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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화: 두 개의 현재
결단을 내릴 틈조차 없었다.
시간의 나침반이 오작동하듯, 병실 창밖의 풍경이 미친 듯이 껌뻑이기 시작했다. 맑았던 대낮의 하늘이 찰나의 순간 먹구름이 소용돌이치는 폭우의 하늘로 바뀌었다가, 다시 눈부신 가을 하늘로 되돌아왔다.
위이이잉----!
귀를 찢는 사이렌 소리가 뇌리를 파고들었다.
“선배님! 보관실의 핏빛 주언들이… 완전히 흩어지고 있어요!”
도식이 비명을 질렀다. 노트북 화면의 데이터들이 온통 붉은색 낙인으로 가득 차다 못해 모니터에서 매캐한 연기와 함께 고서 타는 듯한 향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장부가 붕괴하면서 가두어두었던 인과율의 경계가 무너진 겁니다. 형님이 살아 있는 세계선과, 형님이 사고를 당했던 지금의 현실 세계선이 동시에 겹쳐지고 있어요!”
차이준이 창턱을 짚으며 소리쳤다.
“두 개의 현재가 충돌하고 있다. 어서 이곳을 벗어나야 해. 인과율의 중력에 휩쓸리면 존재 자체가 지워질 수 있어!”
쾅!
병실 문이 바람에 뜯겨 나가듯 열렸다. 윤재는 본능적으로 도현의 침대 앞에 몸을 날렸다.
하지만 그가 손을 뻗어 확인한 침대 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산소호흡기 배선만이 허공에 덜렁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형!”
윤재는 비명을 지르며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그 순간, 병실의 풍경이 하얗게 지워졌다.
눈을 떴을 때, 윤재는 대학 캠퍼스의 중앙 광장 한복판에 서 있었다. 따스한 가을 햇살이 내리쬐고 있었다.
병실의 찌든 소독약 냄새 대신 은은한 은행나무 냄새가 바람을 타고 풍겼다. 모든 것이 평화로웠다. 병실의 소동이 가짜였던 것처럼.
“윤재야? 왜 거기 멍하니 서 있어?”
익숙한 목소리에 윤재가 고개를 돌렸다.
서연이었다. 그녀는 전공 서적을 품에 안은 채 평소처럼 환하게 웃으며 그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옷차림이 낯설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의 눈빛에는 윤재를 향한 깊은 걱정이나 병실에서의 초췌함이 전혀 없었다.
“서연아… 도식이는? 형은 어떻게 됐어?”
윤재가 서연의 어깨를 잡으며 다급하게 묻자, 서연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그의 손을 살짝 밀쳐냈다.
“도식이? 아, 우리 과 아싸 신입생 민도식 말하는 거야? 걔가 왜 여기서 나와? 그리고 도현 오빠는 도서관에서 너 기다리고 있잖아. 얼른 가 봐.”
심장이 쿵 떨어졌다.
“도현 형이… 살아있다고?”
“살아있다니? 도현 오빠가 왜 죽어? 너 오늘 진짜 이상하다, 강윤재.”
서연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앙 도서관 쪽을 가리켰다.
윤재는 미친 듯이 도서관을 향해 달렸다. 도서관 계단을 밟고 1층 로비로 들어섰을 때, 저 멀리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
베이지색 가디건을 입고 책을 정리하고 있는 청년. 7년 동안 늙지 않고 잠들어 있던 그 모습 그대로, 하지만 휠체어나 산소호흡기 없이 제 발로 서서 밝게 웃고 있는 강도현이었다.
“형…!”
윤재가 도현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려던 찰나.
지이이잉-!
공간에 피어오르는 검은 안개와 기이한 일렁임이 끼어들었다.
맑았던 도서관 내부가 갑자기 어둡고 퀴퀴한 도서관 지하의 ‘정오 보관실’ 잔해로 뒤바뀌었다. 제 발로 서 있던 도현의 몸이 붉은 잉크가 흐르는 관 속에 갇힌 반투명한 유령의 모습으로 번쩍였다.
동시에 윤재의 바로 옆을 지나던 학생들이 환영으로 변해 스쳐 지나갔다.
‘어제’와 ‘오늘’이, ‘형이 죽은 현재’와 ‘형이 산 현재’가 하나의 공간에서 톱니바퀴처럼 어긋나며 충돌하고 있었다. 두 개의 거대한 세계선이 서로를 지우기 위해 거칠게 맞물려 돌아가는 지옥의 서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