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세 베테랑, 고교 야구부터 다시 시작합니다

4화: 낮아진 공의 이유
아침 불펜에는 물 뿌린 흙 냄새가 남아 있었다.
백승진이 홈플레이트 뒤에 쪼그려 앉자 최현우는 이미 공을 손바닥에서 굴리고 있었다. 왼팔을 크게 돌리는 동작은 평소보다 더 컸다.
괜찮다는 말을 몸으로 먼저 만들려는 사람의 움직임이었다.
불펜 펜스 밖에는 김태섭과 야수 몇 명이 서 있었다. 훈련을 시작할 시간도 아닌데 선수들이 하나둘 모인 이유는 같았다. 감독과 맞선 2학년 포수가 정말 에이스를 살릴 수 있는지 보고 싶었던 것이다.
강두식 감독은 펜스 옆에 팔짱을 낀 채 서 있었다.
“스무 개다. 그 안에 선발인지 아닌지 보여 줘.”
현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보여 드리겠습니다.”
승진은 미트를 들지 않았다.
“던지기 전에 손부터 펴 봐.”
현우가 눈을 가늘게 떴다.
“왜?”
“펴 봐요.”
현우가 못마땅한 얼굴로 왼손을 폈다. 손가락은 끝까지 펴졌지만 팔꿈치를 완전히 편 순간 눈썹이 아주 조금 찌푸려졌다.
승진은 그 앞에 공 하나를 굴렸다.
“그 공 주우면서 왼발로만 일어나 봐.”
“별걸 다 시키네.”
“그러니까 해 봐요.”
현우가 허리를 숙였다. 공을 집은 뒤 왼발에 힘을 주자 상체가 먼저 앞으로 쏠렸다. 오른발은 한 박자 늦게 따라왔다.
승진은 더 묻지 않고 현우의 발자국을 가리켰다.
“팔꿈치 안쪽이 아파요?”
“어제보단 나아.”
“질문은 그게 아닌데.”
현우의 입술이 다물렸다. 펜스 밖 선수들이 숨을 죽였다.
“공 놓기 직전에 당겨.”
강두식의 시선이 날카로워졌다.
승진은 현우의 왼발 앞에 발끝으로 선을 그었다.
“왼발이 닿자마자 가슴이 먼저 열려요. 그러면 팔이 몸보다 앞서 나가야 해요. 팔꿈치가 대신 버티는 거고.”
“그걸 스무 공으로 고친다고?”
강두식이 물었다.
“고치는 게 아닙니다. 오늘은 망가지는 공을 안 던지는 날입니다.”
감독의 미간이 구겨졌다.
“선발은 공을 던져야 감이 산다.”
“아픈 팔로 감을 찾으면 그 감이 몸에 남습니다. 이틀 뒤에도 던지게 하려면 오늘은 던질 공부터 골라야 합니다.”
승진은 현우에게 공을 건넸다.
“첫 다섯 개는 힘 빼고 던져요. 미트 보고 던지지 말고 왼쪽 무릎 위로 몸을 싣는 것만 생각해요.”
현우가 헛웃음을 쳤다.
“그럼 공이 안 가.”
“안 가면 제가 주우러 갈게요.”
현우는 고무판을 한 번 밟았다. 첫 공은 높았다. 포수 머리 위로 뜬 공이 뒤쪽 그물에 부딪혔다.
두 번째 공은 바깥으로 빠졌다. 세 번째 공은 홈플레이트 앞에서 힘없이 떠올랐다.
현우의 턱이 굳었다. 공이 뜻대로 안 들어가면 그는 늘 손가락보다 어깨에 먼저 힘을 줬다. 승진은 열일곱 살의 현우가 그 습관으로 무너지는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
강두식이 혀를 찼다.
“그만해. 이러다 감만 다 죽인다.”
현우가 미트를 향해 한 발 나왔다.
“아닙니다. 한 번만 더 세게 던져 보겠습니다.”
“그 말이 제일 위험해요.”
승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현우 앞에 섰다.
“선배 공은 팔이 빠르다고 끝이 사는 게 아니에요. 몸이 먼저 가고 팔이 늦게 따라올 때 타자가 늦어요. 어제 팔부터 던졌던 공은 전부 높았죠.”
현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왼발을 지금보다 반 발만 짧게 디뎌요. 착지하고 가슴은 여기까지.”
승진이 자신의 오른쪽 어깨를 손바닥으로 눌렀다.
“미트가 보일 때까지 참아요. 그다음에 공을 놓는 겁니다.”
“그렇게 참으면 늦어져.”
“늦어지는 게 아니라 원래 선배 공이 나와요.”
현우가 승진을 바라봤다. 마운드에서 내려온 뒤에도 손끝은 공을 꽉 쥐고 있었다.
승진은 그 공을 빼앗지 않았다. 대신 손가락 하나를 펴 보였다.
“네 번째 공. 구속은 보지 마요.”
현우가 다시 고무판을 밟았다.
왼발이 조금 짧게 떨어졌다. 가슴이 너무 빨리 열리지 않았다. 공은 낮았다. 바깥쪽으로 빠졌지만 포수 무릎 높이를 넘지 않았다.
“그거예요.”
다섯 번째 공이 미트 끝을 스쳤다.
팡.
현우의 눈이 조금 커졌다.
“지금은 안 당겼어.”
승진은 바로 미트를 내렸다.
“좋은 공 한 개 던졌다고 더 던지지 마요. 숨부터 고르고.”
김태섭이 불펜 뒤에서 웃었다.
“저 녀석 원래 저렇게 잔소리 많았냐?”
“오늘만 많습니다.”
승진은 대답했지만 속으로 숫자를 셌다. 다섯 개. 남은 공은 열다섯 개였다.
현우는 물을 한 모금 마신 뒤 다시 섰다. 이번에는 미트를 오래 보지 않았다. 왼발이 흙을 찍고 골반이 먼저 앞으로 밀렸다. 팔은 뒤늦게 따라왔다.
낮은 직구가 미트에 꽂혔다.
팡.
또 하나.
팡.
강두식의 팔짱이 천천히 풀렸다.
“구속은?”
펜스 옆에 있던 매니저가 손에 든 속도 측정기를 내려다봤다. 입술을 달싹이던 녀석이 승진의 눈을 보고는 대답을 삼켰다.
“지금 재지 마세요.”
승진은 고개를 저었다.
“공이 낮게 가는지부터 봐야 합니다.”
“낮기만 하면 이기냐?”
“현우 공은 낮게 들어올 때 배트가 늦습니다. 그 장점을 살려야 합니다.”
강두식은 반박하지 못했다. 전날 마지막 이닝에서 낮은 공이 만든 결과가 아직 눈앞에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현우가 여덟 번째 공을 던진 뒤 왼손을 움켜쥐었다. 승진은 바로 손바닥을 들었다.
“어디가 불편해요?”
“안 불편해. 그냥 습관이야.”
“그 습관이 아픈 걸 숨기는 습관이면 고쳐야죠.”
현우는 승진을 노려봤다. 그러다 시선을 내렸다.
“팔꿈치는 괜찮아. 어깨 뒤가 좀 뻐근해.”
승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팔꿈치보다 그 말이 낫다. 하체가 몸을 옮기고 팔이 뒤따라온 흔적이었다.
“그건 오늘 안 쓰던 데가 놀라서 그래요. 찌르는 통증이면 바로 끝내고요.”
“네가 내 코치냐?”
“포수니까요.”
이번에는 현우가 짧게 웃었다.
“포수가 원래 이런 것까지 해?”
“좋은 투수 공 받으려면 해야죠.”
그 말에 현우의 표정이 조금 달라졌다. 자신이 망가지지 않는 이유가 팀을 위한 희생이 아니라 좋은 투수가 될 수 있다는 판단에 있다는 걸 처음 들은 얼굴이었다.
열 번째 공이 미트 안쪽에 꽂혔다.
현우는 공을 받아 들고 한참 내려다봤다.
“아까보다 손이 늦게 나와.”
“그래야 해요.”
“그런데 공은 안 늦어.”
“선배 몸이 공을 보내니까요.”
현우는 더 묻지 않았다. 그 대신 고무판 위 발끝을 정리했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자기 발이 어느 자리에 있어야 하는지 찾는 움직임이었다.
열두 번째 공부터 승진은 미트 위치를 바꾸지 않았다. 바깥쪽 낮은 곳.
현우는 그곳에 세 공을 연달아 넣었다.
팡. 팡. 팡.
공을 받을 때마다 승진의 손목이 덜 흔들렸다. 첫 세 공처럼 위로 뜨지 않았다. 공 끝도 죽지 않았다.
강두식이 가까이 다가왔다.
“그 공으로 4강을 이길 수 있겠어?”
승진은 현우에게 들리지 않게 말했다.
“오늘 이기는 건 아닙니다. 이 공으로 이틀 뒤에 던질 수 있게 만드는 겁니다.”
“그 이틀 뒤에 못 이기면?”
“그럼 제가 포수로 더 뛰겠습니다.”
강두식의 눈이 가늘어졌다. 허풍이라면 바로 끊어냈을 말이었다. 하지만 승진은 농담처럼 말하지 않았다.
감독은 한 발 물러났다.
남은 다섯 공을 앞두고 현우가 김태섭을 봤다.
“선배. 타석에 한 번 서 봐요.”
김태섭이 코웃음을 쳤다.
“스무 공 던진 놈 공을 내가 왜 맞아.”
“맞지 말고 봐만 주세요.”
승진이 먼저 말했다.
“배트는 들되 스윙은 하지 마세요. 공이 언제 보이는지만 말해 주세요.”
김태섭은 잠시 망설이다 배트를 어깨에 얹고 타석에 섰다.
현우의 열여섯 번째 공이 날아왔다.
낮은 직구.
김태섭의 앞발이 반 박자 늦게 움직였다.
“어?”
“느렸어요?”
“아니. 손에서 나온 건 봤는데 밑으로 꺼지는 게 늦게 보였어.”
현우가 숨을 들이켰다. 매니저가 속도 측정기를 다시 봤다. 처음 세 공보다 숫자가 떨어지지 않았다는 표정이었다.
승진은 미트를 같은 높이에 댔다. 이번에는 손가락으로 느린 공 사인을 냈다.
현우의 눈이 흔들렸다.
“지금 그걸?”
“어제처럼 힘으로 던지지 말고요. 같은 데서 놓기만 해요.”
공은 같은 길로 출발했다. 홈플레이트 앞에서 더 아래로 떨어졌다.
김태섭의 무릎이 반사적으로 굽었다.
“그거 던질 수 있었어?”
“나도 지금 처음 알았네요.”
현우의 목소리가 낮았다.
“그게 선배 공이에요.”
승진은 미트를 다시 낮게 들었다.
마지막 세 공은 더 던지기 위한 공이 아니었다. 승진은 현우에게 낮은 직구 하나, 느린 공 하나, 다시 낮은 직구 하나만 요구했다.
둘째 공이 조금 높게 떴다. 현우가 찡그리며 다시 공을 받으려 했다.
“아직 하나 남았잖아.”
“그 하나만 던져요.”
승진은 같은 자리에서 미트를 움직이지 않았다.
현우가 길게 숨을 뱉었다. 왼발이 흙을 누르고 몸이 먼저 나갔다. 팔이 따라온 순간 공이 낮게 미트를 갈랐다.
팡.
스무 번째 공을 받은 승진은 한동안 미트를 닫지 못했다.
현우가 마운드에서 물었다.
“더 던져도 돼?”
“안 돼요.”
“지금 괜찮은데.”
“괜찮을 때 멈추는 게 오늘 할 일입니다.”
현우의 얼굴에 아쉬움이 떠올랐다. 그러나 그는 공을 주머니에 넣었다.
그 선택이 승진에게는 마지막 공보다 더 반가웠다.
강두식이 다가와 현우의 왼팔을 살폈다.
“열감은?”
“어제보다 덜합니다.”
“통증은?”
현우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승진을 한번 본 뒤 고개를 저었다.
“없습니다. 대신 내일도 이렇게 던지고 싶습니다.”
강두식의 얼굴에 잠깐 망설임이 지나갔다. 백 개를 던져야 마음이 놓이는 감독이었다. 그러나 눈앞에서 현우가 고개를 젖히지 않고 낮은 공을 넣는 모습도 봤다.
“내일까지도 스무 개다.”
감독이 승진을 가리켰다.
“네가 받아. 밥 잘 먹이고 팔에 얼음 대는 것도 네가 챙겨. 조금이라도 찌르는 통증이 나오면 내게 바로 말하고.”
“알겠습니다.”
“그 대신 4강 당일 아침까지 공이 죽어 있으면 선발을 바꾼다. 그때는 네 말도 끝이야.”
승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맞습니다.”
현우가 입술을 깨물었지만 반박하지 않았다. 선발 자리보다 먼저 지켜야 할 게 있다는 말을 이제는 조금 이해한 듯했다.
그때 매니저가 대진표를 들고 불펜으로 뛰어왔다.
“감독님. 4강 상대 정해졌습니다. 동해고예요.”
강두식의 표정이 굳었다.
“그 발 빠른 놈들?”
매니저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도 번트 세 개에 도루 다섯 개 했답니다. 1번이 나가면 계속 뜁니다.”
승진은 종이 맨 위의 이름을 봤다.
동해고 1번 타자, 서진호.
훗날 프로에서 투수들을 가장 지치게 만들던 주자였다. 지금의 그는 아직 고등학생일 뿐이지만 발과 눈만큼은 이미 완성돼 있었다.
현우가 물었다.
“많이 세?”
승진은 미트를 옆구리에 끼웠다.
“공을 낮추는 법은 배웠어요.”
그는 불펜 흙 위에 남은 현우의 발자국을 봤다.
“이제 주자를 묶는 법을 배워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