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2

12화: 장부의 첫 장
방 안의 공기가 비명을 지르듯 뒤틀렸다. 젊은 차이준의 손등에서 솟구친 검은 잉크가 채찍처럼 허공을 휘저었고, 그가 움직일 때마다 바닥의 그림자가 늪처럼 일렁였다.
“현재에서 온 쥐새끼들….”
차이준의 눈은 핏발이 서 있었고, 초점은 여전히 불안정했다. 그는 자신이 가진 힘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 못하는 상태였지만, 본능적으로 윤재 일행이 자신의 ‘후회’를 방해하러 온 불청객임을 감지하고 있었다.
“잠깐만요! 우리는 당신을 해치러 온 게 아니에요!”
윤재가 손을 뻗으며 외쳤지만, 차이준의 분노는 멈추지 않았다. 잉크 줄기가 윤재의 발치로 내리꽂혔고, 보도블록이 아니라 나무 바닥이 종이처럼 찢겨 나갔다.
서연이 윤재의 어깨를 밀치며 소리쳤다.
“말로는 안 통해! 저 사람은 지금 자기 연인이 죽기 직전의 시간에 갇혀서 미쳐 있는 상태라고!”
도식은 구석에 웅크린 채 책상 위의 장부를 가리켰다.
“선배님! 장부요! 장부가 빛나고 있어요!”
책상 위에 펼쳐진 검은 가죽 장부의 첫 장에서 은은한 금색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잉크가 아직 마르지 않은 채 글자들이 살아서 움직이는 듯했다. 윤재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저 장부가 이 뒤틀린 시공간을 고정하고 있는 닻이라는 것을.
윤재는 차이준의 공격을 피해 책상으로 몸을 던졌다.
“그거 건드리지 마!”
차이준이 소리치며 손을 뻗었다. 그의 손에서 뿜어져 나온 검은 선이 윤재의 목을 노리고 날아왔다. 그때, 닫혀 있던 나무 문이 거칠게 열리며 누군가 방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이준아, 멈춰!”
익숙한 목소리. 윤재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문가에 서 있는 사람은 고등학생 교복을 입은 강도현이었다. 윤재가 기억하는 모습보다 훨씬 앳된 얼굴, 하지만 눈빛만큼은 지금의 윤재보다 훨씬 깊고 단단했다.
차이준의 움직임이 멈췄다.
“도현아… 넌 빠져. 얘들이 선아를 데려가려 해.”
도현은 숨을 헐떡이며 윤재 일행과 차이준 사이를 가로막았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돌려 윤재를 보았다.
윤재는 입술을 떨며 형의 이름을 부르려 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도현의 눈에 비친 것은 동생에 대한 반가움이 아니라, 기이한 슬픔과 체념이었다.
“윤재야.”
도현이 아주 작게 속삭였다.
“넌 여기 오면 안 됐어.”
윤재는 멍하니 형을 바라보았다.
“형… 형이 왜 여기 있어? 차이준이랑 무슨 사이야?”
도현은 대답 대신 책상 위의 장부를 덮었다. 그러자 방 안을 휘젓던 검은 잉크들이 순식간에 증발하듯 사라졌다. 차이준도 힘을 잃은 듯 비틀거리며 의자에 주저앉았다.
도현이 차이준의 어깨를 짚으며 말했다.
“이준아, 이 사람들은 선아를 데려가려는 게 아니야. 미래에서 온 길 잃은 사람들이야. 내가 책임지고 돌려보낼게.”
차이준은 머리를 감싸 쥐며 중얼거렸다.
“미래…? 그런 건 상관없어. 난 오늘 12시 12분에 선아를 살려야 해. 네가 도와준다고 했잖아, 도현아. 네가 이 장부를 쓰면 가능하다고….”
윤재의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장부를 쓴 게 차이준이 아니라 형이라고? 이 모든 비극의 시작점에 형의 손길이 닿아 있었다는 건가?
도현은 윤재 일행에게 다가와 그들을 방 밖으로 밀어냈다. 서연과 도식은 얼떨결에 계단 위로 쫓겨났고, 윤재만이 형의 소매를 붙잡고 버텼다.
“형, 설명해 줘. 이게 다 뭐야? 형이 왜 죽었는지, 왜 정오마다 전화가 오는지!”
도현은 계단 입구에서 멈춰 섰다. 그는 윤재의 손을 천천히 떼어내며, 7년 전 사고 당일 보았던 그 따뜻하고도 서글픈 미소를 지었다.
“윤재야, 이 장부의 첫 장에 내 이름이 있는 건, 내가 소유자여서가 아니야.”
도현이 계단 아래 어둠 속으로 몸을 숨기며 말을 이었다.
“내가 이 장부의 가장 무거운 ‘대가’를 짊어질 것이기 때문이야.”
그 말을 끝으로 계단 아래의 공간이 거대한 블랙홀처럼 말려 들어갔다. 2016년의 축제 소음이 다시 귓전을 때렸고, 윤재와 서연, 도식은 시계탑 밖 잔디밭 위로 튕겨져 나왔다.
눈을 떴을 때, 시계탑 아래 서 있던 선아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하늘은 다시 2026년의 잿빛으로 변해 있었고, 차가운 빗줄기가 윤재의 뺨을 적셨다.
도식은 바닥에 주저앉아 거친 숨을 내뱉었다.
“방금… 형님 맞죠? 선배님 형님….”
서연은 젖은 옷을 털어내며 윤재를 보았다. 그녀의 눈에도 혼란과 충격이 가득했다.
“형이 대가였다니… 그게 무슨 뜻이야, 윤재야?”
윤재는 자신의 손등을 보았다. 사라졌던 검은 선이 다시 나타나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다. 선의 끝부분이 가느다란 글자 형태로 변해 있었다.
그것은 숫자였다.
07:12
남은 시간 7분 12초.
차이준의 보관실이 아니라, 윤재 자신의 장부가 열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