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2

15화: 공범
창밖의 풍경은 기괴했다. 노을빛이 하늘을 가로질러 다시 아침의 푸른빛으로 변하고, 거리를 지나던 사람들은 뒤로 걷기 시작했다.
거꾸로 흐르는 시간 속에서 오직 도현의 방 안만이 정지된 섬처럼 고요했다.
“시간이… 되감기고 있어요.”
도식이 화면 속의 텍스트 파일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노트북 액정에 띄워진 파일 속 핏빛 주언들이 폭포처럼 거꾸로 솟구치고 있었다. 형의 시계가 내뿜는 차가운 진동이 윤재의 팔을 타고 심장까지 전해졌다.
그때, 방 안의 그림자가 서서히 뭉쳐지더니 한 남자의 형상을 만들어냈다.
차이준이었다.
하지만 아까 학생회관에서 보았던 살기 어린 파수꾼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의 코트자락은 여기저기 찢겨 있었고, 얼굴에는 깊은 피로감이 서려 있었다.
무엇보다 그의 손등에 그어진 검은 선들이 미친 듯이 박동하며 금방이라도 터질 듯 부풀어 올라 있었다.
“너였군.”
차이준이 윤재의 손에 들린 시계를 보며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도현이가 남긴 마지막 안전장치를 깨운 게.”
서연이 윤재의 앞을 가로막으며 소리쳤다.
“또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도식의 어머니를 지운 걸로 모자라서 이젠 세상 전체를 망가뜨릴 셈이야?”
차이준은 힘없이 웃으며 방바닥에 주저앉았다. 그의 몸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내가 지운 게 아니야. 장부가 먹어치운 거지. 그리고 지금 이 현상… 시간이 역행하는 건 내가 하는 짓이 아니다. 오히려 내가 막으려던 일이지.”
윤재는 시계를 꽉 쥐었다.
“무슨 소리야? 당신이 파수꾼이잖아. 당신이 이 보관실을 만들었잖아!”
“만들었지. 하지만 통제권을 잃은 지는 오래됐다.”
차이준이 피 묻은 손을 들어 올렸다. 검은 선들 사이로 붉은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도현이와 나는 공범이었어. 우리는 선아를 살리기 위해 장부를 열었지만, 장부는 우리에게서 더 많은 것을 요구했지. 도현이는 장부의 끝없는 허기를 멈추기 위해 스스로 대가가 되어 금기의 심장으로 들어갔어. 그리고 나는 밖에서 그 심장이 터지지 않게 붙잡고 있는 감시자가 된 거고.”
윤재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렇다면 차이준은 지금까지 윤재를 위협했던 게 아니라, 장부의 인과율에 휘말리지 않게 경고했던 것인가?
“그럼 아까 우리를 죽이려 했던 건 뭔데?”
“장부의 방어 주술이다. 너희가 첫 장을 건드리는 순간, 보관실은 너희를 ‘금기를 깨뜨린 자’로 인식하고 소멸시키려 한 거야. 나는 내 계약의 권능을 사용해서 너희를 쫓아내는 척하며 보호하려 했던 거고. 하지만….”
“너희가 공동 계약을 맺는 바람에 일이 꼬였어. 장부가 너희 셋을 새로운 소유자로 인식하기 시작한 거야. 이제 보관실은 도현이가 아닌, 너희의 후회를 먹으려 들 거다.”
창밖의 시간 역행이 멈췄다. 하늘은 정오의 태양이 떠 있는 12시 12분에 고정되었다.
하지만 태양은 검게 물들어 있었고, 캠퍼스 전체가 거대한 잉크 웅덩이 속에 잠긴 듯 어두워졌다.
도식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우리 어머니는요? 되살릴 수 있나요?”
“장부의 기록을 다시 쓰면 가능해. 하지만 그러려면 핵으로 들어가야 한다. 도현이가 잠들어 있는 곳으로.”
차이준이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그는 윤재에게 손을 내밀었다.
“나 혼자서는 이제 무리야. 장부가 내 현재를 거의 다 갉아먹었거든. 하지만 너희 셋, 그리고 도현이의 유산인 그 시계가 있다면… 이 지옥 같은 굴레를 멈출 수 있을지도 몰라.”
윤재는 차이준의 손을 바라보았다.
형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원망스러운 사람이었지만, 지금 그의 눈에 담긴 것은 형을 잃었을 때의 윤재와 똑같은 슬픔이었다.
“좋아. 같이 가.”
윤재가 차이준의 손을 잡았다.
그 순간, 시계의 초침이 다시 정방향으로 돌기 시작했다.
방 안의 가구들이 먼지로 변해 흩어지고, 벽면이 무너져 내리며 새로운 공간이 열렸다.
그곳은 도서관 지하 자료실도, 2016년의 축제 현장도 아니었다.
수만 권의 검은 장부들이 끝도 없이 쌓여 있는, 거대한 원형 도서관의 중심부였다.
그리고 그 도서관 한가운데, 거대한 모래시계 속에 갇힌 채 눈을 감고 있는 강도현의 모습이 보였다.
“형…!”
윤재가 달려가려 했지만, 차이준이 그의 어깨를 잡았다.
“조심해. 저기 세 번째 사람이 있어.”
모래시계 너머, 어둠 속에서 누군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는 윤재와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눈동자는 차가운 잿빛이었다.
미래에서 온, 혹은 다른 굴레에서 실패한 ‘강윤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