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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 전담 힐러가 되었다4화

악당 전담 힐러가 되었다

악당 전담 힐러가 되었다

4화: 진료비와 퇴근길

강이현은 환자 명단을 받아 들고 가장 먼저 종이를 뒤집었다.

이름만 적힌 명단은 쓸모가 없었다. 죽을 순서는 이름순이 아니었다.

종이 뒷면에는 삐뚤빼뚤한 글씨로 열두 개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몇몇 이름 옆에는 팔이 굳음, 잠을 못 잠, 피를 토함 같은 짧은 메모가 붙어 있었다.

누군가는 자기 이름에 붉은 줄까지 그어 놓았다.

"이건 명단이 아니라 줄서기입니다."

이현이 말하자 복도에 모인 조직원들이 굳었다.

유라는 종이를 내려다보았다.

"환자 명단을 만들라고 하지 않았나."

"환자가 무슨 증상인지도 없고 언제부터 아팠는지도 없습니다. 이걸 보고 누가 먼저 죽을지 어떻게 정합니까."

조금 날카롭게 말한 뒤에야 이현은 입을 다물었다. 상대는 병원 접수대 앞의 보호자가 아니었다. 바로 앞에서 총을 내렸다고 해도 빌런은 빌런이었다.

하지만 유라는 화를 내지 않았다. 오히려 종이를 더 가까이 가져왔다.

"필요한 항목을 말해라."

이현은 잠시 그녀를 보았다. 정말 적으려는 눈이었다.

"증상. 마지막 발작 시간. 강화제나 억제제 사용 여부. 다친 부위. 의식이 흐리거나 환각이 있는지도요."

"그뿐인가?"

"치료 중에 무기를 꺼낼 가능성도 적으십시오."

복도 끝에서 누군가 헛기침했다.

이현은 그쪽을 보지 않은 채 덧붙였다.

"무기 꺼내는 사람은 뒤로 미뤄야 하니까요."

이번에는 침묵이 길었다.

조직원들의 손이 하나둘 허리춤으로 내려갔다. 총집과 칼집을 가리는 모양새가 지나치게 수상했다. 이현은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역시 적어야 했다.

유라는 손을 내밀었다. 부하가 급히 태블릿과 펜을 건넸다.

"들었지. 항목 하나라도 비우면 명단에서 뺀다. 무기 적발자는 맨 뒤다."

"왜 맨 뒤입니까?"

덩치 큰 남자가 불만스럽게 물었다.

유라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선생님이 그렇게 말했다."

"저는 무기 꺼내는 사람을 뒤로 미룬다고 했지 무기 가진 사람을 전부 뒤로 미룬다고는……"

이현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조직원들이 너무 진지하게 태블릿을 받아 들었기 때문이다. 방금 전까지 총을 잡던 손들이 자기 증상을 적고 있었다. 누군가는 글을 몰라 옆사람에게 조용히 이름을 불러 주기까지 했다.

이현은 관자놀이를 눌렀다.

정정하면 규칙이 더 늘어날 것 같았다.

그는 명단 맨 위의 이름을 짚었다.

"도식 씨는요."

복도 벽에 기대 앉아 있던 도식이 고개를 들었다. 얼굴은 아직 창백했지만 눈동자에 번지던 검은빛은 사라져 있었다.

유라가 새로 정리된 기록을 읽었다.

"사흘 전부터 손끝 떨림. 어제 밤에 한 차례 실신. 오늘 새벽 불법 강화제 세 병을 투여했다. 이틀 동안 임무가 있었고 잠은 두 시간."

"세 병이요?"

도식이 시선을 피했다.

"일이 밀려서……"

"그 일을 시킨 사람은요?"

도식은 대답하지 못했다. 다른 조직원들이 동시에 숨을 죽였다.

이현은 더 묻지 않았다. 그 대답을 들었다가 자신이 뭘 해야 할지 알게 되는 편이 훨씬 위험했다.

대신 차트 위에 굵게 적었다.

강화제 중단.

"도식 씨는 오늘 재진만 합니다. 새 환자는 받지 않겠습니다."

기다리던 사람들 사이에서 낮은 소란이 일었다.

"제 동생은 손가락이 굳었습니다."

"저는 이틀째 열을 못 내립니다."

"회장님 치료보다 급한 사람이 있습니까?"

목소리들이 겹쳤다. 이현은 손끝을 내려다보았다. 회색빛은 이미 사라졌는데 손가락 관절마다 바늘이 박힌 것처럼 저렸다.

차무진의 등뼈 깊은 곳에 남은 검은 결절도 떠올랐다. 그걸 다시 건드릴 날이 올 것이다. 그때 손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으면 이 지하 전체가 타 버릴 수 있었다.

이현은 숨을 골랐다.

"지금 여기서 소리 지르는 분은 제일 마지막입니다."

소란이 즉시 멎었다.

본인은 조용히 해 달라는 뜻이었다. 그런데 조직원들은 처형 순서라도 통보받은 얼굴이 됐다.

유라가 태블릿을 들고 복도 가운데에 섰다.

"들었지. 환자들은 벽 쪽으로. 보호자는 한 명만 남아라. 떠드는 놈은 맨 뒤다."

이번에도 아무도 토를 달지 않았다.

이현은 그 질서가 편해지는 자신을 발견하고 잠깐 불쾌해졌다. 총구를 피할 수 있다면 줄을 세우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는 순간부터 여기의 방식에 익숙해질 것 같았다.

그래도 지금은 환자를 봐야 했다.

도식의 앞에 무릎을 꿇자 남자가 마른침을 삼켰다.

"선생님. 저 다시 이상해지면 묶으라고 하십시오."

"묶는다고 좋아지지 않습니다."

"그럼 어떻게 합니까."

"오늘은 움직이지 말고 잠부터 자십시오."

도식의 얼굴이 어색하게 굳었다. 빌런 조직의 하급 조직원에게 잠을 자라는 처방은 생각보다 낯선 모양이었다.

이현은 그의 손목을 잡았다.

피부 아래에서 푸른 불꽃이 약하게 튀었다. 전보다 작았지만 흐름은 더 지저분했다. 억지로 눌려 있던 마력이 여러 갈래로 새고 있었다.

강화제의 흔적이었다.

회색빛이 손끝에서 피어오르자 도식의 몸이 움찔했다.

이번에는 장면이 보이지 않았다. 대신 목이 바싹 타는 감각과 낯선 공포가 밀려왔다. 어두운 곳에 혼자 갇힌 듯한 답답함이 가슴을 조였다.

도식의 감각이 잠깐 넘어온 것이었다.

이현은 이를 악물었다.

회로의 끊긴 자리를 붙일 수는 없었다. 그는 푸른 마력이 한곳으로 몰리지 않게 갈래를 나눴다. 새는 지점 주변을 얇게 감싸고 과하게 부풀어 오른 길 하나를 눌렀다.

도식이 거친 숨을 토했다.

이현의 시야가 순간 기울었다.

손목 안쪽에서 뜨거운 선이 팔꿈치까지 치고 올라왔다. 붙잡고 있던 손에 힘이 풀릴 뻔했다.

"선생님?"

유라의 목소리가 가까웠다.

"주사……"

누군가 억제 주사를 꺼내는 기척이 났다.

이현은 고개도 들지 못한 채 말했다.

"넣지 마십시오."

짧은 말이었지만 손끝이 떨렸다.

"지금 넣으면 다시 막힙니다. 물만 주고 눕히세요. 열이 오르면 저를 부르지 말고 먼저 기록하십시오. 몇 시에 시작했는지부터요."

도식의 손가락에서 푸른 불꽃이 꺼졌다. 남자는 기진맥진한 얼굴로 바닥에 기대었다.

이현도 그 옆에 주저앉을 뻔했다.

유라가 팔을 붙잡았다. 손은 단단했지만 힘을 주지는 않았다.

"걸을 수 있나."

"걸을 수는 있습니다."

"앉아라."

"환자들이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앉으라는 거다. 의료진이 쓰러지면 안 된다."

그 말은 예상보다 정상적이었다. 이현은 유라를 한 번 쳐다본 뒤 벽 쪽 의자에 앉았다.

조직원들이 길을 비켰다. 어떤 이는 그가 손목을 감싸 쥐는 모습을 보고 고개를 깊이 숙였다. 마치 대단한 희생이라도 목격한 사람들 같았다.

이현은 자기 손목이 아픈 이유를 아무에게도 설명하지 않았다. 설명하면 오늘 안에 열 명은 더 치료해야 할 것 같았다.

"오늘 진료는 여기까지입니다."

누군가 숨을 들이켰다.

이현은 차트를 정리하며 말을 이었다.

"도식 씨는 두 시간 뒤에 다시 확인합니다. 그 외 환자는 증상 분류가 끝난 뒤에 정하겠습니다. 제 허락 없이 강화제를 쓰거나 억제 주사를 놓으면 그 사람은 진료에서 제외합니다."

"제외라니요?"

"제가 고칠 수 없는 상태로 만들지 말라는 뜻입니다."

차무진의 스피커가 켜졌다.

"들었지. 선생님 말 어기는 놈은 내 치료도 방해하는 놈이다."

낮고 건조한 목소리였다.

복도에 있던 조직원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유라는 태블릿에 새 항목을 추가했다.

이현은 더 이상 저 장면을 보고 싶지 않아 종이를 내밀었다.

"그리고 제 조건을 말하겠습니다."

유라의 시선이 그에게 돌아왔다.

"말해라."

"잠글 수 있는 방이 필요합니다."

"문은 잠겨 있다."

"밖에서 여는 쪽 말고 안에서 잠글 수 있는 쪽이요."

유라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이현은 목이 마른 것을 느끼며 계속했다.

"치료 기록은 제가 보관합니다. 환자 상태를 제 동의 없이 다른 사람에게 넘기지 마십시오. 진료 사이에는 휴식 시간이 필요하고 외부 연락도 확인해야 합니다."

"밖에 나가겠다는 뜻인가."

복도 끝의 공기가 바짝 조여 들었다.

이현은 고개를 저었다.

지금 도망치겠다고 말하면 여기서 나가는 건 시체가 될 것이다. 그렇다고 나갈 생각이 없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

"제 연락을 확인하겠다는 뜻입니다. 제가 사라진 걸 누가 아는지 알아야 하니까요. 그리고 치료비도 필요합니다."

유라의 눈썹이 조금 올라갔다.

"돈이 필요하나?"

"저는 납치된 사람입니다. 공짜 야근까지 할 생각은 없습니다."

말하고 나서 이현은 손끝을 가운 주머니에 넣었다. 너무 세게 말했나 싶었지만 물릴 생각은 없었다.

차무진의 웃음이 스피커 너머에서 낮게 울렸다.

"얼마면 되지?"

이현은 바로 답하지 못했다.

금액을 부르는 순간 자기 목숨에 가격표를 붙이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협회에서 받은 돈으로는 언제든 버려질 수 있는 F급 힐러가 될 뿐이었다. 여기는 최소한 자신이 쓰러지면 곤란해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 사실이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이용할 수는 있었다.

"환자 상태를 보고 정합니다. 치료 전에는 차트를 받고 치료 후에는 제가 기록을 남깁니다. 제 동의 없는 진료도 없습니다."

"거부할 수도 있나?"

유라가 물었다.

이현은 손목의 통증을 꾹 눌렀다.

"제가 죽을 것 같으면 거부합니다. 환자가 제 지시를 안 따르면 거부하고요."

차무진은 한참 대답하지 않았다.

이현은 스피커만 바라보았다. 여기서 거절당하면 다시 감금실로 돌아가 도망칠 틈만 계산해야 할 것이다.

"그것도 규칙으로 해."

마침내 차무진이 말했다.

"선생님이 거부한 치료는 아무도 강요하지 마라."

유라는 바로 태블릿에 적었다.

"방은 바꾼다. 안쪽 잠금장치도 달겠다. 치료 기록은 암호화해서 선생님 전용 단말에 넣어라. 정산은 오늘 안에 방법을 정한다."

너무 빠른 대답이었다.

이현은 잠시 멍해졌다. 그저 최소한의 안전을 요구했을 뿐인데 병원 개업 절차가 굴러가기 시작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휴대폰요."

유라는 품에서 검은 휴대폰을 꺼냈다.

"확인해라. 발신과 수신은 기록한다."

이현은 폰을 받아 들었다.

화면에는 부재중 전화가 열한 통 쌓여 있었다. 전부 협회 하청 반장이었다. 마지막 메시지는 짧았다.

내일까지 연락 없으면 무단결근 처리한다.

그 아래에는 급여 정산 보류 안내도 있었다.

이현은 한참 화면만 보았다.

납치되었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건 이해했다. 그래도 한 번쯤은 무슨 일이 있냐고 물을 줄 알았다. 그 한마디조차 없었다.

유라가 화면 너머를 보며 물었다.

"연락할 곳이 있나."

"없습니다."

대답은 생각보다 쉽게 나왔다.

바로 그때 낯선 번호로 문자가 들어왔다.

강이현 씨를 찾는 쪽이 따로 있습니다.

이현의 손끝이 굳었다.

다음 문자가 곧이어 도착했다.

블랙 아카샤가 그쪽보다 먼저 찾았을 뿐입니다.

유라의 표정이 처음으로 변했다. 그녀는 휴대폰을 낚아채지 않고 이현의 손에 든 화면만 바라보았다.

"발신 추적한다."

무전기를 잡는 목소리가 차가워졌다.

복도에 있던 조직원들이 다시 무기를 만졌다. 이현은 즉시 그들을 향해 말했다.

"여기서는 안 됩니다."

"선생님?"

"환자가 있습니다. 총 꺼내지 마십시오. 도식 씨도 쉬어야 합니다."

유라가 손을 들었다.

"무기 해제. 경계는 바깥에서 한다."

조직원들이 조용히 손을 내렸다.

이현은 꺼진 화면에 비친 자기 얼굴을 보았다. 납치범들 사이에서 진료비와 휴식 시간을 요구하고 있었다. 바깥에서는 자신을 찾는 다른 누군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퇴근길은 아직 멀었다.

그래도 이번에는 택시비부터 받아 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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