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2

18화: 서연의 의심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느껴진 것은 코끝을 간지럽히는 따스한 햇살이었다.
비릿한 흙냄새도, 끈적한 검은 잉크의 감촉도 없었다. 윤재는 자신이 대강의실 맨 뒷자리에 엎드려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강단 위에서는 ‘현대사회와 윤리’ 교수가 지루한 목소리로 기말고사 채점 기준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다.
휴대폰을 확인했다.
13:45
12시 12분은 이미 한참 지나 있었다.
윤재는 떨리는 손으로 연락처를 뒤졌다. ‘민도식’. 전화를 걸자마자 활기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 어, 선배님! 왜요? 시험 잘 보셨어요? 저 지금 엄마랑 밥 먹으러 가는데.
“어머니랑… 같이 있어?”
- 당연하죠. 오늘 엄마 생신이라니까요. 아까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윤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 몸을 기댔다. 도식의 어머니는 돌아와 있었다.
아니, 지워진 적이 없는 상태가 되어 있었다. 캠퍼스는 평화로웠고, 시계탑은 정직하게 현재 시간을 가리키고 있었다.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온 것 같았다.
하지만 윤재의 가슴 한구석엔 여전히 서늘한 구멍이 뚫려 있었다.
형 강도현의 모습, 그리고 마지막에 장부를 덮을 때 느꼈던 그 온기가 너무나 생생했다.
강의실 밖으로 나오자, 서연이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평소처럼 커피 두 잔을 들고 환하게 웃었지만, 윤재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웃음기를 거두었다.
“강윤재, 너 왜 그래?”
“어? 뭐가?”
“너 지금 얼굴이… 꼭 수십 년은 늙어버린 사람 같아. 시험 망쳤어?”
윤재는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지만, 서연의 예리한 시선은 피할 수 없었다.
함께 캠퍼스 벤치에 앉았을 때, 서연이 커피를 건네며 나직하게 말했다.
“너 오늘 12시 12분에 어디 있었어?”
윤재는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그냥… 강의실에 있었지. 왜?”
“거짓말하지 마. 아까 시험 시작하기 직전에 네가 나한테 보낸 메시지, 기억 안 나?”
서연이 휴대폰 화면을 보여주었다.
나 진짜 어제로 돌아가고 싶다.
그것은 윤재가 첫 번째 굴레를 시작하기 전, 횡단보도에서 보냈던 메시지였다.
그런데 이상했다. 이번 세계선에서 윤재는 시험에 늦지 않았고, 당연히 그 메시지를 보낼 이유도 없었다.
“이거… 언제 받은 거야?”
“정확히 12시 12분. 근데 웃기는 건 뭔지 알아? 네가 보낸 건 맞는데, 보낸 시간은 어제 밤으로 찍혀 있어. 통신사 오류라고 생각하려고 했는데, 네 표정을 보니까 그게 아닌 것 같아서.”
서연은 윤재의 손등을 낚아채듯 잡았다.
그곳엔 검은 선이 없었다. 하지만 서연의 손가락이 닿은 자리가 화끈거리며 열기가 피어올랐다.
“너, 내가 모르는 곳에 갔다 왔지?”
서연의 눈동자에는 의심보다 더 깊은 걱정이 서려 있었다. 윤재는 그녀를 속일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공동 계약자였다. 기억은 지워졌을지 몰라도, 영혼에는 그날의 흔적이 낙인처럼 남아 있는 것이었다.
“서연아.”
윤재는 심호흡을 하고 그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내가 하는 말, 절대 안 믿기겠지만… 들어줄 수 있어?”
서연은 대답 대신 윤재의 손을 더 꽉 잡았다.
그 순간, 캠퍼스의 시계탑이 오후 2시를 알리는 종을 울렸다.
그런데 윤재의 귀에는 그 소리가 평범한 종소리가 아니라, 찢어지는 듯한 잉크의 비명소리로 들려왔다.
굴레는 끝난 것이 아니었다.
기록된 것은 ‘현재’가 아니라, 단지 ‘새로운 장’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