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세 베테랑, 고교 야구부터 다시 시작합니다

3화: 마스크 뒤의 계산
김태섭의 손에서 공이 떠났다.
백승진은 미트를 끝까지 움직이지 않았다.
바깥쪽 낮은 곳을 향한 직구가 홈플레이트 앞에서 한 뼘 더 가라앉았다. 세명고 첫 타자는 초구부터 배트를 냈다.
딱!
방망이 끝에 걸린 타구가 2루수 정면으로 굴렀다.
"하나!"
청원고 2루수가 공을 잡아 1루로 던졌다. 심판의 오른팔이 올라갔다.
"아웃!"
김태섭이 마운드 위에서 길게 숨을 내쉬었다. 공 하나를 던졌을 뿐인데 어깨가 눈에 띄게 내려갔다.
승진은 마스크 너머로 손가락을 접었다. 다음 공을 요구하는 대신 미트 안쪽을 두 번 두드렸다.
김태섭이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선배. 공을 이기려고 하지 마세요."
마운드까지 들릴 만큼만 말했다.
"타자를 이기면 됩니다."
김태섭은 어이없다는 듯 입술을 벌렸다.
세명고 두 번째 타자가 타석으로 들어왔다. 왼손 타자였다. 헬멧을 만지는 횟수가 많고 발끝이 홈플레이트 쪽으로 향해 있었다. 강하게 당겨야 한다는 생각이 얼굴에 적혀 있었다.
승진은 바깥쪽 낮은 직구 사인을 냈다.
타자가 낮은 공을 기다리게 만들어야 했다.
김태섭의 직구가 바깥으로 빠졌다.
"볼!"
타자는 배트를 내지 않았다. 승진이 예상한 대로였다. 그는 같은 자리에 미트를 댔다. 이번에는 반 공만 안쪽이다.
김태섭의 어깨가 급하게 열렸다.
공은 높게 떴다.
타자가 기다렸다는 듯 밀어 쳤다.
딱!
타구가 3루수와 유격수 사이를 갈랐다. 좌익수 앞에 떨어진 공을 본 주자가 1루를 밟았다.
김태섭이 모자를 벗어 땀을 닦았다. 방금 공은 나쁜 선택이 아니었다. 나쁜 건 몸이 먼저 던졌다는 사실이었다.
승진은 마운드를 향해 손을 들었다.
"괜찮습니다. 하나만 더 잡으면 돼요."
김태섭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시선은 1루 주자에게 가 있었다.
세명고 벤치가 움직였다. 다음 타자는 헬멧 대신 번트 배트를 들고 나왔다. 1점 차 9회. 상대가 할 수 있는 선택은 뻔했다.
강두식 감독이 더그아웃 난간을 잡았다.
"번트 막아!"
승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번트 자체를 막는 것보다 중요한 건 어디에 번트를 대게 하느냐였다. 타자는 왼발을 조금 일찍 열었다. 3루 쪽으로 죽일 생각이다. 1루 주자는 이미 두 발을 가볍게 튕기고 있었다.
승진은 김태섭에게 손가락 하나를 보였다.
몸쪽 높은 직구.
번트를 대기 불편한 높이다. 그래도 작전을 포기하기에는 너무 좋은 상황이었다.
김태섭이 고개를 끄덕였다.
공이 날아오는 순간 타자가 배트를 댔다. 예상대로 배트의 윗부분에 맞은 공이 3루 쪽으로 짧게 떴다.
승진이 마스크를 벗어 던지고 앞으로 튀어나갔다.
공이 흙 위에 닿기 전에 왼손 미트로 눌렀다. 몸은 이미 1루가 아니라 2루를 향하고 있었다.
"둘!"
2루 주자가 급하게 귀루했다. 승진의 송구가 낮고 빠르게 2루수 앞에 꽂혔다.
태그.
"아웃!"
1루 쪽으로 달리던 타자는 멈춰 섰다. 희생번트는 됐지만 주자를 2루에 묶어뒀다.
강두식의 목소리가 날아왔다.
"왜 1루 안 던져!"
승진은 마스크를 다시 쓰며 홈플레이트 쪽으로 돌아왔다.
"3루 주면 외야 플라이 하나로 끝납니다."
감독의 입이 다물렸다.
맞는 말이었다. 아웃 하나와 2루 주자 하나. 아직 승부는 청원고 쪽에 있었다.
세명고는 대타를 냈다.
등번호가 큰 3학년이었다. 배트를 짧게 잡고 들어오면서도 눈은 길게 뻗어 있었다. 번트 다음에는 강공이다. 특히 초구를 노릴 가능성이 컸다.
승진은 타자의 손등을 봤다. 배트 손잡이를 쥔 왼손 엄지가 위로 들려 있었다. 바깥쪽 공을 밀 생각이 아니라 몸쪽 직구를 걷어 올릴 준비였다.
직구를 보여주면 안 된다.
그는 바깥쪽 낮은 곳에 미트를 댔다. 손가락은 체인지업성 느린 공을 요구하고 있었다.
김태섭이 고개를 저었다.
승진의 눈썹이 아주 조금 움직였다.
다시 같은 사인.
김태섭은 이번에도 고개를 저었다. 중요한 순간에 느린 공을 던졌다가 맞았던 기억이 있는 얼굴이었다. 손끝으로 던지는 공은 믿지 못하고 팔로 밀어붙이는 직구만 믿는 투수.
승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관중석이 술렁였다. 강두식도 난간에서 몸을 뗐다.
승진은 마운드에 올라가 김태섭의 글러브를 가볍게 눌렀다.
"선배. 지금 저 타자 직구만 봐요."
"알아. 그러니까 더 세게 던져야지."
"세게 던지면 배트가 늦어도 파울이 나옵니다. 느린 공이면 배트가 먼저 나가요."
"손에 안 걸리면 어떡해."
"걸리게 던지려 하지 말고 떨어뜨리세요. 미트 아래로만 보내면 됩니다."
김태섭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 숫자 앞에서는 누구나 팔에 힘이 들어간다. 승진은 그 힘 때문에 망가진 투수들을 수도 없이 봤다.
"맞으면 내가 받겠습니다."
김태섭이 헛웃음을 쳤다.
"포수가 그걸 받는 거지."
"그러니까요."
짧은 대답이었다.
김태섭의 눈빛이 조금 바뀌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마운드 고무판을 밟았다.
승진은 몸쪽 높은 곳에 미트를 올렸다.
직구.
김태섭의 공이 타자의 옆구리 쪽으로 파고들었다. 타자는 피하지 않았다. 기다렸다는 듯 배트를 돌렸다.
파울.
승진은 같은 코스를 한 번 더 요구했다.
이번 공은 더 안쪽으로 들어갔다. 타자는 두 발을 좁히며 다시 배트를 냈다.
또 파울.
이제 타자의 시선은 몸쪽에 붙었다. 앞발은 닫혔고 무게는 앞으로 쏠렸다.
승진은 미트를 바깥쪽 낮은 곳에 놓았다.
김태섭의 손이 공을 놓았다.
팔이 아니라 손가락이 먼저 빠져나왔다. 공은 직구보다 느리게 날아왔다. 타자는 몸쪽 공이라고 믿은 채 배트를 끌어냈다.
그러나 공은 홈플레이트 앞에서 아래로 꺼졌다.
휙.
배트가 허공을 갈랐다.
"스트라이크 아웃!"
승진은 미트를 한 번 세게 닫았다.
김태섭은 마운드에서 두 팔을 벌렸다. 세게 던진 공보다 느린 공 하나가 더 크게 자신을 살렸다는 표정이었다.
2사 2루.
마지막 타자가 타석에 들어왔다.
세명고의 4번 타자였다. 앞선 타석에서 승진의 홈런을 맞힌 투수와 눈을 마주치던 녀석이다. 배트를 길게 잡았다. 한 방으로 끝낼 생각을 숨기지 않았다.
승진은 그의 눈을 읽었다.
직구를 놓치지 않겠다는 눈이다. 바깥 낮은 공은 밀어서 안타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다. 겁을 낸 타자의 눈이 아니었다.
김태섭의 어깨가 다시 굳었다.
승진은 일부러 몸쪽 사인을 크게 보였다. 4번 타자가 그 손가락을 보지는 못했지만 미트 위치는 볼 수 있었다. 승진은 미트를 안쪽 높이 들었다가 천천히 내렸다.
타자의 앞발이 한 뼘 닫혔다.
좋아.
실제 사인은 바깥쪽 낮은 직구였다. 단 한 번. 김태섭이 고개를 끄덕였다.
공이 날아왔다.
타자는 몸쪽 공을 걷어 올리려다 마지막 순간 배트를 밀었다. 하지만 몸은 이미 앞으로 쏠린 뒤였다.
딱.
타구는 세지 않았다. 3루수 앞에서 두 번 튄 느린 땅볼이었다.
"끝까지!"
승진이 소리쳤다.
청원고 3루수가 공을 잡았다. 짧은 송구가 1루수 미트에 빨려 들어갔다.
"아웃! 게임 셋!"
마스크 안에서 숨이 멎는 줄 알았다.
그날의 마지막 장면은 원래 달랐다. 스코어보드 아래에서 고개를 숙인 채 세명고 선수들이 아니라 자기 더그아웃을 보던 기억. 누구도 위로하지 못하던 열일곱 살의 자신.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승진은 천천히 마스크를 벗었다. 흙냄새가 섞인 봄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김태섭이 제일 먼저 달려와 승진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야. 너 진짜 포수 맞냐?"
"오늘부터는 맞습니다."
선수들이 마운드로 몰려들었다. 누군가 승진의 헬멧을 두드리고 누군가는 김태섭의 등을 두들겼다.
난간 앞에 선 강두식은 박수를 치지 않았다. 대신 승진을 오래 봤다.
그 눈에는 기쁨보다 계산이 많았다. 감독에게 승리는 증거였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더그아웃으로 돌아오자 최현우가 조용히 글러브를 챙기고 있었다. 승진이 다가가자 현우는 얼른 왼팔을 뒤로 숨겼다.
"팔 펴봐."
"괜찮아."
"오늘 그 말 두 번 들었어."
현우가 입술을 다물었다.
승진은 억지로 팔을 잡지 않았다. 대신 아이스박스 뚜껑을 열었다. 차가운 물 위에 얼음이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팔꿈치 안쪽이 뜨겁지?"
현우의 눈이 흔들렸다.
"조금."
"펴려고 하면 당기고."
이번에는 대답이 없었다. 그 침묵이면 충분했다.
그때 강두식이 다가왔다.
"최현우. 내일 아침 불펜 백 개다. 이틀 뒤 4강 선발 준비해."
현우의 어깨가 움찔했다. 그는 반사적으로 대답하려 했다.
"네."
"안 됩니다."
승진이 끼어들었다.
더그아웃이 다시 조용해졌다. 방금까지 웃던 선수들도 손을 멈췄다.
강두식이 고개를 돌렸다.
"뭐가 안 돼."
"오늘은 공 하나도 더 던지면 안 됩니다. 내일도 백 개는 안 됩니다."
"전국대회 4강이 이틀 남았다. 선발이 공을 안 만지면 뭘로 던져?"
승진은 아이스박스에서 얼음주머니를 꺼냈다. 수건으로 감싼 뒤 현우에게 내밀었다.
"오늘 팔꿈치 안쪽이 뜨겁습니다. 통증 피하려고 릴리스도 빨라졌고요. 지금 백 개 던지면 몸이 기억하는 건 좋은 폼이 아니라 아픈 폼입니다."
"네가 의사냐?"
"포수입니다. 공이 어디서 빠지는지는 봅니다."
강두식의 턱이 굳었다.
승진은 멈추지 않았다.
"감독님. 현우가 오늘 더 던졌으면 9회를 지킬 수 있었을까요?"
"……"
"아니었을 겁니다. 다음 경기까지 쓰려면 오늘 멈추게 한 게 맞습니다. 내일은 하체랑 어깨만 풀고 공은 짧게 스무 개. 제가 받아서 릴리스만 보겠습니다."
"스무 개로 되겠어?"
"아픈 팔로 백 개 던지는 것보다 낫습니다."
강두식의 시선이 현우의 팔꿈치로 옮겨갔다.
현우는 얼음주머니를 쥔 채 가만히 있었다. 감독이 보는 앞에서 아프다는 말을 꺼내는 건 쉽지 않았을 것이다.
승진은 현우를 봤다.
"네가 말해. 지금 던질 수 있어?"
현우의 목울대가 움직였다.
한참 뒤 현우가 고개를 저었다.
"백 개는... 못 던질 것 같습니다."
강두식의 눈이 커졌다.
현우는 더 작아지지 않았다. 얼음주머니를 팔꿈치에 대고 다시 말했다.
"그래도 4강에는 던지고 싶습니다."
승진이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마음은 꺾을 이유가 없었다. 꺾어야 할 건 망가진 방식이었다.
강두식은 잠시 입술을 씹었다. 그러고는 승진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좋다. 내일 스무 개. 네가 받아."
승진은 대답하지 않고 기다렸다.
"대신 백승진. 이틀 뒤 현우 공이 죽어 있으면 네가 책임져."
"책임지겠습니다."
이번에는 가볍게 말하지 않았다.
승진은 현우 옆에 쪼그려 앉았다. 아직 어린 팔이었다. 제대로 쉬고 제대로 던지면 더 빠른 공을 던질 수 있는 팔.
"얼음은 열다섯 분. 그다음엔 쉬어. 밤에 몰래 팔굽혀펴기 하지 말고."
"그걸 어떻게 알았어?"
"야구부 투수들이 다 하는 짓이니까."
현우가 작게 웃었다.
승진은 그 웃음을 보며 아이스박스 뚜껑을 닫았다.
8강의 마지막 아웃은 끝났다.
이제부터는 한 경기의 승리가 아니라 한 투수의 미래를 지켜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