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2

19화: 공유된 시간
윤재는 두 시간에 걸쳐 서연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12시 12분에 시작된 첫 번째 회귀부터, 정오 보관실의 차이준, 2016년 축제에서 만난 형 도현, 그리고 공동 계약을 통해 도식의 어머니가 지워졌던 끔찍한 대가까지.
이야기를 마쳤을 때, 캠퍼스에는 붉은 노을이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서연은 빈 종이컵을 만지작거리며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그녀의 표정은 읽기 힘들었지만, 윤재는 그녀가 자신을 미친 사람 취급하며 떠나지 않은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그래서… 지금 이 세상이 네가 선택한 ‘현재’라는 거지?”
서연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응. 형이랑 같이 장부를 덮었을 때, 나는 모두가 원래대로 돌아온 세상을 바랐어. 도식이 어머니도 돌아오고, 학교도 평화롭고, 차이준도 괴물이 아닌 세상을.”
“하지만 형은 돌아오지 않았어.”
그녀의 지적은 날카로웠다. 윤재는 고개를 떨구었다.
“형은… 장부의 속박된 혼이니까. 형이 돌아오면 보관실이 다시 열리고 캠퍼스가 붕괴할 거야. 형은 스스로를 제물로 바쳐서 이 가짜 평화를 지탱하고 있는 거야.”
서연이 갑자기 윤재의 어깨를 꽉 쥐었다.
“강윤재, 잘 들어. 이건 평화가 아니라 ‘연기’야. 아까 내가 그랬지? 네 손등이 닿은 곳이 뜨겁다고.”
그녀는 자신의 손등을 보여주었다. 윤재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서연은 고통스러운 듯 미간을 찌푸렸다.
“기억은 지워졌지만, 내 몸은 기억하고 있어. 우리가 같이 장부의 장을 찢어발기던 그 감각을. 그리고 장부는 아직 사라지지 않았어. 단지 너의 선택 때문에 잠시 숨을 고르고 있을 뿐이야.”
윤재는 소름이 돋았다.
“무슨 소리야? 장부를 덮었잖아. 00:00이 됐고, 현실로 돌아왔는데.”
“장부는 기록하는 물건이야. 네가 ‘평화’를 선택했으니, 장부는 이제부터 그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대가’를 기록하기 시작할 거야. 혼자가 아니라, 우리 셋의 현재를 갉아먹으면서.”
그때, 윤재의 주머니 속에서 휴대폰이 진동했다.
발신인 제한 번호.
윤재는 직감했다. 장부의 속박된 혼이 된 형이 보내는 신호라는 것을. 하지만 전화를 받자 들려온 것은 형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 윤재야, 나야.
차이준의 목소리였다. 2026년의 서늘한 파수꾼이 아니라, 2016년의 방황하던 청년 같은 떨리는 목소리.
“차이준…? 당신도 돌아왔어?”
- 돌아왔지. 하지만 네가 만든 이 세상은 너무 무거워. 네가 바란 ‘완벽한 원래대로’를 유지하기 위해서, 장부가 지금 캠퍼스 아래에서 무엇을 끄집어내고 있는지 알아야 해.
“무슨 소리야? 어디 있는데?”
- 도서관 지하 4층. 예전엔 없던 층이 생겼어. 서연이랑 같이 와. 이건 너희가 시작한 ‘공동 계약’의 결과물이니까.
전화가 끊겼다.
윤재는 서연을 보았다. 서연은 이미 자리에서 일어나 가방을 메고 있었다.
“가자. 이번엔 나도 기억을 잃고 싶지 않아.”
두 사람은 도서관으로 달렸다. 밤이 깊어가는 캠퍼스, 학생들은 여전히 평화롭게 걸어 다녔지만 윤재의 눈에는 그들이 마치 종이로 오려 붙인 인형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도서관 지하 4층.
엘리베이터 버튼에는 존재하지 않던 ‘B4’ 버튼이 붉은 핏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버튼을 누르자 엘리베이터가 바닥이 꺼지는 듯한 속도로 내려갔다. 문이 열렸을 때, 그들 앞에는 도서관 자료실이 아닌 거대한 ‘거울의 방’이 펼쳐져 있었다.
수천 개의 거울 속에서 수천 명의 윤재와 서연이 서로 다른 행동을 하고 있었다. 어떤 거울 속의 윤재는 울고 있었고, 어떤 거울 속의 서연은 죽어 있었다.
그리고 방 한가운데, 차이준이 깨진 거울 조각을 손에 쥔 채 서 있었다.
“보여? 이게 너희가 선택한 평화의 이면이야.”
차이준이 거울 하나를 가리켰다. 그 거울 속에는 도식이의 모습이 있었다.
도식은 활기차게 어머니와 밥을 먹고 있었지만, 그의 등 뒤에는 검은 잉크로 된 거대한 가시가 돋아나 그의 심장을 향해 뻗어가고 있었다.
“기록을 고정하기 위해선 힘이 필요해. 그리고 장부는 지금 너희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타인의 현재’를 야금야금 씹어먹으며 이 세상을 유지하고 있어.”
윤재는 거울 앞으로 달려가 도식의 이름을 불렀지만, 거울 속의 도식은 들리지 않는 듯 환하게 웃기만 했다.
“우리가… 도식을 죽이고 있는 거야?”
윤재의 목소리가 떨렸다.
서연이 거울을 만지며 낮게 읊조렸다.
“아니. 우리가 장부를 공유하게 된 이상, 이제 한 사람의 후회만으로는 부족해진 거야. 굴레는 이제부터 진짜 시작이야, 윤재야.”
거울의 방 전체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수천 개의 거울이 일제히 깨지며, 그 파편들이 윤재와 서연의 주변을 돌며 소용돌이쳤다.
공유된 시간의 무게가 두 사람을 덮쳐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