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의 1층만 만 년째, 드디어 올라갑니다

10화: 붉은 검과 쓴잎풀
16층 문 너머에서는 풀 냄새가 났다.
습기가 발목에 먼저 감겼다. 계단 끝에는 넓은 숲길이 열려 있었고 검은 나무들이 양옆으로 빽빽하게 서 있었다. 가지마다 가느다란 가시가 돋아 있었다.
잎은 녹색이 아니라 짙은 먹빛이었다.
강현우는 코를 한 번 찡그렸다.
"독풀 냄새네."
입구 기록석이 희미하게 켜졌다.
[16층 흑가시 숲]
[독가시 접촉 주의]
[권장: 해독 물약, 절단 무기, 길잡이 1명]
그 아래에 다른 글자가 겹쳐 떴다.
[아틀라스 현장 접촉 허가]
[대상자: 강현우]
[강제 구속 금지]
현우는 두 번째 문장을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길잡이는 어디서 받는데."
숲 안쪽에서 대답 대신 비명이 터졌다.
나무들이 흔들렸다. 뿌리가 바닥 위로 솟구치며 길을 가로막았다. 새까만 가시들이 서로 엉키자 숲길이 순식간에 닫혔다.
현우는 닫히는 길을 보며 걸었다.
"또 길 막네."
그보다 먼저 숲 안쪽으로 뛰어드는 붉은 그림자가 있었다.
붉은 단발머리. 검은 코트 위에 걸친 은색 견갑. 손에는 얇고 긴 검이 들려 있었다. 여자는 달리는 동안에도 기록판을 확인했다.
[윤서아]
[아틀라스 25층 탐사대장]
[현장 접촉 권한 승인]
윤서아는 이를 악물었다.
"민재 위치."
기록 지원관의 목소리가 끊겨 들렸다.
"전방 80미터입니다. 레나도 같이 묶였습니다. 뿌리잠식자 판정이 원래 범위보다 넓습니다."
"강현우는?"
"16층 입구 진입 확인. 접촉선이 겹칩니다."
윤서아는 검을 낮췄다.
"구조가 먼저다."
그녀의 발밑에서 붉은 검기가 길게 뻗었다.
흑가시 숲 중앙에는 뿌리로 만든 감옥이 있었다.
아틀라스 탐사대원 두 명이 그 안에 묶여 있었다. 남자는 어깨에 가시가 박혀 있었고 여자는 다리 쪽을 뿌리에 잡힌 채 숨을 몰아쉬었다.
기록 지원관 카일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기록판을 붙잡고 있었다. 기록판에는 검은 뿌리 문양이 번지고 있었다.
[16층 변이 개체 감지]
[흑가시 뿌리잠식자]
[피해 분산 판정]
[절단 반응 독성 주입]
윤서아가 검을 휘둘렀다.
붉은 선이 뿌리를 갈랐다. 절단면은 깨끗했다. 하층 도전자라면 평생 한 번 보기 힘든 검격이었다.
하지만 잘린 뿌리 안쪽에서 검은 독액이 터졌다.
"크윽!"
민재의 어깨가 경련했다. 레나의 입술이 파랗게 질렸다.
윤서아의 눈동자가 좁아졌다.
"베면 독이 들어간다?"
카일이 다급히 외쳤다.
"대장님. 뿌리가 피해를 숲으로 돌립니다. 핵을 찾아야 합니다."
"핵 위치는."
"기록판이 오염돼서..."
카일의 말끝이 뚝 끊겼다. 기록판에서 검은 가시가 돋았다. 그는 손을 놓지 못했다. 문양이 손등까지 타고 올라가고 있었다.
윤서아가 발을 박찼다.
그녀의 검은 이번에는 기록판을 향했다. 손을 베지 않고 문양만 끊을 수 있는 각도였다. 정확하고 빨랐다.
그런데 뿌리가 더 빨랐다.
카일의 발밑에서 새로운 뿌리가 솟았다. 윤서아의 검로를 막는 동시에 민재와 레나를 더 깊이 조였다.
윤서아는 검을 멈췄다.
멈추는 것도 실력이었다.
그 순간 현우가 뿌리감옥 앞에 도착했다.
"그렇게 자르면 더 들어가."
윤서아의 검끝이 즉시 현우를 향했다.
"물러서. 감염 구역이다."
"알아."
현우는 민재의 어깨에 박힌 가시를 보았다. 가시 주변 피부가 검게 죽어가고 있었다. 독은 상처 안쪽으로만 퍼지는 게 아니었다. 뿌리와 연결된 판정선이 혈관을 대신해 몸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1층 쓴가시 덩굴도 그랬다.
처음에는 베었다. 베면 뿌리 안쪽에서 독이 터졌다. 독이 터지면 해독풀이 더 필요했다. 몇 백 번쯤 반복한 뒤에야 알았다.
쓴가시 덩굴은 자르는 게 아니라 먼저 먹이를 잃게 만들어야 했다.
현우는 튜토리얼 지급품 주머니를 뒤졌다.
말라비틀어진 잎 세 줄기가 나왔다.
윤서아의 눈썹이 움직였다.
"그건 뭐지?"
"쓴잎풀."
"검증되지 않은 약초를 부상자에게 먹일 수는 없다."
"먹이는 거 아닌데."
현우는 쓴잎풀 하나를 입에 넣고 씹었다. 쓰고 떫은 맛이 혀를 찔렀다. 만 년 동안 질리도록 씹은 맛이었다.
그는 씹은 잎을 손끝에 묻혀 민재의 어깨 상처 주변에 눌렀다.
윤서아의 검끝이 그의 목 앞에서 멈췄다.
"손 떼."
"호흡 막히기 전에 해야 돼."
현우는 검을 보지도 않았다.
민재의 어깨에 박힌 가시가 꿈틀했다. 쓴잎풀 즙이 닿은 부분부터 검은 선이 물러났다. 독성 판정이 상처 안으로 들어가려다가 방향을 잃었다.
[16층 흑가시 독성 주입]
[1층 쓴잎풀 해독 판정 감지]
[층 판정 불일치]
[독성 흡수 실패]
민재가 거칠게 숨을 토했다.
"숨... 쉬어집니다."
윤서아의 검끝이 아주 조금 내려갔다.
현우는 두 번째 잎을 레나의 다리 쪽에 발랐다. 뿌리가 다리를 조이는 힘이 약해졌다. 레나의 눈에 초점이 돌아왔다.
카일의 손등으로 번지던 문양에도 마지막 잎을 문질렀다.
기록판의 검은 가시가 바스러졌다.
카일이 뒤로 주저앉았다.
"오염이 끊겼습니다."
윤서아는 현우를 보았다.
낡은 가죽 아머. 녹슨 단검. 어디까지 봐도 하층 신입의 장비였다. 그런데 방금 그는 16층 변이 독성을 이름 모를 말린 풀로 눌렀다.
마력도 거의 쓰지 않았다.
시전도 없었다.
"넌..."
숲 전체가 흔들렸다.
뿌리감옥 뒤쪽의 검은 나무들이 한꺼번에 갈라졌다. 그 안에서 커다란 뿌리 덩어리가 몸을 일으켰다. 사람 얼굴처럼 패인 구멍들이 줄기마다 열렸고 그 구멍에서 녹색 연기가 새어 나왔다.
[흑가시 뿌리잠식자 본체 출현]
[구조 대상 재포획]
[숲 판정 동기화]
[피해 분산 최대치]
윤서아가 다시 검을 들었다.
"대원들을 뒤로 빼."
"베면 독 터진다니까."
"그럼 막아야지."
윤서아의 붉은 검기가 반원으로 펼쳐졌다. 뿌리들이 덤벼들다 허공에서 잘렸다. 그녀는 분명 강했다. 검은 정확했고 동작에는 군더더기가 없었다.
하지만 뿌리잠식자는 잘린 만큼 더 많은 잔뿌리를 뻗었다.
민재의 어깨와 레나의 다리 쪽으로 다시 검은 선이 다가갔다.
현우는 바닥을 보았다.
부러진 벌목도끼 하나가 흙에 반쯤 묻혀 있었다. 누군가 숲을 공략하다 놓친 장비였다. 날은 무뎠고 손잡이는 금이 가 있었다.
현우가 그것을 집어 들었다.
윤서아가 외쳤다.
"그걸로는 못 벤다!"
"안 베는데."
현우는 도끼를 어깨 위로 올렸다.
1층에서는 나무도 많이 팼다.
보급 불씨가 꺼지지 않게 하려면 젖은 장작과 마른 장작을 가려야 했다. 고블린 목책문을 부술 때도 비슷했다. 단단한 곳을 치면 날만 상했다.
나무가 서 있으려고 힘을 모으는 첫 매듭을 찍어야 했다.
흑가시 뿌리잠식자도 그랬다.
심장처럼 보이는 녹색 핵은 미끼였다. 그곳을 베면 피해가 숲 전체로 퍼지고 독이 구조 대상에게 돌아간다.
진짜 매듭은 본체 아래쪽이었다.
숲 판정과 뿌리잠식자를 붙여두는 뿌리목.
현우는 한 걸음 들어갔다.
뿌리들이 그를 향해 몰려왔다.
윤서아가 막으려 했지만 현우는 이미 뿌리 사이를 지나고 있었다. 발을 둘 곳과 밟지 말아야 할 곳이 전부 보였다. 1층 독풀밭에서 하루에도 수십 번씩 보던 길이었다.
"거기."
현우가 도끼를 내리쳤다.
퍽.
소리는 초라했다.
무딘 도끼가 두꺼운 뿌리를 자를 리 없었다. 실제로도 자르지 못했다.
하지만 도끼날은 뿌리목의 결을 정확히 찍었다.
[숲 판정 연결부 손상]
[피해 분산 경로 상실]
[절단 반응 독성 주입 실패]
뿌리잠식자의 몸이 굳었다.
현우는 같은 자리로 한 번 더 도끼를 찍었다.
퍽.
이번에는 숲이 숨을 멈췄다.
검은 나무들의 잎이 한꺼번에 뒤집혔다. 뿌리감옥이 풀리고 민재와 레나를 붙잡던 줄기들이 힘없이 떨어졌다.
[흑가시 뿌리잠식자 판정 붕괴]
[16층 변이 개체 처치]
[소요 시간 산정 실패]
[17층 이동 조건 충족]
뿌리잠식자는 쓰러지지 않았다.
그냥 숲으로 돌아갔다. 줄기와 가시와 녹색 연기가 재처럼 흩어지고 바닥에는 현우가 찍은 자국 두 개만 남았다.
윤서아는 검을 내리지 못한 채 서 있었다.
그녀가 핵이라고 판단한 곳은 멀쩡했다. 현우가 찍은 곳은 그녀가 지나치려던 밑동이었다. 힘의 차이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결과였다.
카일이 떨리는 목소리로 기록판을 확인했다.
"대장님. 변이 개체 처치 기록이 올라갑니다. 그런데 공격 판정이..."
"말해."
"벌목으로 잡힌 것 같습니다."
현우는 부러진 도끼를 내려다봤다.
"장작 패는 거랑 비슷하네."
윤서아는 짧게 숨을 들이켰다.
이 남자는 15층 랭커들을 무릎 꿇린 괴물이 맞았다. 그런데 방금은 그녀의 대원을 살렸다. 검을 들고 위협해도 화내지 않았고 반격하지도 않았다.
필요한 곳만 보고 필요한 만큼만 움직였다.
그 점이 더 위험했다.
윤서아는 검을 검집에 넣었다.
"윤서아다. 아틀라스 25층 탐사대장."
현우는 고개를 돌렸다.
"아까 기록석에 뜨던 이름이네."
"너와 대화하라는 허가를 받고 내려왔다."
"난 올라가는 중인데."
"알고 있다. 그래서 길을 막지는 않겠다."
현우는 조금 의외라는 듯 윤서아를 봤다.
"안 막아?"
"강제로 막으면 우리 쪽이 손해라는 건 봤다."
윤서아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자존심이 상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는 부상자들의 숨소리를 들었다.
방금 도움을 받은 사람이 먼저 칼을 세우는 건 기사도가 아니었다.
"대신 묻고 싶은 게 있다. 알려줄 것도 있다."
"뭔데."
"위층 길. 길드 검문을 피하는 방법. 휴게소 위치. 네 기록을 보고 움직이는 세력들."
현우의 반응은 마지막보다 앞의 단어에 있었다.
"휴게소."
윤서아의 눈가가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래. 식당도 있다."
현우는 숲 너머 열린 길을 보았다.
17층으로 이어지는 문이 나타나 있었다. 문 위에는 흰 글자가 떠 있었다.
[17층 이동 가능]
그는 잠깐 생각했다.
만 년 동안 혼자였던 사람에게 누가 길을 설명해 주겠다고 한 것은 낯설었다. 길을 막는 사람은 많았지만 길을 알려주겠다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현우는 품에 남은 빵 조각을 꺼냈다가 비어 있는 것을 확인했다.
"식당 위치부터."
윤서아가 처음으로 아주 작게 웃을 뻔했다.
그녀는 웃지 않았다. 대신 부상자들을 향해 손짓했다.
"카일. 민재와 레나를 후송해. 기록은 내가 직접 올린다."
"대장님. 보고 문구는 어떻게..."
윤서아는 현우가 찍은 뿌리목을 보았다.
"강제 구속 금지 유지. 대상자는 구조 행위 확인. 대화 접촉 진행."
기록판에 푸른 문장이 새겨졌다.
[윤서아 현장 보고]
[강현우와 직접 대화 시작]
[아틀라스 협조 제안 준비]
현우는 17층 문 앞에서 윤서아를 기다렸다.
기다린다기보다는 식당 위치를 듣기 위해 멈춘 것에 가까웠다.
윤서아는 그 차이를 알았다.
그래서 더 신중하게 말했다.
"위로 가려면 길보다 먼저 알아야 할 것이 있다."
현우가 눈을 가늘게 떴다.
"식당보다 먼저?"
윤서아는 잠시 침묵했다.
"그건 듣고 판단해라."
17층 문 너머에서 새로운 바람이 불었다.
이번에는 풀 냄새가 아니라 차가운 돌 냄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