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의 1층만 만 년째, 드디어 올라갑니다

21화: 접힌 종이는 길을 숨긴다
23층 본 구역은 천장이 낮았다.
강현우는 통로에 들어서자마자 그 낮음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머리를 직접 누르는 높이는 아니었다. 그런데도 지나가는 사람에게 고개를 숙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벽에는 네모난 자국들이 줄지어 있었다.
본래 숫자가 붙어 있던 자리 같았다. 누군가 젖은 손바닥으로 문지르고 또 문질러 숫자만 지운 듯 네모 안쪽이 희게 닳아 있었다.
멀리서 종이를 접는 소리가 났다.
착.
잠깐 조용해졌다가 다시 착.
신발 한 짝 없는 소년이 어깨를 움츠렸다. 그는 빵을 먹었고 자기 번호도 지켰다. 그래도 얼굴에는 아직 줄에서 버려질 것 같은 표정이 남아 있었다.
"저 소리..."
"무섭냐?"
소년은 대답하지 못했다.
다서연이 기록판을 들었다.
[23층 본 구역]
[임시 번호 소지자 통행 확인]
[24층 방향 재확인]
[발신지 응답 대기]
글자가 끝나기도 전에 벽의 네모 자국들이 하나씩 젖었다.
물이 스며드는 게 아니었다. 종이가 벽 안쪽에서 불어나는 것처럼 희게 들떴다.
[응답 수신 준비]
[임시 번호 배정지 재정렬]
[보행 지연 대상 별도 접힘]
강현우가 눈을 가늘게 떴다.
"접힘?"
네모 자국 하나가 벽에서 반쯤 떨어져 나왔다. 얇은 종이였다. 종이 위에 숫자 17이 번졌다.
소년의 빈 이름표가 딸깍거렸다.
[17번 보행 지연]
[벽측 대기칸 배정]
소년의 맨발 아래 그림자가 접혔다.
발자국이 앞으로 이어지는 대신 옆 벽으로 꺾였다. 소년의 몸도 그 방향으로 조금 기울었다.
현우가 소년의 어깨를 잡았다.
"넌 또 왜 접히냐."
소년이 이를 악물었다.
"저는... 걷겠습니다."
목은 막히지 않았다.
하지만 벽은 그의 말을 사람 말로 듣지 않았다. 종이 표식은 소년의 발자국을 얇게 접어 벽 안으로 넣으려 했다.
다서연이 빠르게 말했다.
"이름을 묶는 절차가 아닙니다. 이동 의사를 접어 보관하는 방식입니다. 통행이 느리거나 불완전한 대상을 벽측 대기칸에 접어 넣는 구조로 보입니다."
위율의 붉은 기록판이 켜졌다.
"적요길드 호송 보조 기록을 붙이면..."
"하지 마."
현우는 소년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호송 붙이면 저 종이가 누구 거라고 우길지 뻔하잖아."
위율은 이를 악물고 기록판을 접었다.
벽에서는 다른 종이들도 떨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1번 여자는 앞서 있었기에 통과로 표시됐다. 하지만 24번 노인의 번호에는 젖은 얼룩이 먼저 번졌다.
[24번 이동 속도 미달]
[벽측 대기칸 배정]
노인의 손에 있던 물주머니가 떨렸다.
현우는 한숨을 쉬었다.
"숫자로 세더니 이제 종이로 접네."
그는 주머니에서 1층 보급 대기표를 꺼냈다. 금속 조각은 많이 닳아 있었다. 그래도 글자는 남아 있었다.
[1층 보급 대기표]
[수령 의사 확인]
[발자국 대체 가능]
현우는 그것을 벽의 17번 종이 아래에 댔다.
벽은 곧바로 거절했다.
[부적합]
[배정지는 23층 본 구역 이동 관리 물품입니다]
"관리 좋아하네."
현우는 거의 빈 물주머니를 눌렀다. 물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대신 주둥이에 맺힌 한 방울이 바닥에 떨어졌다.
방울은 동그랗게 퍼지지 않았다. 소년의 맨발 모양처럼 길게 번졌다.
다서연의 기록판이 반응했다.
[생존 보급 처리 완료 흔적]
[발자국 대체 가능]
[이동 의사 잔류]
현우가 소년에게 말했다.
"걷는다며."
소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걷겠습니다."
"그럼 벽 말고 앞을 봐."
현우의 발끝이 움직였다.
[기본 차기]
[접힘선 첫 매듭 접촉]
툭.
종이가 접히던 소리가 끊겼다. 17번 표식의 가운데 접힘선이 펴졌다. 벽으로 꺾이던 소년의 발자국이 다시 통로 앞쪽으로 돌아왔다.
[17번 접힘 보류]
[수령 흔적 우선]
[보행 지연 재판정]
"재판정도 하지 마."
현우가 한 번 더 발끝을 눌렀다.
[기본 차기]
[보행 지연 판정 매듭 절단]
17번 종이가 축축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종이는 소년의 발밑에 붙지 못하고 얇은 물기로 흩어졌다.
다서연이 바로 기록했다.
"17번 이동 의사 확인. 임시 생존 보급 수령 흔적 유지. 접힘 대상 아님."
소년은 한 걸음 앞으로 걸었다.
이번에는 벽이 그를 잡지 못했다.
24번 노인의 차례도 길지 않았다. 현우는 노인의 물주머니를 보았다. 노인은 힘겹게 그것을 들어 보였다.
"나는 느리네."
"느린 거랑 멈춘 거랑 달라."
현우가 말했다.
그는 노인의 발자국 앞에 대기표를 밀어 넣고 접힌 종이의 첫 매듭만 찼다.
툭.
24번 종이가 펴졌다.
[24번 이동 의사 확인]
[수령 흔적 우선]
[벽측 대기칸 배정 취소]
노인은 천천히 걸었다. 아주 느렸지만 발자국은 앞을 향했다.
그 뒤로도 같은 일이 이어졌다.
벽은 다친 사람과 지친 사람을 골라 접으려 했다. 통로는 빨리 걷는 사람만 길로 인정했다. 느린 사람은 종이로 보관하려 했다.
현우는 하나씩 접힘선을 밟았다.
다서연은 번호를 읽었다.
"8번 이동 의사 확인."
툭.
"13번 수령 흔적 유지."
툭.
"31번 발자국 대체 가능."
툭.
위율은 붉은 기록판을 들고도 아무것도 덧씌우지 않았다. 대신 짧게 선언했다.
"적요길드는 이 통로의 벽측 대기칸 배정을 인수하지 않는다. 누구도 저들의 지연 기록을 길드 호송 기록으로 바꾸지 않는다."
붉은 빛이 꺼졌다.
벽의 네모 자국들이 점점 빈칸으로 돌아갔다. 접힌 종이들이 바닥에 떨어져 젖은 얼룩이 됐다.
마지막 통과자가 앞쪽 통로에 발을 올리자 벽 전체가 흔들렸다.
[임시 번호 소지자 37명 접힘 거부]
[보행 지연 판정 폐기]
[생존 통행 유지]
강현우는 발끝을 털었다.
"이제 종이 접기 끝났냐."
통로 끝에서 새로운 소리가 났다.
착.
이번에는 종이를 접는 소리가 아니었다.
편지를 봉하는 소리였다.
통로 끝 벽이 열렸다. 그 안에는 작은 우체함 같은 것이 박혀 있었다. 녹슨 투입구와 젖은 봉투 더미가 보였다.
[발신지 응답 대기함]
[응답 수신 조건 확인]
[수취 근거 필요]
다서연의 기록판이 떨렸다.
"발신지 응답이 여기로 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수취 근거를 요구합니다."
우체함의 투입구 안쪽에서 검은 글자가 올라왔다.
[수취 근거 후보]
[이름 일부 접촉 기록]
[강현...]
현우의 표정이 차갑게 식었다.
"아직도 그거냐."
다음 줄이 떠올랐다.
[대체 수취 근거]
[접힌 임시 번호 1건]
통과자들이 뒤에서 굳었다.
우체함은 현우의 이름 일부를 넣거나 방금 접으려 했던 번호 하나를 넣으라고 요구하고 있었다.
소년이 작게 말했다.
"제 번호를 넣으면 됩니까?"
현우가 돌아봤다.
"됐어."
"하지만 저 때문에..."
"네가 종이냐?"
소년은 입을 다물었다.
현우는 우체함 앞으로 갔다. 투입구 안에서 젖은 봉투가 조금씩 벌어졌다. 봉투 안쪽에는 아무 글자도 없었다. 글자를 기다리는 빈칸만 있었다.
현우는 주머니에서 녹슨 단검을 꺼냈다.
다서연이 긴장했다.
"우체함을 완전히 파괴하면 응답 경로가 끊길 수 있습니다."
"안 부숴."
현우가 단검 끝을 투입구 가장자리에 댔다.
"빈칸만 찢을 거야."
그는 1층에서 보급 신청서 모서리를 수없이 찢던 손놀림으로 단검을 움직였다.
힘은 거의 들어가지 않았다. 투입구와 빈 봉투가 만나는 가장 얇은 선. 수취 근거가 아직 정해지기 전에 종이가 입을 벌리는 첫 매듭.
[기본 찢기]
[수취 근거 빈칸 첫 매듭 절단]
찍.
소리가 작게 났다.
우체함 안의 검은 글자가 흔들렸다. 강현...이 떠오르다 말고 찢어진 봉투 틈으로 흘러내렸다. 접힌 번호를 요구하던 줄도 같이 끊어졌다.
[수취 근거 미기재]
[응답 경로 일부 노출]
[24층 방향 재확인]
우체함 아래에 좁은 문이 열렸다.
그 안쪽에는 계단이 아니라 더 어두운 통로가 있었다. 통로 끝에 흐릿한 문장이 걸려 있었다.
[무명 우편함]
[24층 하부 봉인 우편로]
[수취인 확인 대기]
현우가 단검을 거뒀다.
"우편함이네."
다서연은 기록판을 들고 숨을 골랐다.
"무명 서약 발신지의 직접 위치라기보다 발신지와 연결되는 하부 우편로 같습니다. 24층 방향입니다."
"그러니까 거기 가면 또 내 이름 달라고 하겠네."
대답하듯 통로 끝 문장이 한 번 더 깜빡였다.
[수취인 후보]
[강현...]
현우가 웃지 않고 말했다.
"다음엔 후보도 찢는다."
그 말이 끝나자 23층 본 구역의 네모 자국들이 모두 꺼졌다.
벽에 마지막 판정이 떠올랐다.
[임시 번호 소지자 37명 접힘 거부 생존 통행]
[정보 안내자 동행 유지]
[이름 일부 접촉 기록 무효 보류 유지]
소년은 자기 발을 내려다봤다. 맨발은 아직 아팠을 것이다. 그래도 발자국은 앞을 향해 있었다.
노인은 물주머니를 품에 넣고 천천히 걸었다.
현우는 열린 우편로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밥 먹고 올라가려 했더니 우편물까지 받으러 가게 생겼네."
다서연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래도 발신지에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좋은 소식처럼 말하지 마."
현우가 먼저 어두운 통로로 걸었다.
뒤쪽에서 젖은 종이 소리가 아주 작게 났다. 이번에는 접히는 소리가 아니었다.
누군가 봉투 위에 글자를 쓰다 멈춘 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