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의 1층만 만 년째, 드디어 올라갑니다

20화: 번호를 세는 계단은 이름을 숨긴다
23층으로 이어지는 계단은 축축했다.
강현우는 첫 칸을 밟자마자 발바닥 아래로 얇은 선이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돌계단은 오래 젖은 냄새를 품고 있었다. 물이 흐르는 소리는 없었다. 그런데도 발끝에는 미끄러운 기척이 남았다.
뒤쪽에서 빵 봉지를 쥔 사람들이 멈췄다.
계단 벽에 글자가 떠올랐다.
[23층 번호 검문 계단]
[임시 번호 소지자 통행 가능]
[번호 순서 확인]
현우가 고개를 들었다.
"또 줄이네."
다서연이 기록판을 열었다.
"22층 중계소에서 받은 임시 번호를 읽는 절차다. 다만 통행 가능과 번호 순서 확인이 동시에 걸려 있다."
"번호 있으면 가면 되는 거 아냐?"
"계단이 번호를 이동 순서로 해석하면 뒤섞이는 순간 재검문으로 떨어질 수 있다."
맨 앞 여자가 빵을 품에 안은 채 한 칸을 올랐다.
계단이 바로 반응했다.
[1번 확인]
[수령 흔적 있음]
[다음 번호 대기]
여자의 어깨가 조금 내려갔다. 그래도 뒤쪽 줄은 움직이지 못했다. 신발 한 짝 없는 소년은 난간을 보고 있었다. 노인은 물주머니를 두 손으로 붙잡고 있었다.
계단은 그들에게 올라오라고 하지 않았다.
숫자를 기다렸다.
현우가 뒤를 돌아봤다.
"자기 번호대로 서 있었냐?"
사람들이 서로를 보았다.
그럴 리 없었다. 빵을 먼저 받은 사람과 늦게 받은 사람이 섞여 있었다. 다친 사람은 벽 쪽에 기대 있었고 다리가 불편한 노인은 앞쪽으로 옮겨져 있었다.
다서연이 낮게 말했다.
"순서 검문이면 위험하다. 번호가 맞지 않는 사람은 통행이 아니라 이탈로 처리될 수 있다."
현우는 계단 벽을 보았다.
"밥 먹은 순서까지 외우라는 거냐."
그때 난간 아래에서 검은 선이 올라왔다.
선은 글자가 되기 전에 먼저 현우의 발목 근처를 맴돌았다. 보관실 반환함에서 보였던 선과 같은 냄새였다. 종이 냄새가 섞인 검은 기척.
계단 벽의 글자가 흔들렸다.
[이름 일부 접촉 기록 재확인]
[강현...]
[번호 결손 사유 검색]
다서연의 얼굴이 굳었다.
"이름을 완성하려는 게 아니다."
"그럼?"
"빈 번호의 사유로 쓰려 한다. 네 이름 일부를 결손 표시로 삼으면 번호 대열 전체가 다시 묶일 수 있다."
위율이 뒤에서 붉은 기록판을 들었다.
"적요길드 임시 보호 번호로 대체하면..."
"하지 마."
현우가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위율은 말을 멈췄다. 그는 잠깐 이를 악물었지만 곧 기록판을 내렸다.
"알겠다. 길드 번호 대체는 주장하지 않겠다."
검은 선은 계단 난간 위를 기어갔다. 숫자들이 하나씩 떠올랐다가 꺼졌다. 1번은 이미 확인됐다. 2번부터 16번까지는 희미했다. 그리고 17번 자리에서 검은 빛이 멈췄다.
소년이 숨을 삼켰다.
그의 빈 이름표가 작게 떨렸다.
[17번 위치 불일치]
[17번 소지자 보행 흔적 불완전]
[결손 사유 보완 대기]
현우가 소년의 발을 봤다.
한쪽 발에는 신발이 없었다. 22층 별도 창구 앞에 서 있던 동안에도 그는 발가락을 말아 올린 채 버텼다. 계단은 그걸 보행 흔적 불완전이라고 읽고 있었다.
"못 걷는 게 죄냐."
현우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검은 선이 기회를 잡은 듯 17번 자리로 스며들었다.
[결손 사유 후보]
[강현...]
소년이 뒷걸음질치려 했다. 그러자 계단 아래쪽 물기가 그의 발바닥을 붙잡았다.
다서연이 기록판을 들어 방향을 표시했다.
"난간 아래. 17번 자리와 검은 선이 만나는 곳이다."
현우는 대답 대신 주머니를 뒤졌다.
낡은 금속 대기표가 나왔다. 그 옆에 거의 빈 물주머니가 딸려 나왔다. 1층에서 살아남으려고 쥐고 다녔던 물주머니였다.
"번호가 뭔지부터 다시 보자."
계단이 곧장 글자를 띄웠다.
[번호는 통행 순서입니다]
"아니지."
현우가 대기표를 계단 첫 칸에 내려놓았다.
"번호는 밥 받은 흔적이지."
대기표의 낡은 글자가 천천히 빛났다.
[수령 의사 확인]
[생존 보급 처리 완료]
[발자국 대체 가능]
계단 벽이 젖은 돌처럼 어두워졌다.
[통행 순서와 불일치]
"통행은 네가 세는 거고 밥은 저 사람들이 먹은 거야."
현우는 물주머니를 눌렀다.
물은 거의 나오지 않았다. 한 방울이 계단 첫 칸에 떨어졌다. 물방울은 굴러가지 않고 발자국 모양으로 번졌다. 1번 여자가 밟았던 자리와 17번 소년이 서 있던 자리 사이에 아주 옅은 선이 생겼다.
다서연이 빠르게 읽었다.
"생존 보급 완료 흔적이 통행 순서보다 먼저 잡힌다. 계단이 번호를 사람의 위치가 아니라 수령 흔적으로 재분류하려 한다."
"하려 한다가 아니라 하게 만들어."
현우는 소년을 향해 손짓했다.
"야. 번호."
소년은 입술을 달싹였다.
이름을 말하려던 버릇이 아직 남아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목이 막히지 않았다. 그는 자기 목을 만진 뒤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17번."
계단은 바로 거절했다.
[17번 소지자 보행 흔적 불완전]
[순서 결손]
현우가 한숨을 쉬었다.
"그러니까 신발 없다고 줄에서 빼겠다는 거네."
그는 소년 앞으로 내려갔다. 계단은 번호 순서가 무너졌다고 판단했는지 아래쪽을 닫으려 했다. 검은 선이 17번 자리에서 강현...을 다시 띄웠다.
현우의 발끝이 움직였다.
[기본 차기]
[17번 발자국 첫 매듭 접촉]
툭.
소리는 작았다.
하지만 계단 전체가 한 칸 내려앉는 것처럼 흔들렸다. 검은 선이 17번 발자국을 감싸려다 끊어졌다. 소년의 맨발 아래에 남은 희미한 자국이 검은 빛 밖으로 드러났다.
다서연이 외쳤다.
"17번 수령 의사 확인. 생존 보급 처리 완료. 발자국 대체 가능."
위율이 뒤이어 말했다.
"적요길드는 17번 임시 번호에 대한 대체 권한을 주장하지 않는다. 번호 귀속 없음."
붉은 기록판의 빛이 꺼졌다.
소년은 한 칸을 올랐다.
이번에는 계단이 그를 삼키지 못했다.
[17번 확인]
[수령 흔적 우선]
[보행 흔적 보완 불필요]
소년은 자기도 모르게 웃었다. 웃음은 짧았다. 그래도 계단의 젖은 공기가 조금 밝아졌다.
현우가 손을 털었다.
"다음."
번호들은 순서대로 올라오지 않았다.
2번은 뒤쪽에 있었다. 3번은 노인의 옆을 잡고 있었다. 8번은 계단 벽에 기대 눈을 감고 있었다. 계단은 그때마다 순서 불일치와 보행 흔적 부족을 띄웠다.
현우는 하나씩 첫 매듭을 밟았다.
큰 힘은 필요 없었다. 계단이 사람을 줄에 맞추려는 첫 지점만 찾으면 됐다. 발자국과 검은 선이 처음 만나는 곳. 번호와 순서가 서로 다른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가장 얇은 틈.
다서연은 번호를 읽었다.
"5번 수령 흔적 확인."
툭.
"12번 생존 보급 완료."
툭.
"24번 발자국 대체 가능."
노인이 천천히 계단을 올랐다. 물주머니가 그의 손에서 흔들렸다. 계단은 그를 뒤로 밀지 못했다.
검은 선은 몇 번이나 현우의 이름 일부를 꺼내려 했다.
[강현...]
[결손 사유 보완]
[이름 일부 접촉 기록 보존]
현우는 그때마다 발끝으로 글자 아래를 눌렀다.
"남의 이름으로 빈칸 채우지 말라고."
계단 난간에 금이 갔다. 돌이 깨진 것은 아니었다. 숫자를 붙잡던 얇은 물기가 갈라졌다.
마지막 사람이 계단 중간을 넘자 벽의 글자가 한꺼번에 바뀌었다.
[임시 번호 소지자 37명 통행 확인]
[정보 안내자 동행 유지]
[번호 순서 확인 생략]
다서연이 숨을 내쉬었다.
"통과다."
"아직 나 남았는데."
현우가 계단 아래를 보았다.
계단은 잠시 조용했다.
그다음 새 글자를 띄웠다.
[번호 미소지자]
[통행 근거 확인]
다서연이 바로 기록판을 들었다.
"강현우는 임시 이동권과 무소속 생존 통과자 분류가 있다. 정보 안내자 동행 기록도 유지된다."
계단은 다서연의 기록을 밀어내려 했다.
[이름 일부 접촉 기록 재확인]
검은 선이 다시 올라왔다.
이번에는 강현...이 아니라 마지막 점 세 개만 떠올랐다. 글자가 되지 못한 흔적이었다.
현우가 계단을 올려다봤다.
"점 세 개면 말 줄임표냐?"
그는 대기표를 집어 들었다.
대기표의 금속이 식어 있었다. 하지만 그 안쪽에는 아직 줄을 끊던 열이 남아 있었다.
"내 통행 근거?"
현우는 자기 발밑을 가리켰다.
"내 발로 올라간다."
계단이 그 답을 싫어했다. 난간 아래 검은 선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다서연이 한 발 앞으로 나섰다.
"기록 보조. 강현우는 22층 중계소 무명 대기자 명부 회수 처리자이며 회수자명은 미기재다. 이름 일부 접촉 기록은 회수자명으로 확정되지 않았다."
위율도 낮게 말했다.
"적요길드 이의 제기는 별도다. 이 계단에서 강현우의 이름을 결손 사유로 쓰지 않는다."
검은 선이 둘의 기록을 타고 올라가려 했다.
현우가 먼저 움직였다.
[기본 차기]
[이름 일부 접촉 기록 연결선 접촉]
툭.
난간 아래 점 세 개가 흩어졌다.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물기 속에 아주 작은 점 하나가 남았다. 계단 벽은 그 점을 감추듯 새 문구를 띄웠다.
[임시 번호 동행 통과]
[이름 일부 접촉 기록 무효 보류]
[무명 서약 발신지 응답 지연]
현우는 마지막 줄을 읽고 눈살을 찌푸렸다.
"응답을 왜 해."
계단 위 난간이 열렸다.
그 너머에는 23층 본 구역이 있었다. 낮은 천장의 통로가 옆으로 길게 뻗어 있었다. 벽에는 숫자를 지운 듯한 네모난 자국들이 남아 있었다. 멀리서는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와 젖은 종이를 접는 소리가 번갈아 들렸다.
다서연의 기록판이 작게 떨렸다.
[24층 방향 재확인]
[발신지 응답 대기]
현우는 대기표를 주머니에 넣었다.
"다음에 내 이름으로 또 빈칸 만들면 진짜 찢는다."
계단의 검은 점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위쪽 통로의 어둠 속에서 아주 늦은 종이 소리가 한 번 더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