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2

2화: 대신 늦은 사람
기말고사가 끝난 강의실은 평소와 다름없는 소란으로 가득했다. 정답을 맞히며 안도하는 목소리, 아쉬움 섞인 탄식, 그리고 종강의 해방감을 만끽하는 웃음소리까지.
하지만 윤재는 그 소음들 속에서 홀로 고립된 섬 같았다.
방금 제출한 답안지는 완벽했다. 어젯밤 12분의 기적이 선사한 지식은 머릿속에 날카롭게 박혀 있었다. 하지만 승리감 대신 혀끝을 맴도는 것은 비릿한 금속성 맛이었다.
“……왜 네가 여기 있어?”
복도로 나오자마자 마주친 것은 바닥에 주저앉아 어깨를 들먹이는 민도식이었다.
성실함이 유일한 무기였던 후배. 그는 윤재가 타려다 놓친, 혹은 ‘타지 않기로 선택한’ 721번 버스에 타고 있었다. 윤재가 늦잠을 자지 않은 평행세계에서, 도식은 버스 사고라는 불운을 대신 짊어진 채 시험장 문앞에서 쫓겨났다.
“선배님…… 저 진짜 공부 열심히 했거든요. 근데 버스가, 버스가 갑자기…….”
도식의 둥근 안경 너머로 눈물이 툭 떨어졌다. 윤재는 그를 위로하기 위해 손을 뻗으려다 멈칫했다.
오른쪽 손등이 불에 데인 듯 화끈거렸다.
“윽.”
윤재는 급히 손등을 움켜쥐었다. 소매 아래로 언뜻 보인 피부 위에는 마치 검은 만년필 잉크가 스며든 것 같은 가느다란 선 하나가 그어져 있었다.
전에 보았던 환영이 아니었다. 그것은 살갗을 뚫고 나온 실재하는 ‘낙인’이었다.
“강윤재, 너 어디 아파?”
익숙한 목소리와 함께 서연이 다가왔다. 그녀는 날카로운 눈으로 윤재의 창백한 얼굴과 떨리는 손을 살폈다.
“아니, 아무것도 아냐.”
“얼굴이 시체 같은데? 그리고 너 오늘 좀 이상해. 평소라면 늦잠 자서 오지도 못했을 녀석이 어떻게 제일 먼저 와서 시험을 보고 있어?”
서연의 질문은 정확했고, 그래서 위협적이었다. 그녀는 윤재의 평소 생활 패턴을 누구보다 잘 아는 동기였다.
윤재는 도식의 흐느낌과 서연의 의심스러운 시선 사이에서 숨을 몰아쉬었다. 손등의 검은 선은 맥박에 맞춰 조금씩 더 진해지는 것 같았다.
‘처음은 공짜다.’
귓가에 맴도는 그 목소리가 비웃는 듯했다. 자신의 행운이 누군가의 절망 위에서 피어났다는 사실이, 그리고 그 대가가 자신의 몸에 새겨지기 시작했다는 사실이 윤재를 옥죄어 왔다.
서연은 윤재를 이끌고 학생회관 뒤편의 한적한 벤치로 향했다. 그녀는 주머니에서 손소독제를 꺼내 자신의 손을 닦으며, 윤재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숨기지 말고 말해. 너 아까 손등 부여잡고 있었지? 뭐야, 다친 거야?”
“아무것도 아니래도. 그냥 좀 쥐가 난 거야.”
윤재는 후드티 소매를 최대한 끌어당겨 손등을 가렸다. 하지만 피부를 파고드는 그 서늘한 감촉은 사라지지 않았다. 마치 보이지 않는 실이 뼛속까지 파고들어 심장으로 연결된 듯한 기분이었다.
“721번 버스 말이야.”
윤재가 화제를 돌렸다.
“그 사고, 네가 보기엔 우연인 것 같아?”
“무슨 소리야? 사고가 우연이지 그럼 필연이겠어? 택배 차량이 무리하게 끼어들었다며. 운이 없었던 거지, 민도식이.”
서연의 대답은 논리적이고 명료했다. 세상의 모든 일은 원인과 결과에 따라 움직인다는 그녀의 평소 지론다웠다. 하지만 윤재는 알고 있었다. 그 ‘사고’의 원인이 택배 차량이 아니라, 12시간 전 자신의 방에서 맞춘 다섯 개의 알람이었다는 것을.
자신이 늦지 않기 위해 비틀어버린 시간의 궤적이, 도식이 타고 있던 버스의 경로를 미묘하게 간섭했을지도 모른다. 혹은, 세상에 정해진 ‘지각자’의 쿼터가 있는데 자신이 그걸 거부하자 애먼 도식에게 화살이 돌아간 것일지도.
“서연아, 만약에…….”
윤재가 입술을 뗐다.
“만약에 그 사고를 미리 막을 수 있었다면? 그래서 도식이가 시험을 볼 수 있게 된다면, 그건 좋은 일일까?”
서연이 눈을 가늘게 떴다.
“무슨 뜬구름 잡는 소리야? 이미 일어난 일이야. 시간을 되돌릴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냥 가정이 그렇다는 거지.”
“글쎄. 도식이가 시험을 보는 대신, 그 버스가 사고가 안 나서 다른 곳에서 더 큰 사고가 난다면? 인과율이라는 건 그렇게 간단한 게 아냐, 윤재야. 하나를 고치면 다른 하나가 어긋나기 마련이라고.”
서연의 말은 비수가 되어 윤재의 가슴에 박혔다. 하나를 고치면 다른 하나가 어긋난다. 그것이 이 힘의 본질일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엄습했다.
윤재는 서연을 먼저 보내고 중앙도서관으로 향했다. 낡은 서가 구석에서 ‘시간의 틈’, ‘정오의 기적’ 같은 허무맹랑한 키워드로 책을 뒤졌지만, 돌아오는 것은 허황된 민담뿐이었다.
죄책감과 의문 속에서 꼬박 하루가 흘렀다. 잠 한 숨 이루지 못한 채 맞이한 다음 날, 시계는 다시 운명의 정오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화요일 오후 12시 11분.
윤재는 도서관 구석자리에서 숨을 죽였다. 손등의 검은 선이 맥박치기 시작했다.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꿈틀거리는 그 감각이, 다시 한번 그를 부르고 있었다.
오전 11시 59분.
도서관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주변의 백색소음조차 멀어지고, 윤재의 귓가에는 오직 자신의 거친 숨소리와 시계 초침 소리만이 맴돌았다.
12시 05분.
12시 10분.
손등의 검은 선이 타는 듯이 아파왔다. 윤재는 책상을 짚은 손에 힘을 주었다. 어제 자신이 늦잠을 잤던 그 비참한 현실을 피하기 위해 12분을 사용했을 때, 도식은 억울하게 지각자가 되었다. 자신이 저지른 이 기형적인 인과를 다시 돌려놓아야만 했다. 그것이 이 끔찍한 힘에 잡아먹히지 않는 유일한 길이라고 믿었다.
12시 12분 00초.
순간, 도서관의 낡은 나무 책상이 물결치듯 흔들렸다.
치익, 치이익.
어제 들었던 그 끔찍한 파열음이 고막을 찢을 듯 울려 퍼졌다. 시야가 하얗게 번지더니, 공중에 핏빛 글자가 떠올랐다.
[ 12 : 12 ]
그리고 그 아래, 어제는 보지 못했던 문장이 불길하게 명멸했다.
[ 인과를 수정하시겠습니까? ]
그것은 질문이 아니라 유혹이었다. 윤재는 마른침을 삼켰다. 서연의 경고가 뇌리를 스쳤다. 하나를 고치면 다른 하나가 어긋나기 마련이라고.
하지만 당장 눈앞에 아른거리는 것은 도식의 절망적인 얼굴이었다.
“……수정한다.”
윤재가 허공을 향해 작게 속삭인 순간, 세상이 다시 한번 무자비하게 뒤집혔다.
눈을 떴을 때, 귓가를 때리는 것은 요란한 알람 소리였다.
[ AM 07:30 ]
방 안이었다. 자신이 미친 듯이 알람을 맞추고 요약 노트를 훑어보았던, 기말고사 당일 아침.
오른쪽 아래 카운트다운이 다시 시작되고 있었다. [ 11:59 ]
윤재는 망설임 없이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단톡방을 뒤져 도식의 프로필을 찾았다.
도식아, 나 3학년 강윤재인데, 오늘 721번 버스 타지 마. 사거리에서 사고 난다. 택시를 타든 걸어오든 무조건 다른 거 타. 제발.
1분 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답장이 왔다.
누구세요? 갑자기 무슨 사고예요?
윤재는 입술을 깨물었다. 구구절절 설명할 시간이 없었다.
나중에 다 설명할 테니까, 내 말 믿고 절대 타지 마. 안 그럼 너 시험 못 봐.
도식의 메시지에 읽음 표시가 뜬 것을 확인한 윤재는, 남은 시간 동안 가방을 싸며 초조하게 시계를 노려보았다. 제발 도식이 자신의 경고를 믿어주기를.
[ 00:00 ]
다시 거센 현기증이 일며 시야가 암전되었다.
돌아온 곳은 다시 중앙도서관 구석자리였다. 시계는 12시 24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윤재는 떨리는 손으로 스마트폰을 켰다. 단톡방 화면을 아래로 쓸어내렸다.
721번 사고 났다는데 다들 괜찮음?나 방금 뉴스 봄. 정체 엄청 심하대.도식이는?
그리고 그 아래, 윤재가 애타게 찾던 메시지가 보였다.
저 괜찮아요. 강윤재 선배님 덕분에 안 탔어요.
“하아…….”
윤재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묻으며 깊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도식이 시험을 치렀다. 자신이 어그러뜨린 인과를 다시 제자리로 돌려놓은 것이다.
하지만 기쁨은 찰나였다. 손등에서 느껴지는 찌르르한 통증에 윤재가 시선을 내렸다.
“…….”
손등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던 검은 선이, 방금 전보다 1센티미터는 더 길어져 손목 쪽을 향해 뻗어 있었다. 마치 그의 살을 파먹으며 자라나는 덩굴처럼.
현실은 그가 고친 문장 위로 새로운 이야기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고, 그 대가는 고스란히 윤재의 몸에 새겨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