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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화: 도식의 역할
윤재와 서연이 떨어진 곳은 기이한 주술적 울림이 가득한 거대한 지하 동굴이었다. 하지만 그곳은 돌로 이루어진 동굴이 아니었다. 수만 개의 낡은 책장과 붉은 주언의 낙인들, 그리고 그 사이를 흐르는 검은 피가 마치 거대한 생명체의 혈관처럼 얽혀 있는 ‘장부의 내부’였다.
“도식아…?”
윤재가 정신을 차렸을 때, 믿을 수 없는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웅덩이에 뛰어들지 않았던 도식이 이미 동굴 구석에 웅크린 채 덜덜 떨고 있었다. 인과율의 붕괴로 인해 현실에 있던 도식의 영혼이 먼저 이곳으로 강제 역류당한 것이 분명했다.
도식은 넋을 잃은 채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의 눈앞에는 허공에 떠 있는 수만 개의 투명한 명부들이 있었다. 그 명부 속에는 캠퍼스 학생들의 일상이 얽히고설킨 핏빛 주언과 실선으로 변환되어 흐르고 있었다.
“선배님, 저기 보세요! 저 제단의 붉은 빛 패턴… 형님의 외장하드에서 봤던 주언의 배열과 정확히 일치해요!”
도식이 가리킨 곳에는 거대한 제단 같은 벽면이 있었다. 거기에는 실시간으로 인과율의 대가가 새겨지고 있었다.
- 금기 침범: 허락되지 않은 공동 계약 감지됨 (Error: Unregistered Joint Pact detected.)
- 업보의 한계: 87% 소진 (Resource depletion: 87%)
- 다음 제물: 민도식 (Target for next sacrifice: MIN DO-SIK)
도식의 이름이 붉은 글씨로 깜박이는 것을 보자 윤재의 눈이 뒤집혔다.
“도식아, 너 당장 거기서 떨어져!”
“아니요, 선배님. 지금 도망치면 전 정말 지워져요.”
도식은 제단 밑의 주언 통제판 앞으로 달려가 품에서 형의 연구 노트를 꺼내 펼쳤다. 그는 조급하게 돌판 위에 손을 얹었다. 그의 온기를 감지하자 붉은 주언들이 화면처럼 반짝이며 그 흐름을 바꾸기 시작했다.
“이 장부, 단순한 마법이 아니에요. 마치 아주 정교하게 얽힌 소스 코드 같아요! 형님이 설계한 제어 코드가 이 시스템의 뼈대였던 거예요!”
도식의 눈이 미친 듯이 반짝였다. 평소 소심하던 신입생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그는 지금 자신이 가장 잘하는 분야, 즉 ‘금기 분석’의 영역에 들어와 있었다.
“서연 누나, 저기 있는 검은 결계석 보이죠? 저게 장부로 흘러 들어가는 ‘후회’의 유입로예요. 누나가 저걸 봉인해야 해요. 제가 금기의 결계를 흐트러뜨리는 동안요!”
서연은 망설임 없이 잉크가 흐르는 파이프 위로 뛰어올랐다.
“윤재야, 너는 저기 의식의 심장으로 가! 거기 형님이 있어!”
윤재는 도식과 서연을 믿고 동굴 깊숙한 곳으로 달렸다. 뒤에서 장부의 방어 수호령인 검은 괴물들이 쏟아져 나왔지만, 도식이 통제판의 정지 주언을 거칠게 문지르자 굉음과 함께 괴물들의 발밑에 거대한 거부의 낙인이 나타나며 그들을 묶어버렸다.
“인과 통제권 장악 중… 45%… 60%!”
도식의 이마에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그의 손등에 있던 검은 선들이 핏빛 주언으로 변하며 그의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그는 자신의 영혼을 의식과 결합시키고 있었다.
“윤재 선배! 지금이에요! 금기가 다시 시작되기까지 12초 남았어요!”
윤재는 거대한 실타래와 주사선들 사이에 놓인 붉은 관 앞에 도달했다. 그 안에는 수많은 인과의 실에 묶인 채 잠들어 있는 도현이 있었다.
관 옆의 비석에는 도현의 피로 쓰인 마지막 서약이 남겨져 있었다.
[윤재가 도달하면, 금기를 봉인하라.]
형은 믿고 있었다. 언젠가 윤재가 이곳까지 찾아올 것을.
윤재는 비석에 손을 얹었다. 손등의 주술적 흔적이 타들어 가며 반응했다.
“형, 이제 그만 쉬어.”
윤재가 비석에 혈인을 눌러 찍으려던 그 찰나, 동굴 너머에서 도식의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선배님! 금기가… 금기가 역류해서 저를 거부해요! 제 존재를 통째로 지워버리려 해요!”
놀란 윤재가 고개를 돌렸다. 제단 통제판을 붙잡고 있던 도식의 몸이 붉은 잉크가 번지듯 흐려지기 시작했다. 장부가 최후의 발악으로 통제자 도식을 소멸시키려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