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의 1층만 만 년째, 드디어 올라갑니다

22화: 수취인 없는 편지는 발을 묶는다
24층 하부 봉인 우편로는 좁았다.
강현우는 어두운 통로에 발을 들이자마자 벽에서 젖은 풀 냄새를 맡았다. 돌벽 냄새가 아니었다. 오래 붙어 있다가 떨어진 봉투 안쪽 냄새였다.
바닥에는 얇은 선들이 겹겹이 깔려 있었다.
발자국을 따라가는 길이 아니었다. 편지가 지나간 자리였다. 종이 모서리가 긁고 간 듯한 흠집들이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빛났다.
다서연이 기록판을 들었다.
[24층 하부 봉인 우편로]
[무명 우편함 연결 경로]
[수취인 확인 대기]
뒤쪽의 무소속 생존 통과자들이 조심스럽게 따라 들어왔다. 17번 소년은 맨발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24번 노인은 물주머니를 품에 안고 숨을 골랐다.
통로 양쪽 벽이 동시에 열렸다.
열린 것은 문이 아니었다. 벽 안쪽에 붙어 있던 봉투들이었다. 젖은 봉투 입구들이 조금씩 벌어지고 검은 글자가 안쪽에서 떠올랐다.
[미배달 우편물 분류 시작]
[수취인명 확인]
[이름 일부 접촉 기록 재사용]
곧이어 익숙한 글자가 번졌다.
[강현...]
현우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너희는 지겹지도 않냐."
다서연의 표정이 굳었다.
"발신지를 찾는 길이라기보다 답장을 배달하기 위한 분류 통로에 가깝습니다. 통행자를 우편물처럼 읽고 있습니다."
"사람을 봉투로 본다고?"
"수취인 기록이 없으면 미배달로 보관할 수 있습니다."
벽의 봉투들이 동시에 바스락거렸다. 그 소리는 누군가의 이름을 쓰기 위해 종이를 말리는 소리 같았다.
[수취인 불명]
[반송 사유 검색]
[대체 표기 후보: 임시 번호]
뒤쪽에서 누군가 숨을 삼켰다.
17번 소년의 번호가 가장 먼저 떠올랐다. 벽의 봉투 하나가 길게 늘어나 소년의 발목 근처까지 내려왔다. 봉투 겉면에는 숫자 17이 젖은 먹처럼 번졌다.
[17번 수취인 불명]
[반송 대기 봉투 배정]
소년의 맨발 아래 선이 접히기 시작했다. 조금 전까지 앞을 향하던 발자국이 봉투 안쪽으로 빨려 들어갔다.
현우가 소년 앞에 섰다.
"또 너냐."
소년은 입술을 깨물었다.
"제가 번호를 넣으면..."
"넣지 마."
"하지만 길이 막히면..."
"네가 우편물이냐?"
소년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 말 대신 소년은 자기 발을 내려다봤다. 맨발에는 아직 계단의 젖은 자국이 남아 있었다. 벽은 그것조차 배송 실패의 얼룩처럼 읽으려 했다.
위율의 붉은 기록판이 켜졌다.
"적요길드 수령 보증을 붙이면 반송 대기 상태를 잠시 멈출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는 말을 끝까지 잇지 않았다. 스스로 기록판을 내렸다.
"아니다. 길드 보증을 붙이면 미배달 보관물이 길드 소유 보관물로 바뀔 수 있다. 적요길드는 이 통로의 수령 보증을 주장하지 않는다."
붉은 빛이 꺼졌다.
현우가 짧게 웃었다.
"이제 좀 배우네."
벽은 다른 대상을 찾았다. 24번 노인의 봉투가 벌어졌다.
[24번 배달 지연]
[미배달 보관물 전환]
노인은 물주머니를 꼭 쥐었다.
"나는 느려서 그런가 보네."
"느린 사람한테 편지 딱지 붙이는 쪽이 이상한 거야."
현우는 주머니에서 1층 보급 대기표를 꺼냈다. 금속 조각은 닳고 휘어 있었다. 그래도 안쪽의 판정은 아직 죽지 않았다.
[1층 보급 대기표]
[수령 의사 확인]
[발자국 대체 가능]
우편로가 즉시 거절했다.
[부적합]
[우편 수취에는 수취인명이 필요합니다]
"받을 사람이 앞에 서 있는데 이름표부터 찾는 꼴이네."
현우는 거의 빈 물주머니를 눌렀다.
물은 나오지 않았다. 주둥이에 남아 있던 한 방울이 떨어져 바닥의 종이 흠집 위에 번졌다. 물방울은 봉투 쪽으로 빨려 들어가지 않았다. 오히려 발자국 모양으로 길게 퍼졌다.
다서연이 기록판을 읽었다.
[생존 보급 처리 완료 흔적]
[수령 의사 잔류]
[수취 대상 현장 존재]
우편로의 봉투들이 흔들렸다.
[수취인명 없음]
[배달 완료 불가]
"이름 없어도 밥은 받았지."
현우는 대기표를 17번 소년의 발밑에 밀어 넣었다.
"네 번호 말고 네 발."
소년은 고개를 들었다.
"앞으로 가겠습니다."
그 말에 발자국 모양 물기가 조금 더 밝아졌다. 봉투가 소년의 발목을 삼키려는 순간 현우가 녹슨 단검을 뽑았다.
[기본 찢기]
[반송 대기 봉투 겉면 첫 매듭 접촉]
찍.
봉투 겉면의 17이라는 숫자가 찢어졌다. 숫자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소년의 발밑으로 떨어져 발자국 옆에 붙었다. 봉투 안쪽으로 끌려가던 선도 멈췄다.
[17번 현장 대기 확인]
[미배달 보관물 분류 취소]
[반송 사유 미성립]
소년의 어깨가 풀렸다.
현우는 바로 24번 노인의 봉투로 발을 옮겼다.
"할아버지."
"듣고 있네."
"받을 거 있으면 직접 받는다고 말해."
노인은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
"내 발로 받겠네."
현우의 단검이 봉투 겉면의 빈칸을 찢었다.
[기본 찢기]
[수취인 빈칸 첫 매듭 절단]
24번 봉투가 젖은 소리를 내며 접혔다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24번 현장 대기 확인]
[배달 지연 보관 취소]
그 뒤로도 봉투들은 차례로 벌어졌다.
8번은 다친 팔 때문에 미배달로 분류됐다. 13번은 뒤처졌다는 이유로 보관물 판정을 받았다. 31번은 발자국이 흐리다는 이유로 봉투 안쪽에 번호를 쓰려 했다.
현우는 하나씩 찢었다.
큰 동작은 없었다. 봉투 겉면과 통로 바닥이 처음 붙는 자리만 찾으면 됐다. 우편로는 그것을 봉인선이라고 불렀고 현우에게는 오래된 보급 신청서 모서리처럼 보였다.
다서연은 수령 의사와 생존 보급 흔적을 읽었다. 위율은 길드 보증을 붙이지 않겠다고 반복해 선언했다.
통로는 점점 시끄러워졌다. 젖은 봉투가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벽은 누군가라도 봉투 안에 넣으려 했지만 발자국들은 하나씩 바닥으로 돌아왔다.
맨 앞에 섰던 1번 여자가 뒤쪽을 돌아봤다.
그녀의 번호는 이미 현장 대기로 확인되어 있었다. 그래도 그녀는 혼자 앞으로 가지 않았다. 뒤처진 사람의 발자국이 봉투 밖으로 돌아올 때마다 한 걸음씩만 움직였다.
우편로는 그 움직임도 싫어했다.
[선행 수취 대상 대기]
[배달 효율 저하]
여자가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기다리겠습니다."
현우가 그녀를 흘끗 보았다.
"잘하네."
그 짧은 말에 뒤쪽 사람들이 하나둘 발을 맞췄다. 빠른 사람은 느린 사람 옆에 섰고 다친 사람은 자기 발이 닿는 만큼만 앞으로 밀었다. 우편로가 찾던 반송 사유가 조금씩 사라졌다.
마지막 통과자의 봉투가 찢어지자 우편로 전체에 글자가 번졌다.
[임시 번호 소지자 37명 현장 대기 확인]
[미배달 보관물 분류 취소]
[수취인명 미기재 상태 유지]
[접힘 거부 생존 통행 효력 일부 연장]
봉투들이 한꺼번에 입을 다물었다.
닫히는 소리는 항복처럼 들렸다. 종이가 사람을 삼키려다 오히려 자기 입을 접는 소리였다.
현우가 단검을 털었다.
"이제 배달 끝?"
대답은 통로 안쪽에서 왔다.
쿵.
젖은 봉투 더미가 양쪽으로 밀려나고 검은 문이 드러났다. 문 한가운데에는 봉랍처럼 굳은 검은 덩어리가 붙어 있었다. 그 위에 글자가 떠올랐다.
[24층 봉인 우편 검문문]
[수취인 현장 대기 확인]
[반송 불가 서약 원본 필요]
다서연이 숨을 삼켰다.
"반송 불가 서약 원본..."
"그게 뭔데."
"무명 서약문이 하위 서약이라면 원본이 따로 있다는 뜻입니다. 이름 없는 사람들을 반송도 못 하게 묶는 근거일 수 있습니다."
검은 문은 다시 글자를 띄웠다.
[원본 미제출 시]
[수취인 후보 강현... 임시 도착 처리]
현우의 눈이 가늘어졌다.
"결국 또 내 이름이네."
문 위의 봉랍이 천천히 녹았다. 녹은 검은 물은 아래로 흐르지 않았다. 글자가 되려고 꿈틀거렸다. 첫 획은 강현우의 이름을 따라가려 했다.
현우가 검은 봉랍 앞으로 다가갔다.
다서연이 급히 말했다.
"문을 전부 부수면 원본 위치가 닫힐 수 있습니다."
"안 부순다니까."
현우는 녹슨 단검 끝을 봉랍 가장자리에 댔다.
"딱 문틈만 낼 거야."
검은 봉랍은 단단했다. 하지만 봉인이 문과 처음 붙은 가장 얇은 선은 있었다. 현우에게는 그런 선이 너무 잘 보였다.
[기본 찢기]
[봉인선 첫 매듭 접촉]
찍.
문 전체가 흔들렸다. 검은 봉랍이 반쯤 갈라지고 안쪽에서 차가운 바람이 새어 나왔다.
[반송 불가 서약 원본 경로 일부 노출]
[원본 보관자 호출]
[수취인 강현... 임시 도착]
문틈 너머에서 젖은 손 하나가 나왔다.
손은 사람 손처럼 보였지만 손가락 사이에 봉투 접힌 자국이 있었다. 손끝은 바닥에 닿지 않았다. 대신 공중에 검은 글자를 쓰려 했다.
강.
첫 글자가 완성되기 전에 현우가 단검을 들어 올렸다.
"다음 글자 쓰면 손부터 찢는다."
젖은 손이 멈췄다.
문틈 안쪽에서 누군가 종이를 삼키는 소리가 났다.
다서연의 기록판이 늦게 떨렸다.
[원본 보관자 응답 보류]
[수취인명 작성 중단]
[24층 내부 검문 대기]
현우는 열린 문틈 너머를 보았다.
어둠 속에는 길이 있었다. 봉투 더미 아래로 눌린 길이었다. 그 길 끝에서 아주 낮은 종소리가 한 번 울렸다.
"좋아."
현우가 단검을 내리지 않은 채 말했다.
"이번엔 우편함 주인 얼굴 좀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