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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형의 비밀 방
비가 그친 캠퍼스는 평온했다. 학생들은 여전히 활기차게 점심을 먹으러 이동했고, 도서관 앞의 뒤틀렸던 공간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단단한 현실의 모습을 되찾고 있었다.
오직 세 사람만이 흠뻑 젖은 채, 보이지 않는 거대한 구멍이 뚫린 현실 앞에 서 있었다.
“어머니 번호만 사라진 게 아니에요.”
도식의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그는 휴대폰 갤러리를 미친 듯이 넘기고 있었다.
“가족사진도… 어머니랑 같이 찍은 것만 다 하얗게 변했어요. 마치 처음부터 그 자리에 아무도 없었던 것처럼.”
윤재는 도식의 휴대폰 화면을 보았다. 도식과 그의 아버지가 환하게 웃고 있는 사진 옆, 누군가 서 있었을 법한 공간이 기이한 얼룩으로 덮여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삭제가 아니었다. 존재 자체가 세계의 기록에서 도려내진 흔적이었다.
서연이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우리가 차이준의 금기를 어기고 과거를 훔쳐본 대가야. 세 명이서 나누겠다고 했지만, 그게 누구에게 어떤 방식으로 나타날지는 몰랐어.”
윤재는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졌다. 도식의 소중한 사람이 지워진 것이 자신의 이기심 때문인 것 같아 고개를 들 수 없었다.
하지만 도식은 오히려 윤재의 소매를 붙잡았다.
“선배님, 자책하지 마세요. 제가 선택한 거잖아요. 그리고 어머니가 사라진 게 아니라, 어머니에 대한 기록이 바뀐 거라면… 다시 되돌릴 방법도 있을 거예요.”
도식의 눈에는 공포보다 더 강한 결의가 서려 있었다. 윤재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멈추면 도식의 어머니는 영영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 된다.
“형의 방에 가봐야겠어.”
윤재가 무겁게 입을 뗐다.
“아까 2016년에서 형이 그랬지. 자기가 이 장부의 첫 번째 대가였다고. 형이 죽은 게 사고가 아니라 장부 때문이라면, 분명 집에 무언가 남겨뒀을 거야.”
윤재는 서연과 도식을 돌려보내려 했지만, 두 사람은 완강했다.
결국 세 사람은 윤재의 본가로 향했다. 부모님은 일터에 나가 계셨고, 형의 방은 7년 전 그날 이후 거의 시간이 멈춘 채로 보존되어 있었다.
먼지가 얇게 내려앉은 책상, 전공 서적들, 그리고 벽에 걸린 낡은 기타.
윤재는 형의 방에 들어설 때마다 느꼈던 그리움이 이제는 거대한 미스터리에 대한 긴장감으로 바뀌는 것을 느꼈다.
“도식아, 네 지식이 필요해. 형의 전공 교재나 유품 상자 속, 혹은 서랍 구석에 비밀 공간이나 저장 장치가 있는지 살펴봐줘.”
도식은 책상 앞에 앉아 형의 오래된 노트북을 켜고, 그 안에 담긴 문서 파일들을 빠르게 대조해 나갔다.
그 사이 윤재와 서연은 책장과 침대 밑을 샅샅이 뒤졌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서연이 벽장에 걸린 형의 낡은 겨울 코트 안주머니에서 작은 열쇠 하나를 찾아냈다.
“윤재야, 이거!”
그 열쇠는 책상 가장 아래쪽, 잠겨 있던 서랍의 구멍과 정확히 일치했다.
열쇠를 돌리자 ‘딸깍’ 소리와 함께 서랍이 열렸다.
서랍 안에는 낡은 일기장 한 권과, 검은 천에 싸인 묵직한 물체가 들어 있었다.
윤재는 조심스럽게 천을 벗겨냈다. 그 안에서 나타난 것은 낡은 아날로그 손목시계였다.
가죽 끈은 해어져 있었고, 유리판에는 가느다란 금이 가 있었다.
하지만 기이한 점은 시계의 바늘이었다. 초침은 멈춰 있었지만, 시침과 분침이 정확히 12시 12분을 가리킨 채 고정되어 있었다.
“이거… 아까 2016년 차이준의 방 책상 위에 있던 그 시계 아니야?”
서연의 말대로였다. 깨진 유리 파편의 모양까지 똑같았다.
윤재가 시계를 손에 쥐는 순간,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손바닥을 타고 뇌로 전달되었다.
그리고 환청처럼 형의 목소리가 들렸다.
‘윤재야, 시계를 감아. 12분이 아니라, 12년을 거슬러 올라가야 할지도 몰라.’
동시에 노트북 화면의 파일들을 대조해보던 도식이 비명을 지르며 뒤로 넘어졌다.
“선배님! 이것 보세요! 이건…!”
파일의 상세 정보 탭을 열자, 마치 디지털 화면이 흐물흐물 녹아내리는 듯한 이적과 함께, 숨겨진 텍스트 본문이 붉게 빛을 뿜으며 떠올랐다.
보내는 사람은 적혀 있지 않았지만, 임시로 숨겨둔 유서와 같았다. 제목은 없었다.
하지만 본문에는 수만 줄의 붉은 주언과 기이한 주술적 낙인의 흔적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도식이 떨리는 손으로 화면 속 텍스트 파일을 가리켰다.
“이 주언들… 제가 아까 학생회관에서 봤던 그 검은 괴물들의 움직임이랑 일치해요. 이건 단순한 일기가 아니라… 이 장부의 힘을 제어하는 주술의 조작법이에요.”
윤재는 형의 시계와 화면에 뜬 주언들을 번갈아 보았다.
형은 단순히 대가로 희생된 것이 아니었다.
형은 이 비극적인 금기의 설계자 중 한 명이었거나, 혹은 이 금기를 무너뜨리기 위해 자신의 존재를 대가로 던진 반역자였을지도 모른다.
그때, 멈춰 있던 시계의 초침이 돌연 움직이기 시작했다.
째깍, 째깍.
거꾸로 돌기 시작한 초침이 12시 11분을 향해 나아갔다.
그리고 방 안의 조명이 깜박거리며 현실의 벽이 다시 얇아지기 시작했다.
창밖을 보던 서연이 경악하며 소리쳤다.
“윤재야, 밖을 봐! 시간이…!”
창밖의 풍경은 더 이상 2026년의 오후가 아니었다.
해가 지고 있었다. 하지만 해가 서쪽이 아니라 동쪽에서 떠오르고 있었다.
세상이 거꾸로 흐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