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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 전담 힐러가 되었다1화

악당 전담 힐러가 되었다

악당 전담 힐러가 되었다

시놉시스

F급 치유 이능력자 강이현은 협회 하청 현장을 전전하며 하루를 버틴다. 박봉과 멸시에 익숙해진 퇴근길, 그는 국내 최악의 빌런 길드 블랙 아카샤에게 납치된다. 죽어가는 수장 차무진 앞에 세워진 이현은 실패하면 죽는 치료를 강요받는다.

1화: 퇴근길 납치

강이현은 피 묻은 장갑을 벗으며 오늘도 퇴사를 생각했다.

하지만 생각만 했다. 통장 잔액은 늘 현실적이었고 월세 고지서는 사람의 꿈을 존중해 주지 않았다.

"힐러님. 여기 한 명 더요."

던전 입구 임시 천막 안쪽에서 누군가 손을 흔들었다. E급 게이트의 부산물 처리 현장이었다. 이미 몬스터는 정리됐고 남은 건 긁힌 팔과 삔 발목과 괜히 큰소리치는 하급 헌터들이었다.

이현은 휴대용 소독제를 뿌린 뒤 환자의 손목을 잡았다.

"움직이지 마세요. 뼈에는 이상 없습니다."

"F급인데 그런 것도 보여요?"

"보이는 건 아니고 만져 보면 압니다."

"아. 감으로 한다?"

웃음이 천막 안을 훑었다. 이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손끝에 얇은 빛을 모아 부은 손목을 감쌌다. 미세한 열감이 피부 아래로 스며들자 헌터의 찡그린 얼굴이 조금 풀렸다.

"오. 그래도 쓸 만하네."

그래도.

이현은 그 단어를 삼켰다. F급 힐러에게 붙는 칭찬은 늘 그런 모양이었다. 그래도 싸다. 그래도 부를 만하다. 그래도 안 부르는 것보단 낫다.

그는 환자 명단에 서명하고 다음 사람을 불렀다.

왼쪽 팔꿈치 찰과상. 오른쪽 발목 염좌. 마력 과사용으로 인한 두통. 전부 목숨과는 거리가 멀었고 협회가 돈을 적게 주기에 좋은 부상이었다.

마지막 환자는 중독 반응을 보였다. 몬스터의 체액이 손등 상처로 스며든 탓이었다. 이현은 마력을 얇게 펴 독기가 번지는 방향을 막았다. 해독 마법은 아니었다. 다만 몸이 독을 밀어낼 시간을 벌어 주는 응급 처치였다.

"이 정도면 병원 가시면 됩니다."

"그냥 다 고쳐 주면 안 돼요?"

"저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진심이었다. 한 번에 다 고칠 수 있었다면 이현의 등급은 F가 아니었을 것이다.

정산 창구에서는 예상한 일이 예상보다 나쁘게 일어났다.

"오늘 현장 보조 수당에서 협회 관리비랑 게이트 안전 기금 빠지고요. 치료 행위는 F급 단가라 이 금액입니다."

직원이 내민 태블릿 화면에는 숫자가 떠 있었다. 이현은 그걸 보자마자 눈을 감았다. 택시를 타면 오늘 일당의 사분의 일이 날아갔다.

"현장 잔류 시간이 여섯 시간입니다."

"치료 난이도가 낮잖아요. 상급 외상도 아니고요."

"중독 환자 한 명 있었습니다."

"해독 판정은 C급 이상 성마법부터 치료 항목으로 잡혀요. 힐러님 건 응급 처치 보조입니다."

이현은 화면 아래의 확인 버튼을 눌렀다.

따지면 다음 배정이 늦어진다. 다음 배정이 늦어지면 월세가 늦어진다. 월세가 늦어지면 집주인이 전화를 한다. 그 전화는 몬스터보다 지독했다.

출장소를 나왔을 때 밤공기가 폐로 차갑게 들어왔다. 이현은 가방 끈을 고쳐 멨다. 그 안에는 갈아입을 셔츠와 반쯤 남은 에너지바와 한 달째 못 바꾼 낡은 휴대용 마력 측정기가 들어 있었다.

"삼 년만 버티자."

그는 습관처럼 중얼거렸다.

삼 년 동안 돈을 모은다. 협회 하청을 끊고 작은 진료소라도 연다. 가능하다면 더 멀리 간다. 게이트도 헌터도 없는 조용한 바닷가 마을이면 좋겠다.

물론 계산은 매번 틀렸다.

이현이 골목으로 접어든 건 버스 정류장까지 가는 지름길 때문이었다. 늦은 시간이라 가게 셔터가 모두 내려가 있었다. 간판 불빛은 절반쯤 꺼졌고 빗물이 고인 아스팔트 위로 붉은 네온이 흔들렸다.

세 번째 모퉁이를 돌기 전, 이현은 걸음을 늦췄다.

발소리가 하나 더 있었다.

같은 간격. 같은 속도. 그가 멈추자 뒤쪽의 소리도 멎었다.

이현은 휴대폰을 꺼내는 척하며 유리창에 비친 골목 뒤를 훑었다. 검은 후드 둘. 길 건너편 전봇대 아래에 하나. 앞쪽 폐업한 분식집 그늘에 하나.

도망칠 길은 없었다.

그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겁먹은 티를 내면 상대가 빨라진다. 하급 현장에서 다친 헌터들 사이를 오가며 배운 유일한 생존법이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앞쪽 그늘에서 남자가 걸어 나왔다. 목에 검은 문신이 있었다. 불에 탄 나뭇가지처럼 갈라진 문양.

이현은 그 문양을 알았다.

블랙 아카샤.

대한이능력관리청 공개 수배 명단 첫 장을 장식하는 빌런 길드. 게이트 부산물 밀매와 불법 각성자 거래와 협회 습격 사건마다 이름이 나오는 조직.

"강이현. F급 치유계. 맞지?"

"동명이인일 가능성은 없습니까?"

남자가 웃었다.

"말투가 맞네."

뒤에서 팔이 잡혔다. 이현은 반사적으로 손끝에 힐을 모았다. 그러나 옆구리에 닿은 차가운 금속 감각이 움직임을 멈추게 했다.

"소리 지르면 주변 건물 하나 날아간다."

"민간인 피해는 곤란하죠."

"네가 걱정할 일은 네 목숨이야."

이현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목구멍이 말랐지만 얼굴은 최대한 비워 두었다.

"납치 사유는 뭡니까?"

"치료."

"불법 시술은 안 합니다."

"아직 상황 파악이 안 됐나 본데."

남자의 손가락이 이현의 옆구리를 눌렀다. 금속 끝이 살을 살짝 찔렀다.

"우리가 부탁하는 걸로 보여?"

검은 밴의 문이 열렸다. 이현은 마지막으로 골목 위쪽 CCTV를 보았다. 렌즈는 반쯤 깨져 있었다. 누군가 미리 손을 써 둔 것이다.

밴 안은 냄새부터 달랐다. 피와 소독약과 탄내가 섞여 있었다. 이현은 손목에 차가운 구속구가 채워지는 감각을 느끼며 생각했다.

협회는 나를 찾을까.

답은 빨랐다.

내일 오전 배정 현장에 안 나오면 전화를 한 번 하겠지. 통화가 안 되면 무단결근 처리할 것이다.

괜히 웃음이 나올 뻔했다.

밴은 오래 달리지 않았다. 지하 주차장 같은 곳에 도착한 뒤 이현은 눈가리개를 쓴 채 끌려 내려갔다. 엘리베이터가 두 번 움직였고 금속 문이 세 번 열렸다. 공기는 점점 더 건조해졌다.

눈가리개가 풀렸을 때 그는 넓은 지하 공간 한가운데 서 있었다.

천장에는 붉은 비상등이 돌고 있었다. 벽면에는 방탄 유리로 막힌 감시실이 있었고 바닥에는 타다 만 흔적이 길게 뻗어 있었다. 곳곳에 무장을 한 사람들이 서 있었다.

그들 중 절반은 환자처럼 보였다.

누군가는 팔을 붕대로 칭칭 감고 있었다. 누군가는 한쪽 눈이 붉게 빛났다. 누군가는 자기 목을 손톱으로 긁고 있었다. 마력 폭주의 전조였다.

"걷어."

등을 밀렸다. 이현은 비틀거리며 중앙 진료대 쪽으로 다가갔다. 진료대라고 부르기엔 너무 거칠었다. 강철 침상 위에 사슬이 걸려 있었고 바닥에는 마력 억제진이 새겨져 있었다.

그 위에 남자가 묶여 있었다.

붉은 머리. 흉터가 가로지른 얼굴.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가 공기를 흔들었다.

이현은 그를 알아보았다.

차무진. S급 빌런. 이명은 광염.

뉴스 화면에서 본 그는 늘 웃고 있었다. 도시 외곽을 불바다로 만들고도 카메라를 향해 손을 흔들던 미친 사내.

지금 차무진은 웃지 않았다. 이를 악문 채 숨을 토하고 있었다. 피부 아래에서 붉은 빛줄기가 벌레처럼 꿈틀거렸다.

"상태가 왜 이럽니까?"

이현의 입에서 질문이 먼저 나왔다. 직업병이었다.

옆에 있던 여자가 눈을 가늘게 떴다.

"네가 묻는 입장이야?"

"모르면 못 고칩니다."

정적이 내려앉았다.

이현은 그 정적 속에서 심장이 미친 듯 뛰는 걸 느꼈다. 그러나 표정은 움직이지 않았다. 다행히 여기 있는 사람들은 그가 겁에 질려 굳은 것과 침착한 것을 구분하지 못하는 듯했다.

"마력 척수증 말기다."

여자가 말했다.

"일반 힐러 스물셋. 성마법사 넷. 회로 교정사 둘. 전부 실패했어."

"그분들은요?"

여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게 대답이었다.

이현은 입안을 깨물었다. 피 맛이 났다.

"F급 힐러를 데려온 이유가 있습니까?"

"마력 파장이 달라."

감시실 쪽에서 늙은 남자의 목소리가 스피커를 타고 흘러나왔다.

"네 치료 기록을 봤다. 중독이나 저주성 외상에서 이상하게 환자 안정률이 높더군. 협회는 네 등급이 낮아서 지나쳤지만 우리는 돈을 냈고 자료를 샀다."

팔자에도 없는 고평가였다. 문제는 그 고평가가 사망 통지서처럼 들린다는 점이었다.

차무진의 몸이 갑자기 휘었다.

콰앙!

사슬 하나가 끊어지고 불꽃이 천장으로 치솟았다. 주변 빌런들이 동시에 물러났다. 누군가 비명을 삼켰다.

이현의 볼을 뜨거운 바람이 스쳤다. 머리카락 끝이 살짝 말렸다.

차무진이 눈을 떴다.

붉은 눈동자가 이현에게 꽂혔다.

"네가 힐러냐."

목소리는 쇳가루를 씹는 것 같았다.

이현은 도망치고 싶었다. 무릎이 풀릴 것 같았다. 그러나 뒤로 한 걸음 물러나면 저 사내가 그걸 약점으로 볼 것이다.

그래서 그는 가방을 내려놓았다.

"강이현입니다."

"치료해."

"상태 확인부터 하겠습니다."

"실패하면 네 머리를 태운다."

"치료 중 환자가 협박하면 성공률이 떨어집니다."

주변이 얼어붙었다.

말하고 나서 이현은 자기 혀를 뽑고 싶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차무진의 눈이 좁아졌다. 불길이 한 번 더 치솟았다.

그런데 그는 웃었다.

"웃기는 놈이군."

"움직이지 마십시오. 움직이면 진짜 못 고칩니다."

이현은 침상 옆으로 다가갔다. 손을 뻗는 순간 본능이 경고했다. 저건 상처가 아니다. 화상도 아니다. 마력 회로가 안쪽에서 찢어지고 꼬이고 다시 타오르는 중이었다.

F급 힐로 될 리가 없었다.

하지만 안 하면 죽는다.

이현은 차무진의 손목을 잡았다.

그 순간 손끝으로 낯선 감각이 밀려왔다. 사람의 혈관이 아니라 복잡하게 꼬인 실타래를 만지는 느낌이었다. 붉고 검은 마력이 차무진의 팔 안에서 서로를 물어뜯고 있었다.

이현은 숨을 멈췄다.

보인다.

아니 보이는 건 아니다. 그러나 어디가 꼬였고 어디가 썩었고 어디가 터지기 직전인지 알 수 있었다.

"뭐 하는 거냐."

차무진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이현은 대답하지 못했다. 손끝에서 평소의 흰빛과 다른 회색빛이 피어났다. 미약하지만 분명했다. 그 빛이 차무진의 손목 아래로 스며들자 날뛰던 불꽃이 아주 잠깐 숨을 죽였다.

지하실 안의 모두가 그 변화를 보았다.

차무진의 눈에서 광기가 한 겹 걷혔다.

"너."

그가 이현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방금 뭘 했지?"

이현은 마른침을 삼켰다.

사실대로 말하면 안 된다. 모른다고 말해도 안 된다. 여기서는 모르는 사람이 제일 먼저 죽는다.

그는 최대한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치료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속으로만 외쳤다.

제발. 뭐든 좋으니까 한 번만 더 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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