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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 전담 힐러가 되었다2화

악당 전담 힐러가 되었다

악당 전담 힐러가 되었다

2화: 죽지 않는 치료

"치료를 시작했습니다."

강이현은 그렇게 말하고 자기 손끝을 노려보았다.

회색빛은 아직 남아 있었다. 평소의 힐처럼 따뜻하지 않았다. 상처를 덮어 살을 붙이는 빛도 아니었다. 차무진의 손목 안쪽으로 스며든 그것은 붉고 검은 마력 사이에 얇은 틈을 만들고 있었다.

이현은 그 틈을 놓치지 않으려고 숨을 죽였다.

놓치면 죽는다.

차무진이 먼저 죽고 그다음은 자신일 것이다. 아니 차무진이 완전히 죽기도 전에 이 지하실 전체가 터져 나갈지도 몰랐다.

"계속해."

차무진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명령인지 애원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사슬에 묶인 손가락이 강철 침상을 움켜쥐었다. 손톱 아래에서 불씨가 튀었다.

이현은 차무진의 손목을 더 단단히 잡았다.

"움직이지 마십시오."

"명령하나?"

"환자에게 부탁하는 겁니다."

주변에서 누군가 숨을 삼켰다. 이현은 그 소리까지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차무진의 팔 안쪽에서 수십 갈래의 길이 뒤틀리고 있었다.

마력 회로.

책에서만 본 단어였다. F급 힐러에게 회로 진단은 허락되지 않는 영역이었다. 관리청 교육장에서는 그저 상급 치료자들이 보는 복잡한 구조라고 배웠다. 하청 현장의 이현은 삔 발목과 찢어진 피부를 붙이는 사람으로 충분했다.

그런데 지금은 알 수 있었다.

왼쪽 팔목 아래의 회로는 이미 타 버렸다. 어깨를 타고 심장 쪽으로 가는 길은 억지로 넓혀진 흔적이 있었다. 등뼈 부근에는 검은 매듭 같은 것이 박혀 있었다. 그 매듭이 붉은 마력을 계속 되돌려 보내고 있었다.

"왜 이렇게 만들었습니까."

말이 새어 나왔다.

차무진의 눈이 가늘어졌다.

"뭘 봤지?"

"말하면 환자가 더 움직일 것 같아서 안 하겠습니다."

사실은 설명할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주변 빌런들의 얼굴은 다르게 굳었다. 이현이 무언가 알아내고도 일부러 숨기는 사람처럼 보인 모양이었다.

감시실 스피커에서 늙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손목에서 어깨로 올라가는 열량이 떨어졌다. 억제진 출력을 유지해라."

"아니요."

이현이 말했다.

감시실이 조용해졌다.

"억제진을 조금 낮추십시오."

"미쳤나? 낮추면 회장님이 폭주한다."

"눌러서 막으면 안쪽에서 터집니다. 나갈 길을 만들어야 합니다."

이현은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반쯤만 이해했다. 그래도 손끝은 알고 있었다. 차무진의 마력은 폭주하는 물이 아니라 막힌 화로였다. 뚜껑을 누를수록 불꽃은 아래에서 더 뜨거워졌다.

"낮춰."

차무진이 말했다.

감시실 안쪽에서 누군가 욕설을 삼켰다. 곧 바닥의 마력 억제진 붉은 선이 한 겹 흐려졌다.

그 순간 차무진의 몸이 휘었다.

"크윽!"

불꽃이 침상 옆으로 터졌다. 이현의 뺨이 화끈했다. 뒤쪽의 빌런들이 무기를 들었다. 총구와 칼끝이 동시에 이현을 향했다.

이현은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방해하지 마십시오."

목소리가 생각보다 차분하게 나왔다.

"지금 한 번만 끊기면 저는 못 살립니다."

그 말은 살려 달라는 뜻이었다. 그런데 빌런들에게는 차무진의 목숨을 담보로 한 선언처럼 들린 듯했다. 무기를 든 손들이 천천히 내려갔다.

이현은 차무진의 손목을 타고 올라오는 열을 받아 냈다.

뜨거웠다.

피부가 타는 통증이 아니라 뼈 안쪽에 달군 철심을 밀어 넣는 느낌이었다. 이현의 손끝에서 회색빛이 더 짙어졌다. 그 빛은 불길을 꺼뜨리지 않았다. 대신 서로 물어뜯던 붉은 마력과 검은 마력 사이를 갈라 놓았다.

마치 엉킨 실을 손톱 끝으로 하나씩 풀어내는 기분이었다.

첫 번째 매듭이 풀렸다.

차무진의 등에서 불꽃이 낮아졌다. 침상 밑 억제진이 덜컥 떨렸다.

두 번째 매듭을 건드리는 순간 이현의 머릿속으로 낯선 장면이 밀려왔다.

검은 훈련장.

타는 냄새.

누군가 어린 차무진의 등을 짓누르고 있었다. 더 태워라. 네가 멈추면 네 주변부터 죽는다. 목소리는 낮고 무정했다.

이현은 이를 악물었다.

기억이 아니다. 적어도 그의 기억은 아니었다.

"눈 풀지 마."

차무진이 말했다.

이현은 그제야 자신이 휘청였다는 걸 알았다. 차무진의 손이 그의 손목을 붙잡고 있었다. 조금만 힘을 주면 부러질 수 있는 압력이었다.

"치료 중 환자가 의료진을 부러뜨리면 곤란합니다."

"네가 먼저 쓰러질 것 같았다."

"환자분 걱정이나 하십시오."

차무진이 아주 짧게 웃었다. 웃음 끝에 피가 섞였다.

이현은 두 번째 매듭을 억지로 당기지 않았다. 대신 옆으로 밀었다. 검은 마력은 뿌리 뽑히지 않았다. 하지만 붉은 불길이 심장 쪽으로 되돌아가는 길이 아주 조금 열렸다.

차무진이 숨을 들이마셨다.

그 소리가 지하실 전체를 바꾸었다.

처음으로 그의 숨에 비명이 섞이지 않았다. 이를 악무는 소리도 없었다. 침상 옆에 서 있던 여자가 한 걸음 다가왔다가 멈췄다. 감시실의 노의사는 스피커를 켠 채 말이 없었다.

"통증은요."

이현이 물었다.

차무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떴다.

"없다."

그 한마디에 지하실이 얼어붙었다.

차무진은 자기 대답을 믿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손가락을 한 번 접었다 폈다. 불꽃이 튀지 않았다. 붉은 눈동자에 서려 있던 광기가 얇게 가라앉았다.

"몇 년 만이지."

아주 낮은 중얼거림이었다.

이현은 그 말을 듣고도 안도하지 못했다. 차무진의 등뼈 깊은 곳에 검은 결절이 남아 있었다. 그것은 단단했다. 지금의 회색빛으로는 표면만 식힐 수 있을 뿐이었다.

완치가 아니다.

그 사실을 말해야 했다.

문제는 말하는 방식이었다. 여기 있는 사람들은 치료가 끝났다는 착각으로 자신을 살려 둘 수도 있었다. 반대로 실패가 남았다는 이유로 바로 죽일 수도 있었다.

이현은 침을 삼켰다.

살고 싶다면 이 치료가 계속 필요하다는 것을 알려야 했다. 동시에 차무진이 당장 폭주하지 않게 만들 수 있다는 믿음도 줘야 했다.

"끝났나?"

차무진이 물었다.

"아닙니다."

이현은 바로 대답했다.

주변의 기척이 다시 날카로워졌다.

"지금은 폭주를 눌러 둔 겁니다. 근본 원인은 남아 있습니다."

"얼마나 버티지?"

"모릅니다."

이현은 짧게 멈췄다.

모른다고 말하면 죽는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어설프게 아는 척했다가 차무진이 다시 폭주하면 그것도 죽음이었다.

"대신 다음 발작이 오기 전에 몇 가지 조건을 지키면 시간을 벌 수 있습니다."

차무진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조건?"

"첫째. 억제진을 이전 출력으로 되돌리지 마십시오. 둘째. 강제 마력 주입이나 강화제를 중단하십시오. 셋째. 제가 다시 진찰하기 전까지 전투는 금지입니다."

말하고 나서 이현은 속으로 욕했다.

전투 금지라니. S급 빌런에게 너무 많은 말을 했다.

하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차무진이 다시 싸우면 회로는 또 비틀릴 것이다. 그때 자신이 옆에 없다면 이 지하실에 남은 사람 중 누구도 살 수 없을 것이다.

차무진은 화내지 않았다. 오히려 흥미롭다는 얼굴로 이현을 보았다.

"내게 명령하는 힐러는 처음이군."

"의학적 권고입니다."

"안 따르면?"

이현은 차무진의 손목을 놓았다. 손끝이 떨렸다. 들키지 않게 가운 주머니 쪽으로 손을 내렸다.

"다음 치료 성공률이 떨어집니다."

차무진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그게 협박인가?"

"예방 설명입니다."

정적.

누군가 웃음을 터뜨릴 뻔하다가 참았다. 웃음인지 공포인지 모를 소리였다.

차무진은 이현을 오래 보았다. 붉은 눈동자가 그의 얼굴과 손끝과 낡은 가방을 차례로 훑었다.

"네 이름이 강이현이라고 했지."

"그렇습니다."

"살려 둬."

주변 빌런들이 동시에 고개를 숙였다.

이현은 그제야 다리에 힘이 빠질 뻔했다. 하지만 버텼다. 여기서 주저앉으면 안 된다. 살아남은 사람처럼 보여야 했다.

"그리고."

차무진이 다시 말했다.

"이 사람 손대는 놈은 내가 태운다."

이현은 감사하다고 해야 할지 살려 달라고 해야 할지 판단하지 못했다.

그때 침상 옆의 여자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회장님. 그럼 이 힐러는 어디에 둡니까?"

차무진은 눈을 감았다. 고통 없는 숨을 한 번 더 들이마셨다.

"도망 못 가게 해."

역시.

이현은 속으로 눈을 감았다.

"다만 다치게 하지 마라."

차무진이 천천히 눈을 떴다.

"선생님이 다시 손을 써야 하니까."

선생님.

지하실에 있던 모든 사람이 그 호칭을 들었다.

누군가 급히 무전기를 꺼내 들었다. 방금 전까지 이현을 감시하던 눈들이 한꺼번에 낮아졌다. 총구는 바닥을 향했고 칼날은 소매 안으로 사라졌다.

이현은 그 변화가 더 무서웠다.

협박은 차라리 이해할 수 있었다. 대우가 바뀌는 순간부터는 어느 선까지 거절해도 되는지 계산해야 했다. 계산을 틀리면 존중이라는 이름의 감금이 시작될 것이다.

이현은 자신이 방금 무슨 직함을 받은 건지 알고 싶지 않았다. 납치 피해자에서 귀빈 인질로 승진한 것이라면 세상에서 가장 불쾌한 승진이었다.

하지만 차무진의 등뼈 안쪽 검은 결절이 아직 꺼지지 않았다는 사실은 또렷했다.

그것이 다시 움직이면 이곳은 터진다.

그리고 그때도 사람들은 자신을 부를 것이다.

이현은 마른 입술을 적셨다.

"그 전에 물과 소독약부터 주십시오."

빌런들이 얼어붙었다.

이현은 뒤늦게 덧붙였다.

"그리고 가능하면 의자도요. 저도 다리가 있습니다."

차무진이 웃었다.

이번에는 불꽃이 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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