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의 1층만 만 년째, 드디어 올라갑니다

9화: 인장을 밟는 법
15층 안쪽은 휴게 구역으로 이어져 있었다.
천장에는 낡은 동판 표지가 매달려 있었다. 푸른 글자가 희미하게 깜빡이며 길을 나눴다.
[15층 휴게 구역]
[정비소]
[식당]
[길드 검문 회랑]
강현우는 가운데 글자만 잠깐 보았다.
"식당."
뒤쪽에서는 아직도 견습 랭커들이 숨을 고르지 못하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길을 막던 이들은 벽에 기대거나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누군가 기록판을 붙잡고 있었지만 손끝이 떨려 글자를 제대로 누르지 못했다.
현우는 돌아보지 않았다.
휴게 구역 안쪽은 11층보다 넓었다. 탁자는 많았고 장비 수리대도 두 줄이나 있었다. 치료실 앞에는 붕대를 감은 도전자들이 앉아 있었고 식당 쪽에서는 냄비가 조용히 끓고 있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밥그릇을 들던 손도 멈췄고 약을 바르던 치료사도 뚜껑을 닫지 못한 채 서 있었다. 정비사가 망치를 든 팔을 내리지 못하고 굳어 있었다.
벽 기록석이 혼자 요란했다.
[하급 랭커 채널 긴급 갱신]
[15층 입구 확인진 무력화]
[백발의 신선 접근 중]
그 아래로 새 문장이 겹쳤다.
[아틀라스 확인 요청 유지]
[윤서아 호출 대기]
현우는 기록석 대신 식당 쪽 냄비를 보았다.
"여긴 밥 돼?"
접수대에 앉아 있던 여자가 벌떡 일어났다. 이름표에는 모라라고 적혀 있었다. 그녀는 현우의 옷을 보자마자 입술을 꾹 눌렀다.
"휴식권이나 식권이 있으십니까?"
현우는 품을 뒤졌다.
10층에서 받은 식권은 이미 썼다. 금화 주머니와 붉은 목걸이와 붉은 모래가 묻은 망토가 손에 걸렸다. 마지막으로 관문 졸업 증표가 나왔다.
모라의 눈이 증표에 박혔다.
[10층 관문 졸업 증표]
[하층 휴게 구역 임시 이용 가능]
[대상자: 강현우]
"가능합니다."
"그럼 물하고 빵."
"식사는 간단한 스프와 말린 고기뿐입니다."
"괜찮아."
모라는 급히 접시를 준비했다. 그녀가 뒤돌아서는 사이 휴게 구역 안쪽의 사람들은 아주 조금씩 의자를 밀어 거리를 벌렸다. 그것도 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했다.
현우는 빈 탁자에 앉았다.
나무 탁자 위에는 칼자국이 많았다. 누군가 싸우다가 찍은 흔적이 아니라 장비를 손질하다 남긴 자국이었다. 1층의 보급 식탁처럼 낡았지만 여기는 기름 냄새와 금속 냄새가 함께 났다.
모라가 물과 빵과 묽은 스프를 가져왔다.
현우는 물을 먼저 마셨다.
"시원하네."
그 한마디에 모라의 어깨가 조금 내려갔다.
휴게소 구석에서 누군가 작게 속삭였다.
"진짜 혼자야."
"장비도 저게 전부야?"
"그런데 10층 관문이 깨졌잖아."
말은 낮았지만 기록석보다 느렸다. 현우는 스프에 빵을 찍어 먹었다. 말린 고기는 질겼다. 그래도 1층 보급 수프보다는 나았다.
모라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16층으로 가시려면 오른쪽 검문 회랑을 지나셔야 합니다."
"또 문 있어?"
"문은 아닙니다. 길드 통행 확인 절차입니다. 15층부터는 하급 랭커들이 구역 안전을 맡습니다."
현우는 빵을 삼켰다.
"길 막는 사람 많네."
모라는 대답하지 못했다.
벽 기록석이 다시 붉게 변했다.
[검문 회랑 봉쇄]
[하급 랭커 조장 백도겸 출동]
[비등록 고위험 도전자 임시 동행 계약 요구]
식당 안의 온도가 더 내려간 것처럼 조용해졌다.
현우는 남은 빵을 반으로 접어 품에 넣었다.
"밥값은?"
"증표 처리로 끝났습니다."
"좋네."
그는 접시를 가지런히 밀어 놓고 오른쪽 통로로 걸었다.
검문 회랑은 휴게 구역보다 차가웠다.
바닥에는 은색 선이 겹겹이 박혀 있었다. 선마다 길드 문양이 붙어 있었다. 철왕길드의 망치 문양도 있었고 이름 모를 방패와 창 문양도 있었다. 벽에는 통행 기록판이 줄지어 떠 있었고 회랑 끝에는 16층 문이 보였다.
문 앞에는 열 명이 서 있었다.
그중 가장 앞에 선 남자는 짧은 검은 머리에 회색 갑옷을 입었다. 어깨에는 푸른 인장이 붙어 있었다. 다른 랭커들은 그보다 반걸음 뒤에 섰다. 직접 덤벼들 태세가 아니라 회랑 전체를 잠그는 배치였다.
"강현우."
현우는 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이름 아네."
"나는 15층 길드 검문 회랑 조장 백도겸이다. 네 기록은 하급 랭커 채널 전체에 올라왔다. 검문 절차에 따라 신분 등록과 임시 동행 계약을 요구한다."
"싫은데."
백도겸의 눈썹이 꿈틀했다.
"거절권은 있다. 대신 통행은 보류된다. 계약은 구속이 아니라 안전 보증이다. 네가 지나간 구역마다 기록 문양이 깨지고 있다."
"안전하려고 길 막아?"
"네 안전만 말하는 게 아니다."
백도겸이 손을 들었다.
회랑 양옆의 랭커들이 동시에 인장을 만졌다. 그들의 움직임은 훈련된 것처럼 같았다. 검을 뽑지 않았다. 창도 들지 않았다. 대신 바닥의 은색 선이 하나씩 깨어났다.
[길드 검문 인장 작동]
[비등록 도전자 이동 제한]
[임시 진압진 전개]
공기가 무거워졌다.
보통 도전자라면 무릎부터 꺾였을 것이다. 길드 인장에 등록된 층 통행권과 랭커 권한이 압력처럼 내려앉았다. 회랑 자체가 현우의 발목을 붙잡으려 했다.
현우는 발밑을 보았다.
"이건 또 뭐야."
백도겸이 차갑게 말했다.
"공식 절차다. 저항하면 적대 행위로 기록된다."
"절차가 발목을 잡아?"
"강제로 잡기 전에 멈추라는 뜻이다."
현우는 고개를 조금 기울였다.
마력선의 결이 보였다. 은색 선은 복잡해 보였지만 방향은 단순했다. 가운데를 누르고 양옆에서 조이고 뒤에서 밀어 무릎을 꿇리는 구조.
1층 고블린들이 표식 함정을 파고 도망가던 방식과 닮았다.
나뭇잎으로 덮은 구덩이. 옆에서 던지는 돌멩이. 뒤에서 발목을 거는 막대기. 처음에는 세 번쯤 넘어졌다. 그 뒤로는 밟을 자리와 피할 자리를 외웠다. 만 년이 지나자 피하는 것도 귀찮아서 함정 자체를 망가뜨렸다.
지금도 똑같았다.
"아."
현우가 아주 작게 중얼거렸다.
"밟는 데가 따로 있네."
그는 왼발을 은색 선 하나 위에 올렸다.
딱.
소리가 작았다.
그런데 회랑 전체가 멈췄다.
[진압진 대상자 판정 오류]
[1층 튜토리얼 지급품 우선권 감지]
[인장 소유권 대조 실패]
백도겸의 얼굴에서 여유가 사라졌다.
"압력을 올려."
랭커들의 인장이 더 밝아졌다.
현우는 오른발을 반대쪽 선에 놓았다.
딱.
은색 선이 한 번에 꺾였다. 현우를 향하던 마력 압력이 방향을 잃고 바닥 밑으로 흘렀다. 그리고 다음 순간 각 랭커의 어깨 인장으로 되돌아갔다.
첫 번째 발걸음은 대상자를 지웠다.
두 번째 발걸음은 주인을 바꿨다.
세 번째 발걸음은 필요 없었다.
[인장 진압 방향 역류]
[대상자 강현우]
[임시 판정: 인장 지배]
"무슨..."
백도겸이 말을 끝내지 못했다.
그의 무릎이 바닥에 닿았다.
쿵.
뒤쪽 랭커들도 차례로 무릎을 꿇었다. 누가 누른 것도 아니었다. 그들이 켠 인장이 그들을 회랑 바닥에 붙들었다. 검문 권한으로 만든 압력이 검문권자에게 돌아간 것이다.
휴게 구역 쪽에서 숨을 삼키는 소리가 났다.
철왕길드 감시조 잔류 인원 하나가 기록판을 들었다. 그러나 기록판의 문양은 켜지자마자 비틀렸다.
[근접 기록 실패]
[검문 인장 역류 중]
[외부 기록 동기화 지연]
현우는 무릎 꿇은 백도겸 앞에 멈췄다.
백도겸은 이를 악물고 고개를 들었다. 눈동자에 분노보다 공포가 먼저 떠 있었다.
"네가 뭘 한 거냐."
"밟았는데."
"인장진을 어떻게..."
"표식 함정이잖아. 가운데 밟으면 빠지고 끝 밟으면 안 빠지고."
백도겸은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현우는 이해시킬 생각도 없었다.
그는 백도겸의 옆을 지나갔다. 랭커들은 아무도 손을 뻗지 못했다. 자신들의 인장이 어깨를 누르고 있었다. 억지로 일어나려 할수록 더 깊이 바닥에 붙었다.
현우는 16층 문 앞에 섰다.
문에는 붉은 글자가 떠올랐다.
[16층 입장 조건 확인]
[15층 검문 회랑 통과]
[오류]
[검문 담당자 전원 진압 상태]
[통과 판정 우선 처리]
"복잡하네."
현우는 문을 밀었다.
문은 열렸다.
그 순간 회랑의 기록석들이 동시에 켜졌다.
[긴급 보고]
[15층 하급 랭커 진압진 역류]
[백도겸 조장 및 검문 인원 전원 행동 불가]
[대상자 강현우 16층 진입]
그 아래로 더 깊은 푸른 글자가 떠올랐다.
[아틀라스 길드 확인 요청 단계 상승]
[윤서아 호출]
[현장 접촉 허가 대기]
현우는 보지 못했다.
그는 문틈 너머의 계단을 보고 있었다. 위쪽에서 습한 풀 냄새가 내려왔다. 16층은 숲처럼 어두웠고 멀리서 물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모라가 휴게 구역 입구에서 겨우 숨을 내쉬었다.
아무도 베이지 않았다.
아무도 죽지 않았다.
그런데 열 명의 랭커가 자기 인장에 눌려 무릎 꿇고 있었다.
백도겸의 기록판이 바닥에서 혼자 떨렸다. 푸른 글자가 그의 눈앞에 박혔다.
[윤서아 현장 접촉 허가]
[대상자와 직접 대화하라]
[강제 구속 금지]
백도겸은 이를 악물었다.
"왜 이제야..."
현우는 이미 계단으로 발을 옮겼다.
그는 품에 남은 빵 조각을 꺼내 씹었다.
"위층 밥은 좀 나으려나."
16층 문이 조용히 닫혔다.
회랑에 남은 사람들은 닫힌 문을 한참 바라보았다.
그리고 기록망은 그보다 훨씬 빠르게 위로 달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