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의 1층만 만 년째, 드디어 올라갑니다

8화: 소문보다 밥이 먼저
11층으로 오르는 계단은 조용했다.
10층 보스 방에서 새어 나오던 열기도 여기까지는 따라오지 못했다. 벽에는 푸른 돌이 일정한 간격으로 박혀 있었고 발밑의 흰 선은 위쪽으로 길게 이어졌다.
강현우는 품에서 식권을 꺼냈다.
[10층 휴게소 식권 1매]
글자는 아직 선명했다.
"안 사라지네."
그는 식권을 접어 다시 품에 넣었다. 금화 주머니와 붉은 목걸이는 허리춤에 대충 묶여 있었다. 불 저항 망토는 어깨가 아니라 팔에 걸려 있었다.
"덥게 생겼다니까."
계단 끝에는 넓은 홀이 있었다.
천장 표지판에 11층 휴게소라고 적혀 있었다. 안쪽에는 식당과 정비소와 작은 치료실이 붙어 있었고 관문을 막 통과한 도전자들이 의자에 몸을 묻고 있었다. 몇몇은 방패의 그을음을 닦다가 손을 멈췄다.
현우가 들어서자 말소리가 끊겼다.
벽 기록석이 번쩍였다.
[하층 기록망 인기 제보]
[1층 옷을 입은 백발의 신선]
[10층 관문 보스 단독 처치 기록 첨부]
누군가 들고 있던 컵을 내려놓지 못한 채 굳었다.
현우는 기록석을 보지 않았다.
"밥은 어디서 먹어?"
휴게소 접수대에 앉아 있던 여자가 천천히 손을 들었다. 이름표에는 나미라고 적혀 있었다.
"식권 확인하겠습니다."
현우는 식권을 내밀었다.
나미가 식권을 받자 작은 붉은 문양이 종이 위에 떠올랐다.
[10층 관문 클리어 보상]
[관문 졸업자 전용 식사권]
[대상자: 강현우]
[관문 졸업 증표 확인]
"진짜였네."
"가짜도 있어?"
"가짜는 없습니다. 보통 이걸 들고 오는 분들은 들것에 실려 오거나 파티원에게 업혀 옵니다."
"걸어왔는데."
"그건 보입니다."
나미는 억지로 웃고 식당 쪽을 가리켰다.
"오늘 메뉴는 불향 고기 스튜와 구운 빵입니다. 관문 졸업자 식권이면 추가 고기가 붙습니다."
현우의 눈이 아주 조금 밝아졌다.
"추가."
"네?"
"추가 고기."
식당 안쪽이 급해졌다.
현우는 창가 자리에 앉았다. 주변 자리는 자연스럽게 비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식탁 세 개 정도의 거리가 생겼다.
그릇이 나왔다.
붉은 국물 안에 큼직한 고기와 감자가 들어 있었다. 빵은 겉이 딱딱했고 속은 따뜻했다. 현우는 숟가락으로 국물을 떠서 맛보았다.
맵고 짰다.
그리고 좋았다.
"2층보다 낫네."
나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2층도 드셔보셨어요?"
"아까."
"아까요?"
현우는 대답 대신 고기를 씹었다.
만 년 동안 같은 수프만 먹으면 입이 먼저 지친다. 소금 한 알이 바뀌어도 알 수 있었다. 여기 스튜는 간이 조금 세고 고기는 오래 끓여 부드러웠다.
합격이었다.
그때 기록석이 다시 깜빡였다.
[철왕길드 하층 감시조 접근]
[대상 보상 장비 확인 요청]
[관리국 지시: 강제 정지 금지. 추적 기록 우선]
휴게소 문이 열렸다.
철왕길드 인장을 단 도전자 셋이 들어왔다. 그들은 류태건처럼 위압을 대놓고 뿌리지는 않았다. 대신 기록판을 들고 식당 가장자리에서 현우를 촬영하듯 바라봤다.
나미의 얼굴이 굳었다.
"휴게소 내부에서 무단 기록은 제한됩니다."
감시조장이 낮게 말했다.
"상층 길드망 요청이다. 보상 장비 확인만 한다."
"식사 중입니다."
"방해하지 않겠다."
말과 달리 기록판의 렌즈 문양이 현우의 식탁으로 향했다. 불 저항 망토와 붉은 목걸이와 녹슨 단검을 훑는 선이 생겼다.
현우는 빵을 뜯다가 멈췄다.
식탁 다리가 아주 미세하게 떨렸다. 기록 문양이 장비 목록을 당겨 읽으려 하며 마력선을 식탁 밑까지 끌어온 탓이었다. 스튜 표면에 작은 물결이 생겼다.
현우의 표정이 가라앉았다.
"밥 흔들리는데."
감시조장이 말을 고르기도 전에 현우가 손가락으로 식탁을 눌렀다.
딱.
기록판 렌즈가 모두 꺼졌다.
[근접 기록 문양 손상]
[대상자 판정 간섭]
[장비 목록 동기화 실패]
감시조원 하나가 뒤로 물러났다.
"기록만 했습니다."
"그래서 밥이 흔들렸잖아."
현우는 스튜를 다시 떠먹었다.
"멀리서 해."
감시조는 더 다가오지 못했다.
식당 안의 도전자들은 숨을 죽였다. 나미는 기록석을 끄려 했지만 새 문장이 이미 올라가고 있었다.
[제보 갱신]
[백발의 신선은 식사 중 접근 금지]
현우는 그 문장을 보지 못했다.
그는 그릇을 비웠다.
"한 그릇 더는?"
나미가 식권 기록을 확인했다.
"추가 고기는 한 번인데 스튜 리필은 관문 졸업자 혜택으로 가능합니다."
"좋네."
두 번째 그릇까지 비운 뒤 현우는 일어났다.
휴게소 문밖에는 12층 방향 계단이 있었다. 감시조는 길을 막지 않았다. 대신 기록판을 꺼진 채 품에 안고 따라붙을 거리를 계산했다.
현우는 계단 앞에서 돌아봤다.
"밥값은 끝난 거지?"
나미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식권 처리됐습니다."
"그럼 간다."
현우는 12층으로 올라갔다.
소문은 그보다 빨랐다.
12층 바람다리는 절벽 위에 놓인 얇은 돌다리였다. 양옆에서 바람이 칼처럼 불어 도전자들의 발목을 밀었다. 다리 밑에는 구름이 깊게 깔려 있었다.
입구 기록석에는 경고가 떠 있었다.
[12층 바람다리]
[낙하 판정 주의]
[균형 보조 장비 권장]
현우는 다리에 발을 올렸다.
바람이 발목을 잡아 옆으로 밀었다. 결은 단순했다. 1층 고블린이 뒤에서 밀치는 장난과 비슷했다. 타이밍만 맞추면 오히려 앞으로 가는 힘이 됐다.
현우는 바람의 첫 결을 밟았다.
다리 위 공기가 멈칫했다.
그는 그대로 걸었다.
[12층 바람다리 통과]
[낙하 판정 미발생]
13층은 독안개 미로였다.
녹색 안개가 벽처럼 쌓여 있었고 길은 계속 바뀌었다. 도전자들은 안개 흐름을 읽는 약초를 태우며 기다리고 있었다.
현우는 코를 찡그렸다.
"밥 먹고 바로 맡을 냄새는 아닌데."
그는 안개가 나오는 구멍을 보았다. 숨는 방향과 나오는 방향이 달랐다. 1층 독버섯 군락도 그랬다. 독은 늘 바람을 탄 척하면서 실제로는 발밑 습기를 따라 움직였다.
현우는 발뒤꿈치로 바닥을 한 번 눌렀다.
안개가 길 양옆으로 갈라졌다.
[13층 독안개 미로 흐름 역전]
[독성 누적 0]
14층은 철갑 벌레 둥지였다.
사람만 한 벌레들이 검은 껍질을 세우고 통로를 막았다. 껍질 위에는 절단 저항 문양이 반짝였다.
현우는 녹슨 단검을 뽑았다.
"껍질이 문제면 껍질 안쪽을 자르면 되지."
기본 베기.
칼날은 벌레의 껍질을 때리지 않았다. 껍질을 세우는 마력 힘줄을 먼저 끊었다. 벌레들의 갑각이 한꺼번에 접히며 통로가 열렸다.
[14층 철갑 벌레 둥지 방어 판정 해제]
[통로 개방]
계단 끝에는 15층 입구가 있었다.
이번에는 사람들이 먼저 기다리고 있었다.
장비가 달랐다. 8층에서 봤던 견습 랭커들보다 숨이 안정돼 있었고 눈빛도 날카로웠다. 그들은 서로 다른 길드 인장을 달고 있었지만 같은 원을 만들고 서 있었다.
가장 앞의 남자가 검집 끝으로 바닥을 두드렸다.
"강현우."
현우는 걸음을 멈췄다.
"또 길 막네."
"서가온이다. 15층 검문 회랑 담당 견습 랭커."
"담당이면 문 열어."
서가온의 눈가가 꿈틀했다.
"네가 정말 10층 관문을 무너뜨렸는지 확인해야 한다. 소문이 너무 커졌다."
"소문은 내가 안 냈는데."
"상층 길드망에는 이미 네 기록이 올라갔다. 철왕길드만 움직이는 게 아니다. 아틀라스에서도 확인 요청이 내려왔다."
현우는 낯선 이름을 흘려들었다.
"그래서."
"기세만 받는다. 버티면 보내주지."
서가온이 손을 들었다.
견습 랭커 셋이 동시에 발을 옮겼다. 바닥에 삼각형 문양이 떠올랐다. 검압과 마력 압박과 시야 흔들림이 따로 움직이며 현우를 중앙에 묶으려 했다.
[15층 검문 회랑]
[삼중 압박진 전개]
[비정상 도전자 반응 확인]
현우는 문양을 내려다봤다.
고블린 셋이 둘러싸는 방식이었다.
하나는 눈을 끌고 하나는 발을 묶고 하나는 뒤에서 찌른다. 1층에서는 너무 많이 당해서 나중에는 고블린이 숨만 쉬어도 순서를 알 수 있었다.
"층 올라가도 하는 짓은 비슷하네."
현우가 한 걸음 앞으로 나갔다.
첫 호흡이 밟혔다.
삼각형 문양의 한 꼭짓점이 꺼졌다. 검압은 방향을 잃었고 마력 압박은 자기들끼리 부딪혔다. 시야 흔들림은 현우가 아니라 서가온 쪽으로 되돌아갔다.
서가온의 무릎이 흔들렸다.
"멈춰!"
늦었다.
현우는 두 번째 걸음을 내디뎠다.
삼중 압박진이 조용히 접혔다.
[압박진 반응 확인 실패]
[대상자 이동 제한 불가]
[견습 랭커 채널 보고 대기]
현우는 서가온 옆을 지나갔다.
"길 막는 것도 층 올라가면 좀 나아질 줄 알았는데."
서가온은 대답하지 못했다.
현우의 등이 15층 안쪽으로 사라질 때쯤 그의 기록판이 스스로 켜졌다.
[직접 확인 보고]
[강현우]
[10층 관문 기록 사실 가능성 높음]
[삼중 압박진 무력화]
[아틀라스 확인 요청 갱신]
기록판 아래에 새로운 알림이 작게 떠올랐다.
[윤서아 호출]
현우는 그 이름을 보지 못했다.
그는 15층 안쪽에서 다음 표지판을 읽고 있었다.
[15층 휴게 구역까지 2.4km]
현우는 품에 남은 빵 조각을 꺼냈다.
"휴게소가 또 있네."
그는 빵을 씹으며 걸었다.
소문은 여전히 그보다 빨랐지만 배를 채우는 일보다는 중요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