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의 1층만 만 년째, 드디어 올라갑니다

18화 줄 선 사람은 이름보다 배가 먼저다
22층 중계소는 식당 냄새가 나는 관문이었다.
강현우는 문턱을 넘자마자 그 사실부터 알았다. 고기 굽는 냄새는 아니었다. 진한 국물 냄새도 아니었다. 오래 끓인 물과 오래 식은 빵과 오래 기다린 사람 냄새가 뒤섞여 있었다.
복도 끝에는 창구가 셋 있었다.
가운데 창구에는 간이 식사가 쌓여 있었다. 납작한 빵과 맑은 물과 소금 봉투가 줄지어 놓였다. 왼쪽 창구에는 길드 문장이 박힌 상자가 오갔다. 오른쪽 창구는 벽 뒤로 조금 밀려 있었다.
그 오른쪽 창구 앞에 사람이 서른일곱 명 있었다.
줄은 조용했다.
너무 조용했다.
강현우는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배가 고픈 줄은 원래 조용하지 않다. 누군가는 투덜거리고 누군가는 발을 끌고 누군가는 앞사람 등을 쳐다본다. 그런데 저 줄은 창구가 사람을 기다리게 만드는 줄이 아니었다. 창구가 사람을 잊어버린 줄이었다.
안내판에 글자가 떠올랐다.
[무소속 생존 통과자 별도 창구]
[대기 인원: 37명]
[처리 조건: 이름 확인]
[처리 조건: 소속 확인]
강현우가 빵 더미를 보았다.
빵은 충분했다.
물이 부족한 것도 아니었다.
"밥 앞에서 서른일곱 명을 세워 둔다고?"
다서연이 기록판을 들었다. 그녀의 시선은 별도 창구와 일반 창구 사이를 빠르게 오갔다.
"무소속 통과자라서 일반 보급 대기열에 들어가지 못한 것 같습니다."
"무소속이면 밥을 못 먹나."
"그렇게 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문제는 처리 순서입니다."
위율이 뒤에서 낮게 말했다.
"저 창구는 사람을 받는 곳이 아니라 분류가 끝난 기록을 받는 곳이다. 이름과 소속이 없으면 앞 단계로 되돌린다."
강현우는 줄의 맨 앞에 선 여자를 보았다. 여자는 허리에 부러진 단검을 찼다. 손등에는 길드 문장이 지워진 자국이 있었다. 맨 뒤의 소년은 아예 신발 한 짝이 없었다. 둘 다 빵을 보고 있었다. 창구를 보는 게 아니었다.
강현우에게는 익숙한 얼굴들이었다.
이름이 있어서 배고픈 사람과 이름이 없어서 배고픈 사람이 따로 있는 줄 아는 창구 앞에 서 있던 얼굴.
1층 보급 창구가 고장 났던 날들이 떠올랐다.
처음에는 화가 났다.
나중에는 순서를 외웠다.
맨 마지막에는 순서가 사람을 죽이지 않게 하는 법을 배웠다.
별도 창구가 차가운 목소리를 냈다.
[다음 대상자는 이름을 제시하십시오]
맨 앞의 여자가 입술을 열었다.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여자의 목에서 검은 실 같은 것이 꿈틀거렸다. 실은 목소리를 막는 게 아니라 이름이 지나갈 자리를 꿰매고 있었다.
다서연의 얼굴이 굳었다.
"검은 문장과 같은 계열입니다."
위율의 붉은 문장이 바닥에서 일어났다.
[적요길드 공략권 대리 확인]
[무소속 생존자의 임시 보급 요청]
창구가 즉시 거절했다.
[거절]
[요청자는 해당 대기열의 발급 책임자가 아닙니다]
다서연도 기록판을 열었다.
[현장 동행 기록]
[정보 안내자 다서연]
[무소속 생존 통과자 대기열 처리 확인 요청]
이번에도 대답은 같았다.
[거절]
[정보 안내자는 생존 보급 발급 권한이 없습니다]
줄 뒤쪽에서 누군가 힘없이 웃었다.
"다 해 봤습니다."
강현우가 돌아보았다.
신발 한 짝 없는 소년이었다. 나이는 열다섯이나 열여섯쯤 되어 보였다. 목에는 이름표가 매달려 있었지만 표면이 비어 있었다.
"이름 대라면 목이 막히고 소속 대라면 창구가 닫힙니다. 검은 문장이 식당 위치를 알려 준다고 해서 왔는데 여기서 멈췄습니다."
"식당 위치?"
소년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름 없는 사람은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고 했습니다."
강현우는 창구 위 검은 문장을 보았다.
문장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천장 깊은 곳에 검은 금이 하나 있었다. 앞선 관문에서 잘라 냈던 첫 매듭이 거기로 이어진 것처럼 희미하게 떨렸다.
강현우가 혀를 찼다.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고 해 놓고 줄을 세웠네."
다서연이 낮게 말했다.
"대기열 밖으로 빼내기 위한 미끼였을 가능성이 큽니다. 이름도 소속도 없는 상태로 별도 창구에 묶이면 공식 기록에서 찾기 어렵습니다."
"그러니까 밥으로 낚았다는 거잖아."
강현우의 손이 주머니로 들어갔다.
다서연은 그가 무엇을 꺼낼지 이미 조금은 짐작한 얼굴이었다. 위율은 아직 몰랐다. 적요길드 공략대는 모두 긴장했다. 그들의 눈에는 강현우가 꺼내는 물건이 보물인지 폭탄인지 구분되지 않는 듯했다.
강현우가 꺼낸 것은 찢어진 금속 조각이었다.
번호표였다.
구석에는 거의 지워진 글자가 남아 있었다.
[1층 보급 대기표]
[수령 의사 확인]
[발자국 대체 가능]
위율이 숨을 삼켰다.
"그런 물건을 아직도 가지고 있나."
"버리면 또 줄 서야 하니까."
강현우는 번호표를 별도 창구 앞 바닥에 내려놓았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창구가 대답했다.
[부적합]
[해당 물품은 1층 보급 창구 소모품입니다]
[22층 중계소 발급 체계와 호환되지 않습니다]
"호환은 네가 맞춰."
강현우가 발을 들었다.
다서연이 반사적으로 기록판을 앞으로 냈다. 위율은 붉은 문장을 접었다. 적요길드 공략대는 뒤로 물러났다.
강현우의 발끝이 바닥을 가볍게 쳤다.
큰 소리는 나지 않았다.
하지만 중계소 바닥을 지나던 대기열 선이 한 줄씩 들썩였다. 검문선과 보급선과 길드 보급선이 잠깐 서로의 위치를 잃었다. 그 사이로 1층 보급 번호표의 낡은 선이 파고들었다.
[기본 차기]
[대기열 첫 매듭 접속]
[생존 보급 우선 판정 요청]
창구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발급 책임자 확인 필요]
강현우가 맨 앞 여자의 발밑을 가리켰다.
"저기 발자국 있잖아."
[소속 확인 필요]
"밥 먹는 데 소속이 왜 필요해."
[이름 확인 필요]
강현우는 잠깐 입을 다물었다.
줄에 선 사람들의 시선이 그에게 모였다. 이름이 필요한 곳에서 이름이 막힌 사람들. 이름을 대면 어딘가로 끌려갈까 봐 입을 닫은 사람들. 이름을 잃어버린 사람들.
강현우는 1층에서 너무 오래 기다린 사람답게 말했다.
"수령 의사 먼저."
그가 맨 앞 여자에게 물었다.
"먹을 거냐?"
여자가 눈을 들었다.
목에서 검은 실이 꿈틀거렸다. 그래도 이번에는 이름을 묻는 게 아니었다. 여자는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강현우가 말했다.
"1번."
번호표가 빛났다.
[수령 의사 확인]
[임시 생존 보급 번호: 1]
별도 창구가 덜컥 열렸다.
빵 하나와 물 한 봉지가 창구 아래로 나왔다.
줄 전체가 숨을 들이켰다.
그 순간 천장의 검은 금이 벌어졌다.
검은 실들이 내려왔다. 실은 빵을 향하지 않았다. 사람들의 목과 빈 이름표를 향해 내려왔다.
[무명 서약 복구]
[이름 없는 대기열 재결속]
[외부 번호 부여 차단]
다서연이 기록판을 펼쳤다.
"강현우. 실이 이름표로 갑니다."
"봤어."
강현우가 다시 발을 들었다.
검은 실이 빠르게 퍼졌다. 맨 앞 여자의 이름표와 소년의 빈 이름표가 동시에 떨렸다. 실이 닿으면 번호가 지워질 것이다. 다시 줄은 조용해질 것이다.
현우는 사람을 차지 않았다.
창구도 차지 않았다.
그는 실과 바닥선이 만나는 작은 매듭만 찼다.
[기본 차기]
[무명 서약 첫 매듭 절단]
검은 실이 바람 빠진 활시위처럼 튕겨 나갔다.
천장에 걸린 금이 비명을 내지르듯 길어졌다. 그러나 완전히 닫히지는 않았다. 그 안쪽에서 종이 넘기는 소리가 났다.
다서연이 즉시 말했다.
"본체가 아닙니다. 명부 쪽입니다."
"명부?"
"이름 없는 대기자들을 묶는 별도 장부가 있습니다. 이 실은 장부의 말단입니다."
강현우가 별도 창구를 보았다.
"그럼 더 빨리 먹여야겠네."
그는 줄을 향해 돌아섰다.
"먹을 사람 손 들어."
처음에는 아무도 움직이지 못했다.
그다음 신발 한 짝 없는 소년이 손을 들었다. 맨 앞 여자도 손을 들었다. 줄 중간의 노인이 손을 들었다. 몇 명은 울 것 같은 얼굴로 손을 들었다.
창구가 흔들렸다.
[다중 수령 의사 확인]
[임시 생존 보급 번호 발급 대기]
위율이 붉은 문장을 펼쳤다.
"적요길드 공략대는 창구 접근을 막지 않는다. 지금부터 누구든 이 대기열을 길드 귀속으로 주장하면 내 이름으로 회의에 올린다."
적요길드 공략대의 몇몇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도 움직이지 않았다.
다서연은 줄 옆에 서서 번호를 불렀다.
"2번. 수령 의사 확인."
두 번째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3번."
세 번째 사람이 손을 들었다.
창구 아래로 빵과 물이 하나씩 나왔다.
검은 실은 계속 내려왔다. 강현우는 그때마다 실이 사람에게 닿기 전 매듭만 끊었다. 발끝이 바닥을 치는 소리는 작았다. 하지만 그 소리가 날 때마다 줄의 침묵이 조금씩 깨졌다.
"14번."
"15번."
"16번."
소년의 차례가 왔다.
소년은 손을 들면서 말했다.
"저는 이름이..."
목이 막히려 했다.
강현우가 말을 끊었다.
"지금은 밥 번호만 말해."
소년이 입술을 깨물었다.
"17번."
창구가 대답했다.
[임시 생존 보급 번호: 17]
소년은 빵을 받자마자 울었다.
강현우는 모른 척했다. 울 때도 먹을 수는 있다. 그건 만 년 동안 배운 확실한 지식 중 하나였다.
서른일곱 번째 물 봉지가 창구 아래로 굴러 나왔을 때 중계소 안의 공기가 바뀌었다.
줄은 아직 있었다.
그러나 버려진 줄은 아니었다.
사람들은 자기 번호를 알고 있었다.
별도 창구 위 안내판이 다시 켜졌다.
[무소속 생존 통과자 임시 보급 완료]
[대기 인원: 0명]
[23층 이동 전 추가 처리 필요]
강현우가 빵 부스러기를 손에서 털었다.
"또 뭐."
검은 금에서 종이 넘기는 소리가 뚝 멈췄다.
창구 뒤쪽 벽에 새로운 문장이 떠올랐다.
[무명 대기자 명부 회수 요청]
[보관실 위치 개방]
[회수자 확인 필요]
다서연이 기록판을 확인했다.
"보관실이 열립니다. 중계소 안쪽입니다."
위율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명부를 회수하면 검은 문장의 출처에 더 가까워질 수 있다. 하지만 회수자가 누구로 기록될지 모른다."
강현우는 빵을 먹는 사람들을 보았다.
맨 앞 여자는 빵을 아주 천천히 씹고 있었다. 소년은 물 봉지를 두 손으로 잡았다. 누군가는 아직도 믿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자기 번호가 적힌 얇은 표를 바라보았다.
강현우는 한숨을 쉬었다.
"밥값 치고는 귀찮네."
그가 보관실 쪽으로 걸었다.
문은 중계소 안쪽 가장 어두운 벽에 있었다. 문에는 손잡이가 없었다. 대신 이름을 띄우는 좁은 홈이 하나 있었다.
다서연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회수자 확인이면 이름을 요구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또 이름이야?"
강현우가 문 앞에 섰다.
홈 안쪽에서 검은 빛이 올라왔다.
처음에는 아무 글자도 없었다.
그다음 아주 느리게 한 글자가 떠올랐다.
강.
다서연이 숨을 멈췄다.
위율의 붉은 문장이 흔들렸다.
홈 안의 검은 빛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두 번째 글자의 첫 획이 문 안쪽에서 긁히기 시작했다.
강현우는 그걸 보고 발끝을 들었다.
"남의 이름 함부로 쓰지 말라니까."
문 안쪽에서 종이 수천 장이 동시에 넘어가는 소리가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