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의 1층만 만 년째, 드디어 올라갑니다

19화: 이름을 적는 문은 발자국을 싫어한다
보관실 문 안쪽에서 종이 넘기는 소리가 났다.
강현우는 발끝을 든 채 그 소리를 들었다. 문에는 손잡이가 없었다. 이름을 띄우는 좁은 홈만 있었다. 홈 안쪽에는 검은 빛이 고여 있었다.
그 빛 위에 이미 한 글자가 떠 있었다.
강.
두 번째 글자의 첫 획이 천천히 긁히고 있었다. 종이를 긁는 소리가 아니었다. 오래 마른 뼈에 칼끝을 대는 소리 같았다.
"남의 이름 함부로 쓰지 말라니까."
현우가 발을 내리려 하자 다서연이 급히 말했다.
"잠깐. 문을 깨면 회수 기록이 보관 책임 기록으로 바뀔 수 있다."
"그게 뭔 차인데."
"회수자는 꺼내는 사람이다. 보관 책임자는 안에 묶이는 사람이다."
현우의 발끝이 공중에서 멈췄다.
문 안쪽의 검은 빛이 그 틈을 노린 듯 더 진해졌다.
[회수자 확인 진행]
[이름 일부 확인]
[보관 책임 전환 대기]
위율이 뒤에서 낮게 숨을 삼켰다.
"저건 길드 장부가 아니다. 이름을 쓰는 순간 기록망에 묶이는 방식도 아니다."
"그럼?"
"문 쪽이 이름을 빌린다."
현우는 어이없다는 얼굴로 홈을 보았다.
"빌려 간다고 물어보지도 않네."
두 번째 획이 더 길어졌다. 아직 글자는 완성되지 않았다. 그래도 현우는 알 수 있었다. 저것은 자신의 이름을 쓰려는 게 아니었다. 자신의 이름으로 무언가를 닫으려는 것이었다.
그는 주머니에서 1층 보급 대기표를 꺼냈다.
낡은 금속 조각은 아직 미지근했다. 방금 전 서른일곱 명의 임시 번호를 만들며 바닥선에 닿았던 열이 남아 있었다.
"이름 말고 발자국으로 하자."
현우가 대기표를 홈 아래 바닥에 댔다.
문은 바로 거절했다.
[부적합]
[보관실 회수에는 이름 확인이 필요합니다]
"너 이름 좋아하네."
현우가 발끝으로 대기표 옆을 톡 쳤다.
작은 소리였다. 하지만 문 앞 바닥에 남아 있던 서른일곱 개의 옅은 발자국이 한꺼번에 빛났다. 빵과 물을 받은 사람들이 별도 창구 앞에서 물러나며 남긴 발자국이었다.
다서연의 기록판도 반응했다.
[임시 생존 보급 번호 잔류]
[수령 의사 확인 흔적]
[발자국 대체 가능]
문 안쪽의 종이 소리가 잠깐 멈췄다.
현우가 말했다.
"회수할 사람 찾지 말고 회수할 줄부터 확인해."
검은 빛이 흔들렸다. 홈에 떠 있던 두 번째 획은 지워지지 않고 옆으로 밀렸다. 문 안쪽에서 잠금이 풀리는 소리가 났다.
보관실 문이 열렸다.
안쪽은 좁지 않았다.
중계소 벽 뒤에 그런 공간이 있을 리 없을 만큼 깊었다. 선반들이 줄지어 서 있었고 선반마다 얇은 장부가 빽빽하게 꽂혀 있었다. 장부 표지는 검었다. 어떤 장부에는 아무 글자도 없었고 어떤 장부에는 지워진 이름의 첫 글자만 남았다.
종이 냄새가 났다.
오래된 먼지 냄새도 났다.
그보다 먼저 귀에 닿는 것은 말하지 못한 목소리들이었다. 소리는 아니었다. 입술이 움직이다 멈춘 순간만 모아 놓은 공기였다.
보관실 밖에서 빵을 쥐고 있던 소년이 한 걸음 물러났다. 목에 걸린 빈 이름표가 작게 떨렸다.
"저 안에 제 것도 있습니까?"
다서연이 기록판을 들었다.
"가능성이 높다. 명부가 이름을 보관하는 게 아니다. 이름을 말하지 못한 순간을 보관한다."
현우가 선반 사이로 들어갔다.
"되게 쓸데없는 걸 모으네."
장부들이 일제히 펼쳐졌다.
종이 위에는 이름이 없었다. 대신 줄이 있었다. 길고 가느다란 대기열 선. 그 선 위에 작은 빈칸들이 걸려 있었다. 빈칸마다 검은 실이 묶여 있었고 실 끝은 보관실 밖의 사람들 목과 이름표 방향으로 이어졌다.
중앙 선반 위에 가장 두꺼운 장부가 놓여 있었다.
표지에는 글자가 없었다.
현우가 손을 뻗자 표지가 저절로 열렸다.
[무명 대기자 명부]
[회수 조건: 회수자명 기재]
[미기재 시 보관 책임자 자동 전환]
"또 이름."
현우가 표정을 구겼다.
다서연이 빠르게 읽었다.
"회수자명을 쓰면 회수 권한이 생기지만 동시에 명부가 그 이름을 추적 고리로 쓸 수 있다. 쓰지 않으면 강제로 보관 책임자가 된다."
"둘 다 별로네."
위율이 보관실 문턱 밖에서 말했다.
"적요길드 이름으로 회수하면 길드 귀속으로 해석될 수 있다. 내가 대신 받을 수도 없다."
"안 물어봤어."
현우는 장부를 내려다봤다.
표지 안쪽에는 검은 빛으로 칸이 하나 생겼다. 칸은 회수자명을 기다렸다. 기다리는 방식이 별도 창구 앞 줄과 닮아 있었다.
현우는 장부에 이름을 쓰지 않았다.
대신 보관실 바닥을 봤다. 먼지 위에 발자국이 있었다. 아주 희미했다. 이름을 말하지 못해 보관실 안까지 끌려왔던 사람들의 발자국이었다. 오래된 발자국과 방금 생긴 발자국이 같은 줄로 이어져 있었다.
"명부가 사람을 들고 있는 게 아니네."
다서연이 고개를 들었다.
"무슨 뜻이지?"
"줄을 들고 있어."
현우는 대기표를 장부 위에 올렸다.
명부가 곧장 검은 글자를 띄웠다.
[부적합]
[회수자명 없음]
현우가 보관실 밖을 향해 말했다.
"아까 번호 받은 사람들. 자기 번호 기억하지?"
맨 앞 여자와 소년과 줄에 있던 노인이 서로를 보았다. 그들은 아직 빵을 다 먹지 못했다. 하지만 번호는 놓치지 않은 얼굴이었다.
여자가 먼저 말했다.
"1번."
소년이 뒤따랐다.
"17번."
노인이 천천히 손을 들었다.
"24번."
다서연이 바로 기록판을 펼쳤다.
"임시 생존 보급 번호 확인. 수령 의사 확인. 발자국 대체 가능."
명부의 종이가 한 장씩 넘어갔다. 이름 없는 빈칸들이 흔들렸다. 검은 실이 갑자기 조여들었다. 사람들의 빈 이름표가 딸깍거렸다.
[외부 번호 기록 차단]
[무명 대기열 재결속]
[회수자명 요구]
"고집 세네."
현우는 장부를 덮지 않았다.
그는 장부와 바닥선이 만나는 가장 작은 매듭을 찾았다. 보관실 바닥에서 장부 표지 아래로 들어가는 검은 선 하나. 선은 아주 가늘었지만 끈질겼다.
1층 보급 창구에도 그런 선이 있었다. 빵을 받으려는 사람을 줄 뒤로 밀어내던 선. 처음에는 보이지 않았고 나중에는 너무 많이 봐서 눈을 감아도 보였던 선.
현우는 발끝을 세웠다.
[기본 차기]
[명부 대기열 첫 매듭 접촉]
이번에는 보관실 전체가 흔들렸다.
장부들이 선반에서 튀어나오려 했다. 검은 종이 실이 사방으로 뻗어 사람들의 목과 손목을 노렸다. 다서연이 기록판을 들어 실의 방향을 표시했다.
"왼쪽 선반. 세 번째 줄."
현우의 발이 바닥을 쳤다.
종이 실이 끊어졌다.
"문턱 아래."
다시 한 번.
"장부 표지 안쪽."
또 한 번.
소리는 작았다. 하지만 매듭이 끊길 때마다 보관실 밖에서 누군가 숨을 크게 들이켰다. 막혀 있던 목이 풀리는 소리였다.
명부가 검은 빛을 뿜었다.
[회수자명 강제 보완]
[강현...]
세 번째 글자가 떠오르기 전에 현우가 장부 위를 발끝으로 눌렀다.
"내 이름 말고."
그는 장부 아래 깔린 대기표를 밀었다.
"저 사람들 발자국."
대기표의 낡은 글자가 빛났다.
[수령 의사 우선]
[발자국 대체 가능]
[생존 보급 처리 완료 기록]
장부가 처음으로 조용해졌다.
다서연이 낮게 말했다.
"명부가 회수자명을 못 잡는다. 처리 완료 기록이 먼저 닫힌다."
위율이 문턱 밖에서 공략대를 향해 말했다.
"적요길드는 이 명부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지 않는다. 누구도 저 사람들의 번호를 길드 귀속으로 바꾸지 마라."
그 말이 끝나자 붉은 문장 몇 개가 꺼졌다.
명부의 표지가 천천히 접혔다. 검은 표지 위에 처음으로 글자가 생겼다.
[무명 대기자 명부 회수]
[회수 근거: 임시 생존 보급 완료]
[회수자명: 미기재]
현우가 장부를 집어 들었다.
무겁지 않았다.
이상하게 가벼웠다. 사람을 묶는 것들은 대개 들고 나면 가볍다. 묶여 있던 사람이 무거웠던 것이다.
보관실 밖의 서른일곱 명은 자기 이름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여전히 이름이 다 돌아온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검은 실은 없었다. 목소리를 막던 얇은 꿰맴도 사라졌다.
소년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는..."
목이 막히지 않았다.
소년은 놀라서 자기 목을 만졌다. 그래도 이름은 말하지 않았다. 현우는 그것을 재촉하지 않았다.
"지금은 밥 먹어."
소년이 고개를 끄덕였다.
현우는 명부를 들고 별도 창구 쪽으로 걸었다. 창구는 이미 닫혀 있었다. 대신 그 옆에 작은 반환함이 열려 있었다.
[23층 이동 전 추가 처리]
[회수 물품 반환]
현우가 명부를 반환함에 던졌다.
반환함이 명부를 삼키지 못하고 한 번 덜컥거렸다. 검은 표지가 마지막으로 벌어졌다. 그 안에서 얇은 글자가 떠올랐다.
[무명 서약 발신지 추적 중]
[이름 일부 접촉 기록 보존]
[다음 계단에서 재확인]
현우가 눈살을 찌푸렸다.
"아직도 내 이름 갖고 있냐?"
글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서연의 기록판이 바쁘게 울렸다.
"아르페우스 현장 보고. 무명 대기자 명부 회수 완료. 회수자명 미기재. 임시 생존 보급 완료 기록으로 대기열 해제. 검은 문장 발신지 추적 문구 확인."
보고선 너머가 소란스러웠지만 다서연은 더 기다리지 않았다.
중계소 끝의 문이 열렸다.
이번 문에는 식당 냄새가 없었다. 대신 축축한 돌계단 냄새가 올라왔다.
[23층 이동문 개방]
[임시 번호 소지자 통행 가능]
[정보 안내자 동행 유지]
[상층 기록망 이의 제기 후속 처리 계속]
서른일곱 명이 서로를 보았다.
누군가는 바로 움직였고 누군가는 빵을 끝까지 삼킨 뒤 일어났다. 맨 앞 여자는 현우에게 고개를 숙이려다 멈췄다. 현우가 먼저 손을 저었다.
"밥 먹었으면 됐어."
여자는 작게 웃었다.
현우는 열린 문 앞에 섰다.
다서연이 옆으로 따라붙었다. 위율은 조금 뒤에서 붉은 기록판을 닫았다.
"다음 층은 바로 통행로가 아닐 가능성이 높다."
"또 줄이야?"
"임시 번호 소지자 통행 가능이라고 했으니 번호 검문이 있을 수 있다."
현우는 한숨을 쉬었다.
"오늘 번호표 많이 쓰네."
그가 계단을 밟았다.
그 순간 뒤쪽 반환함에서 종이 한 장 넘어가는 소리가 났다. 현우가 돌아보자 아무것도 없었다. 다만 바닥에 아주 얇은 검은 선 하나가 남아 있었다.
선은 글자가 되지 않았다.
아직은.
현우는 다시 앞을 보았다.
"다음에 쓰면 진짜 찢는다."
검은 선이 조용히 사라졌다.
23층 계단 아래에서 차가운 바람이 올라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