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의 1층만 만 년째, 드디어 올라갑니다

4화: 측정 불가
수정구에 금이 갔다.
처음에는 머리카락처럼 가느다란 선이었다. 그 선이 중심에서 바깥으로 뻗더니 순식간에 수정구 전체를 뒤덮었다. 안쪽에서 돌던 흰 숫자들은 붉게 뒤집혔고 곧 검은 얼룩처럼 번졌다.
박하린의 손이 기록판 위에서 멈췄다.
[측정 시작]
[대상자 수치 검색 중]
[검색 범위 초과]
[전투 기록 동기화 중]
[동기화 실패]
강현우는 손바닥 밑에서 떨리는 수정구를 내려다봤다.
"떼면 되나?"
"잠깐만요. 아니요. 떼세요."
박하린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흔들렸다. 그녀는 바로 기록판을 두드렸다. 판 위에 뜬 문양도 미친 듯이 깜빡였고 같은 경고만 반복했다.
측정실 유리벽 바깥에 있던 신입들이 하나둘 고개를 내밀었다. 방금까지 현우의 낡은 장비를 보고 수군대던 사람들은 이제 입을 다물었다. 조민혁은 구겨진 방패를 든 채 뒤로 두 걸음 물러났고 이성진은 문 앞에 붙어 섰다.
"강현우 님. 괜찮으십니까?"
"나보다 이게 안 괜찮아 보이는데."
현우는 진심으로 난감한 얼굴을 했다.
"이거 비싼 거냐?"
박하린이 이를 악물었다.
"관리국 인증품입니다."
"그럼 비싼 거네."
현우가 손을 떼려는 순간 수정구 안쪽에서 마력의 실이 튀어나왔다. 실은 그의 손목을 감고 손바닥을 붙잡았다. 붙잡는 힘은 약했다. 문제는 그 다음에 뜬 문장이었다.
[비정상 누적자 감지]
[상층 관리 규칙과 충돌 가능성 확인]
[격리 절차 권장]
현우의 눈빛이 식었다.
"격리?"
그 말 하나에 측정실 공기가 낮게 가라앉았다.
박하린이 즉시 뒤로 물러났다.
"전원 측정실에서 떨어져요! 경비대 호출!"
등록소 마당에 짧은 종소리가 울렸다. 목책 근처에 서 있던 경비 도전자 둘이 뛰어왔고 신입들은 서로 밀치며 유리벽에서 멀어졌다.
측정실 바닥의 문양이 켜졌다. 푸른 선들이 현우의 발밑에서 원을 만들었다. 원 안에서 사슬 모양의 빛이 솟아오르며 발목을 감싸려 했다.
이성진이 문을 잡고 외쳤다.
"잠깐만요! 이분은 등록소 사람들을 구했습니다!"
"물러나요. 격리 문양은 접촉하면 같이 묶입니다."
박하린의 말은 빠르고 딱딱했다. 하지만 시선은 현우의 손목과 바닥을 놓치지 않았다. 접수원이라기보다 사고 현장에서 피해를 줄이려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사슬이 현우의 발목에 닿았다.
보통 도전자라면 그 자리에서 마력 순환이 잠겼을 것이다. 몸이 굳고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못했을 것이다.
현우는 발밑의 선을 보았다.
원은 복잡해 보였지만 결은 낯익었다. 밟는 순간 발목을 묶고 중심을 빼앗는 방식. 1층 늪지 함정이 처음 도전자를 넘어뜨릴 때 쓰던 판정과 닮아 있었다.
만 년 동안 그에게 같은 함정은 함정이 아니었다.
현우는 발끝으로 선 하나를 눌렀다.
딱.
소리는 작았다.
측정실 바닥 전체가 어긋났다. 원을 이루던 푸른 선이 한 박자 늦게 흔들리더니 사슬 모양의 빛이 허공에서 풀렸다. 붙잡을 대상을 잃은 문양은 스스로 꼬여 바닥으로 꺼졌다.
[격리 문양 작동 실패]
[대상자의 1층 판정 우선권과 충돌]
[비상 보고 전송]
박하린의 얼굴이 굳었다.
"격리 문양까지 실패했다고?"
현우는 손목에 붙은 마력 실을 손가락으로 집었다. 실은 버티려 했다. 버티는 방향도 뻔했다. 그는 손가락을 살짝 비틀었다.
마력 실이 끊겼다.
수정구가 비명을 내듯 울었다. 금 간 표면에서 빛가루가 떨어졌다.
"남 묶는 건 조심해야지."
현우의 목소리는 낮았다.
"특히 갇혀 있던 사람한테는."
아무도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천장에 푸른 사각형이 열렸다. 빛이 얇게 접히며 남자의 얼굴을 만들었다. 단정한 제복을 입은 삼십대 초반쯤의 남자였다. 눈 밑에는 피로가 짙었고 손에는 기록판을 들고 있었다.
"2층 회색갈기 등록소. 비상 보고 수신했다. 파견 기록관 한도윤이다."
박하린이 곧장 자세를 바로 했다.
"접수원 박하린입니다. 대상자는 강현우. 정상 신입으로 표시되지만 보스 단독 처치와 측정 한계 초과가 동시에 발생했습니다."
"격리 문양 실패 보고도 확인했다."
한도윤의 시선이 현우에게 향했다.
"강현우 씨. 현재 귀하는 이동 제한 심사 대상입니다."
"싫은데."
현우의 대답은 빨랐다.
한도윤이 눈썹을 아주 조금 움직였다.
"아직 명령이 아니라 절차 안내입니다."
"절차가 결국 못 나가게 하는 말이면 싫은 건 똑같지."
측정실 바깥의 신입들이 숨을 죽였다. 경비대는 창을 잡고 있었지만 누구도 먼저 겨누지 않았다. 방금 격리 문양이 실패하는 것을 본 뒤였다.
박하린이 빠르게 끼어들었다.
"대상자는 등록소에서 제어 이탈한 훈련용 마수를 제압했습니다. 부상자를 보호했고 시설 피해를 줄였습니다. 숲 초입에서 검은등 늑대를 처치해 신입 파티 생존에도 기여했습니다."
이성진이 고개를 세게 끄덕였다.
"맞습니다. 저희는 그분이 없었으면 전멸했습니다."
조민혁은 입술을 달싹이다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바닥에 떨어진 자신의 검을 슬쩍 발로 끌어당길 뿐이었다.
한도윤은 기록판을 넘겼다.
"기록망에는 검은등 늑대 처치가 올라왔습니다. 소요 시간 3초. 처치자 장비는 튜토리얼 지급품. 등급 판정 불가. 이어서 철가죽 멧돼지 제압 기록도 판정 불가."
그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이걸 정상 기록으로 넣으면 제 기록관 인생이 끝납니다."
현우는 조용히 듣다가 물었다.
"그럼 밥은?"
한도윤이 처음으로 대답을 잃었다.
"뭐라고 했습니까?"
"식권 준다며."
박하린이 눈을 감았다가 떴다.
"측정 후에 발급한다고 했습니다."
"측정은 했잖아. 기계가 못 버틴 거지."
틀린 말은 아니었다.
등록소 마당의 긴장이 이상하게 비틀렸다. 누군가 헛기침을 했고 신입 하나가 웃음을 참다가 옆 사람에게 팔꿈치를 맞았다.
한도윤은 이마를 짚었다.
"강현우 씨. 본인이 어떤 상황인지 이해하고 있습니까?"
"대충."
"대충이라면."
"너희는 날 묶고 싶어 하고 나는 밥 먹고 위로 가고 싶어 하지."
한도윤은 기록판을 내려다봤다. 강제 격리는 실패했다. 현장 접수원은 대상자가 등록소 피해를 줄였다고 보고했다. 경비대 전력으로 제압할 수 있는지도 불명확했다.
그는 현실적인 결론을 골랐다.
"임시 예외 심사를 진행하겠습니다. 간단한 위협 반응 검증 뒤 통행증과 식권을 발급합니다. 대신 3층 이동 전 관리국 재심사를 받아야 합니다."
"검증은 또 뭔데."
"관리국 장치에 대한 반응을 봅니다. 공격성이 높으면 이동 제한 사유가 됩니다."
"먼저 공격해놓고 내가 반응하면 내 공격성인 거냐?"
"그래서 훈련 장치가 나갑니다. 사람은 나가지 않습니다."
측정실 옆문이 열렸다.
갑각 인형 하나가 걸어 나왔다. 사람보다 조금 큰 몸에 둥근 방패와 짧은 창이 달려 있었다. 가슴 중앙에는 푸른 핵이 박혀 있었고 핵 주위로 작은 판정 선들이 톱니처럼 돌아갔다.
[관리국 훈련 장치 작동]
[대상자의 위협 반응을 측정합니다]
[안전 출력 제한 적용]
인형이 창을 들었다.
현우는 창끝을 보지 않았다. 가슴의 핵을 보았다. 핵 안쪽에서 첫 동작을 결정하는 선이 돌아가고 있었다. 1층 화살 함정의 발동선보다 조금 더 촘촘했다.
그래도 선은 선이었다.
"이거 부수면 또 물어내냐?"
한도윤의 목소리가 딱딱해졌다.
"부수지 않는 선에서 대응하십시오."
"그게 더 어렵다."
인형이 찔러왔다. 느린 찌르기였다. 신입의 반응과 방어 습관을 재는 속도였다. 현우는 피하지 않았다.
그는 손가락 하나를 들어 핵 옆면을 톡 눌렀다.
딱.
인형이 멈췄다.
들고 있던 창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가슴의 핵은 깨지지 않았다. 대신 안쪽 판정 선이 가지런히 접혀 있었다. 장치가 스스로 대기 상태로 돌아간 것처럼 조용했다.
[훈련 장치 제압]
[핵 판정 정지]
[공격성 수치 산정 실패]
[검증 결과: 측정 불가]
한도윤은 기록판을 내려다봤다.
"왜 전부 측정 불가지."
"네 장치가 약해서."
현우가 담담하게 말했다.
박하린은 더 이상 놀라지 않으려는 얼굴로 접수대 서랍을 열었다. 붉은 금속 조각 하나와 얇은 종이 식권이 나왔다. 그녀는 먼저 통행증을 내밀었다.
"강현우 씨. 임시 예외 통행증입니다. 회색갈기 숲 붉은 이정표 구간까지 이동 가능합니다. 3층 문 앞에서는 반드시 관리국 재심사를 받아야 합니다."
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통행증 옆의 식권을 더 신중하게 받았다. 손가락 사이에 끼워 빛에 비춰보기까지 했다.
"이건 바로 쓰는 거지?"
"예. 등록소 식당에서 사용 가능합니다."
"좋네."
그 한마디에 이성진의 어깨에서 힘이 빠졌다. 박하린도 아주 작게 숨을 내쉬었다. 조민혁은 현우와 눈이 마주치자 급히 고개를 돌렸다.
현우가 측정실 밖으로 나오자 신입들이 길을 갈랐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었다. 낡은 가죽 아머와 녹슨 단검을 본 시선이 이제는 전혀 다르게 움직였다.
이성진이 따라붙었다.
"식당 위치를 안내하겠습니다."
"냄새 따라가면 돼."
"그래도 안내하겠습니다."
"마음대로 해."
현우는 식권을 접어 품 안에 넣었다. 통행증은 그 뒤에 대충 꽂았다. 만 년 만에 얻은 제대로 된 한 끼가 손안에 있었다.
천장에 떠 있던 한도윤의 투영은 아직 꺼지지 않았다.
그는 현우의 뒷모습을 보며 기록판에 새 분류를 입력했다.
[대상자: 강현우]
[분류: 측정 불가 신입]
[상층 기록망 긴급 공유]
[주의: 강제 격리 절차 실패]
등록소 위 허공에서 보이지 않는 기록망이 열렸다. 비상 알림 하나가 2층을 넘어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갔다.
현우는 그 창을 보지 못했다.
그에게는 지금 식당 문이 더 중요했다.
문틈으로 구운 고기 냄새가 흘러나왔다.
현우가 아주 작게 웃었다.
"드디어 사람 밥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