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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화: 세 번째 사람
자신과 똑같은 얼굴을 한 존재가 어둠 속에서 걸어 나올 때의 감각은 공포라기보다 혐오에 가까웠다.
잿빛 눈동자를 가진 ‘윤재’는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일행을 훑어보았다.
그의 옷차림은 현재의 윤재와 같았지만, 그가 딛고 선 바닥에서는 검은 잉크가 연기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놀랄 것 없어.”
잿빛 눈의 윤재가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윤재 자신의 것이었지만, 훨씬 더 낮고 차가웠다.
“나도 한때는 너처럼 형을 살릴 수 있다고 믿었으니까. 서연이를 지키고, 도식이의 어머니를 되돌릴 수 있을 거라고 믿었던 수많은 ‘강윤재’ 중 하나일 뿐이야.”
윤재는 시계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수많은 강윤재라니… 설마 너도 굴레를 돌고 있는 거야?”
“굴레? 아니, 이건 굴레가 아니야. 퇴적(Deposition)이지.”
그는 주위를 둘러싼 수만 권의 장부들을 가리켰다.
“여기에 쌓인 장부 한 권 한 권이 모두 실패한 너의 역사다. 형을 살리는 데 성공하면 서연이가 죽고, 서연이를 살리면 네가 지워지지. 모든 것을 완벽하게 되돌리려 할 때마다 장부는 새로운 장을 요구했고, 그 결과가 바로 이 거대한 무덤이야.”
차이준이 신음하며 앞으로 나섰다.
“네가 바로 그 ‘세 번째 사람’이었군. 내가 보관실의 결계를 지키는 동안, 내부에서 기록을 갉아먹고 있던 쥐새끼가.”
잿빛 눈의 윤재는 차이준을 조롱하듯 바라보았다.
“쥐새끼라니, 이준 형. 난 당신보다 훨씬 더 효율적으로 이 장부를 쓰고 있을 뿐이야. 당신이 과거를 ‘보관’만 하는 동안, 나는 그것들을 ‘재료’로 써서 완벽한 현재를 조립하고 있었거든.”
도식이 겁에 질린 채 서연의 뒤로 숨었다.
“완벽한 현재요…? 우리 어머니를 지워버린 게 당신이에요?”
“지운 게 아니라, 더 중요한 기억을 유지하기 위한 연료로 쓴 거야. 미안하게 됐네, 도식아. 하지만 네 어머니의 존재는 이 윤재가 형의 방에서 시계를 찾는 사건을 발생시키기 위해 잠시 ‘일시 정지’된 것뿐이야.”
윤재는 분노로 몸이 떨렸다.
자신과 똑같은 얼굴을 한 자가 타인의 삶을 연료라고 부르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당신이 뭔데 남의 인생을 마음대로 해! 형을 저 모래시계에 가둔 것도 당신이야?”
잿빛 눈의 윤재가 모래시계 속의 도현을 돌아보았다.
“아니, 도현 형은 스스로 저길 택했어. 자신의 존재를 모래로 바꿔서 이 보관실이 무너지지 않게 버티고 있는 거지. 내가 하려는 건 형을 저 지옥에서 꺼내주는 거야. 그러기 위해선 너희 세 명의 ‘현재’가 통째로 필요해.”
그가 손을 뻗자, 도서관 천장에 매달려 있던 수만 권의 장부들이 일제히 펼쳐졌다.
장부의 페이지들이 날카로운 칼날처럼 변해 일행을 에워쌌다.
“현재의 윤재야, 선택해. 형을 위해 네 친구들을 제물로 바칠래? 아니면 친구들을 위해 형을 저 모래시계 속에서 영원히 썩게 둘래?”
윤재는 품속에서 진동하는 형의 아날로그 시계를 보았다.
거칠게 회전하는 초침의 기어 틈새로 흘러나오는 붉은 빛이 점점 얇아지고 있었다.
시계가 완전히 태엽을 다해 멈추기까지 남은 시간은 그리 많지 않았다.
하지만 상대는 이미 수만 번의 굴레를 경험한 ‘자신’이었다.
“둘 다 아니야.”
윤재가 시계의 초침을 강제로 멈추며 외쳤다.
“나는 형이 만든 이 시계가 왜 거꾸로 돌았는지 이제 알 것 같아. 이건 과거로 돌아가는 도구가 아니야. 이미 비틀려버린 기록들을 ‘무효화’하는 장치지!”
윤재가 시계를 바닥에 내리치려 하자, 잿빛 눈의 윤재의 표정이 처음으로 일그러졌다.
“안 돼! 그걸 깨뜨리면 모든 기록이 사라져! 네가 사랑하는 사람들도, 형의 영혼도 전부!”
“아무것도 남지 않아도 좋아. 누군가의 희생 위에 세워진 ‘완벽한 현재’ 따위, 필요 없으니까!”
윤재의 외침과 함께 시계의 유리가 산산조각 났다.
그 파편들이 빛의 화살이 되어 원형 도서관의 장부들을 꿰뚫기 시작했다.
잿빛 눈의 윤재가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잉크로 변해 녹아내렸다.
하지만 그 순간, 모래시계 속에 갇혀 있던 도현이 천천히 눈을 떴다.
그리고 모래시계의 유리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