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2

11화: 닫힌 문의 틈새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아이돌 노래와 떡볶이 냄새, 그리고 사람들의 활기찬 웃음소리. 2016년의 공기는 2026년보다 조금 더 가볍고, 조금 더 서툴렀다.
윤재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검은 선이 사라져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아직 생기기 전의 깨끗한 손등이었다. 하지만 머릿속은 2026년의 비릿한 빗줄기와 차이준의 서늘한 목소리로 가득 차 있었다.
“이번 윤재는 친구들을 데려왔구나.”
시계탑 아래 서 있는 여자는 윤재가 도서관 벽에서 발견한 사진 속의 그 인물이었다. 선아. 사진보다 조금 더 생생하고, 조금 더 지쳐 보이는 얼굴이었다. 그녀는 하얀 원피스 차림으로 시계탑 난간에 기대어 있었다.
도식이 침을 꿀꺽 삼키며 윤재의 소매를 붙잡았다.
“선배님, 저 사람… 우리를 아는 것 같은데요?”
서연은 경계심 가득한 눈초리로 선아를 훑었다.
“누구시죠? 이번 윤재라니, 그게 무슨 뜻이에요?”
선아는 대답 대신 시계탑 위를 가리켰다. 낮 12시 15분. 정오가 지난 지 불과 3분밖에 되지 않았다. 하지만 윤재는 알고 있었다. 이 공간은 흐르는 시간 속에 박제된, 12:12의 파편이라는 것을.
“나는 장부의 첫 번째 계약자였어.”
선아의 목소리는 바람에 섞여 희미하게 들렸다.
“그리고 너희가 아는 차이준이 가장 지우고 싶어 하는 ‘후회’이기도 하지.”
윤재는 한 걸음 다가갔다.
“당신이 차이준 이전에 능력을 썼다고요? 그럼 이 굴레의 시작이 당신이라는 겁니까?”
선아는 쓰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시작은 없어, 윤재야. 우리는 모두 중간에 끼어든 사람들이지. 누군가 던진 돌에 맞은 개구리들처럼.”
그녀는 난간에서 내려와 세 사람 앞으로 다가왔다.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발밑의 보도블록이 물결치듯 흔들렸다. 현실이 고정되지 않았다는 증거였다.
“보통의 윤재들은 혼자 왔어. 형을 살리겠다고, 혹은 죽음을 막겠다고 울면서 뛰어왔지. 하지만 넌 달라. 네 곁에 있는 저 아이들이 이 비틀린 시간을 지탱해주고 있어.”
서연이 윤재의 손을 꽉 잡았다.
“우리가 같이 와서 뭐가 달라지는 건데요?”
“공동 계약.”
선아가 서연을 보며 말했다.
“혼자서 감당해야 할 인과율을 셋이서 나누고 있다는 뜻이야. 그래서 지금 너희는 차이준의 눈을 피해 이 닫힌 문의 틈새로 들어올 수 있었던 거고.”
윤재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축제 현장은 평화로워 보였지만, 사람들의 얼굴은 이목구비가 흐릿했다. 오직 선아와 윤재 일행만이 선명한 채도가 입혀져 있었다.
“우리는 장부의 첫 장을 보러 왔습니다. 차이준이 왜 이 보관실을 만들었는지, 그 근원을 알아야겠어요.”
선아는 시계탑 지하로 향하는 작은 문을 가리켰다. 평소라면 청소 도구함 정도로 보였을 낡은 나무 문이었다.
“저 아래에 있어. 하지만 조심해. 2016년의 차이준은 아직 결계의 ‘파수꾼’이 아니야. 그는 단지 사랑하는 사람을 잃기 직전의, 제정신이 아닌 청년일 뿐이니까.”
도식이 겁먹은 목소리로 물었다.
“우리가 과거의 차이준 선배를 만나면 어떻게 되는데요?”
선아의 눈동자가 잠시 흔들렸다.
“그가 너희를 ‘후회’로 인식하는 순간, 너희는 영영 현재로 돌아가지 못해. 장부의 잉크가 되어 페이지 속에 박제되겠지.”
윤재는 심호흡을 했다. 손등은 깨끗했지만, 심장 부근이 찌릿하게 떨려왔다. 2026년에서 가져온 ‘현재’의 무게였다.
“가자.”
윤재가 먼저 나무 문을 열었다. 좁고 가파른 계단 아래에서 퀴퀴한 종이 냄새와 타버린 양초 냄새가 올라왔다. 서연과 도식도 망설임 없이 뒤를 따랐다.
계단을 다 내려갔을 때, 그들은 작은 방 하나를 발견했다. 방 한가운데에는 낡은 책상이 놓여 있었고, 그 위에는 이제 막 첫 줄이 적히기 시작한 검은색 가죽 장부가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책상 앞에는 한 남자가 머리를 쥐어뜯으며 앉아 있었다.
젊은 시절의 차이준이었다. 그의 앞에는 깨진 시계 하나와 피 묻은 손수건이 놓여 있었다.
“제발… 한 번만 더. 12분만 더 주면 살릴 수 있어.”
차이준의 흐느낌이 좁은 방 안을 메웠다. 그는 아직 능력을 완벽히 제어하지 못하는 듯, 그의 몸 주변으로 공간의 뒤틀림이 일고 있었다.
윤재는 조심스럽게 책상 위로 손을 뻗었다. 장부의 첫 페이지. 거기에는 차이준의 떨리는 필체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2016년 4월 12일. 선아를 구하지 못했다. 하지만 12:12에 문이 열렸다. 나는 이 시간을 보관하기로 했다.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는, 오직 우리만을 위한 방을.
그때, 장부 옆에 놓여 있던 사진 한 장이 윤재의 눈에 들어왔다.
사진 속에는 차이준과 선아, 그리고 그들 뒤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고등학생 시절의 강도현이 있었다.
윤재의 숨이 멎었다.
“형…?”
강도현은 차이준과 아는 사이였다. 아니, 단순히 아는 사이가 아니라 이 비틀린 의식의 목격자이자, 어쩌면 공범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그 순간, 젊은 차이준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의 눈동자는 초점이 없었지만, 정확히 윤재가 서 있는 방향을 향했다.
“누구야?”
그의 목소리와 함께 방 안의 공기가 급격히 얼어붙기 시작했다. 장부의 페이지가 미친 듯이 넘어가며 검은 잉크가 허공으로 솟구쳤다.
“현재의 냄새가 나.”
차이준이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그의 손등에 이제 막 가느다란 검은 선이 그어지기 시작했다.
“내 후회 속에 들어온 쥐새끼들이 너희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