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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화: 보관실의 폭주
잉크 속은 차갑지 않았다. 오히려 끓어오르는 기름처럼 뜨거웠고, 그 안은 수만 명의 속삭임으로 가득 차 있었다. 윤재는 서연의 손을 놓치지 않으려 팔이 빠질 듯 힘을 주었지만, 보이지 않는 조류가 두 사람을 갈라놓으려 했다.
“윤재야!”
서연의 목소리가 멀어지는 순간, 윤재는 바닥이 없는 나락으로 추락했다.
쿵, 하고 발이 닿은 곳은 도서관 지하 자료실이었다. 추락할 때의 강렬한 충격으로 인해 주머니 속에 넣어두었던 형의 아날로그 시계가 바스라지듯 깨졌고, 시계 유리의 날카로운 파편들이 주머니 안쪽에서 짤랑거렸다.
그러나 통증을 인지하기도 전에 윤재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곳은 더 이상 책들이 정돈된 공간이 아니었다. 수천 권의 장부들이 천장까지 닿을 듯한 탑을 이루고 있었고, 그 장부의 장들은 마치 짐승의 갈비뼈처럼 기괴하게 들썩거리고 있었다.
“서연아! 차이준!”
윤재가 외쳤지만 돌아오는 것은 공허한 메아리뿐이었다. 대신, 장부의 탑 사이에서 검은 액체가 흘러나오더니 형체를 갖추기 시작했다. 그것은 아까 학생회관에서 보았던 파수꾼들과는 차원이 다른 압박감을 뿜어냈다.
검은 형체들의 얼굴이 서서히 드러났다.
시험에 늦어 절망하던 윤재, 도식의 사고를 막지 못해 울먹이던 윤재, 그리고 형의 죽음을 목격하고 무너졌던 7년 전의 윤재.
모든 회차, 모든 굴레에서 쏟아져 나온 ‘후회’들이 괴물이 되어 윤재를 에워쌌다.
“이게… 보관실의 폭주인가.”
장부들은 더 이상 과거를 보관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그것들은 자신들을 가두고 있는 금기에 분노하듯, 장마다 담긴 슬픔과 고통을 실체화하여 쏟아내고 있었다.
하나의 괴물이 윤재에게 달려들었다. 그것은 윤재와 같은 모습이었지만, 입에서는 잉크가 섞인 검은 피를 흘리며 소리쳤다.
- 네가 어제로 돌아가서 얻은 게 뭐야! 결국 도식이도, 형도 더 큰 지옥에 빠뜨렸잖아!
윤재는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괴물의 말은 화살이 되어 가슴에 박혔다.
“아니야… 난 살리려고 했던 거야!”
- 살리려고? 아니, 넌 네 죄책감을 덜고 싶었을 뿐이야!
괴물의 손톱이 윤재의 팔을 스쳤다. 상처에서는 피 대신 검은 잉크가 배어 나왔다. 이곳에서 입는 상처는 육체가 아니라 존재를 오염시키고 있었다.
그때, 저 멀리서 날카로운 금속음이 들렸다.
“강윤재, 정신 차려! 그건 네가 아니야!”
서연이었다. 그녀는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커다란 도서관 사다리를 휘두르며 괴물들을 밀쳐내고 있었다. 그녀의 옷도 이미 잉크로 얼룩져 있었지만, 눈빛만은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서연아!”
“이 장부들은 우리가 만든 오답 노트 같은 거야! 오답에 매몰되면 정답은 영영 못 써!”
서연이 윤재의 곁으로 뛰어와 등을 맞댔다.
“차이준은 어디 있어?”
“모르겠어. 잉크 속으로 들어올 때 흩어진 것 같아. 하지만 저기 봐.”
서연이 가리킨 곳은 장부의 탑 너머, 붉은 빛이 새어 나오는 거대한 틈새였다.
“저기가 금기의 심장으로 가는 길이야. 장부들이 저 길을 막으려고 폭주하고 있는 거야.”
그 순간, 장부의 탑들이 일제히 무너져 내리며 두 사람을 덮쳐왔다. 종이들이 칼날이 되어 휘몰아쳤고, 수만 줄의 글자들이 뱀처럼 바닥을 기어와 두 사람의 다리를 묶었다.
- 돌아가! 여기는 죽은 시간들의 무덤이다!
보관실 전체가 진동하며 비명을 질렀다.
윤재는 주머니 속에서 아까 깨진 시계 파편 하나를 꺼냈다. 날카로운 유리 조각이 손바닥을 찔러 피가 났지만, 그 피가 유리 조각에 닿는 순간 시계 파편이 눈부신 금색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형이 그랬지. 이 시계는 주술을 무효화하는 도구라고.”
윤재는 빛나는 파편을 허공으로 던졌다.
“우리가 만든 모든 실패한 현재들, 내가 저지른 모든 이기적인 선택들! 전부 무효로 하겠어!”
빛의 파동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달려들던 괴물들이 연기처럼 흩어졌고, 두 사람을 묶고 있던 글자들이 재가 되어 날아갔다.
길이 열렸다.
하지만 그 길 끝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은 문이 아니었다.
잉크로 된 거대한 소용돌이, 그리고 그 중심에서 눈을 뜬 보관실의 진정한 주인— 폭주하는 장부 그 자체였다.
“서연아, 뛰어!”
두 사람은 붉은 빛의 틈새를 향해 몸을 던졌다.
등 뒤에서 보관실이 완전히 무너져 내리는 굉음이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