끝에 닿았다. 그다음 바닥에 쓰러진 도식과 복도에 모인 환자들을 훑었다.
"회장님께 보고한다."
"보고 전에 환자 명단부터 만드십시오."
이현은 거의 반사적으로 말했다.
"증상과 발작 시간과 사용한 강화제 여부를 적어야 합니다. 안 그러면 또 같은 짓을 반복합니다."
"같은 짓?"
"아픈 사람을 묶고 찌르는 짓이요."
복도 안이 싸늘해졌다.
이현은 속으로 눈을 감았다. 오늘은 혀가 너무 오래 살았다.
그러나 유라는 웃지 않았다. 화내지도 않았다.
"명단 작성."
그녀가 명령했다.
조직원들이 움직였다. 누군가는 종이를 찾았고 누군가는 환자들을 벽 쪽으로 세웠다. 방금 전까지 총을 잡던 손들이 이름과 증상을 적기 시작했다.
이현은 그 광경을 멍하니 보았다.
진짜로 줄을 세우고 있었다.
그때 복도 끝 스피커가 켜졌다.
"선생님."
차무진의 목소리였다. 잠에서 깬 듯 낮고 거칠었다.
복도 전체가 동시에 굳었다.
"그 조건들."
이현은 마른침을 삼켰다.
"의학적 안전 조치입니다."
"그대로 해."
차무진이 말했다.
"내가 다시 불타기 전까지 저 사람 말이 규칙이다."
규칙.
이현은 그 단어가 복도 벽에 박히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조직원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유라도 짧게 고개를 숙였다. 도식은 아직 바닥에 누운 채 이현의 손목을 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이현은 대답하지 못했다.
감금실 문은 여전히 닫혀 있었다. 휴대폰은 없었다. 택시비도 없었다. 다만 물과 소독약과 환자 명단이 생겼다.
도망칠 길을 찾던 사람이 대기열부터 만들고 있었다.
이현은 아주 작게 한숨을 쉬었다.
"우선 의자 하나 더 가져오십시오."
유라가 바로 고개를 들었다.
"환자용인가?"
"제 겁니다."
잠깐 정적이 흘렀다.
차무진의 낮은 웃음이 스피커 너머로 번졌다.
"가져다드려."
이번에도 아무도 그 말을 농담으로 듣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