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의 1층만 만 년째, 드디어 올라갑니다

17화: 검은 문장은 이름표를 싫어한다
22층 예비 관문은 식당처럼 생기지 않았다.
현우는 문턱을 넘자마자 그 사실부터 확인했다. 바람은 있었다. 그러나 국물 냄새도 구운 고기 냄새도 없었다. 대신 새로 갈아 낀 쇠판과 마른 잉크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관문은 원형이었다.
천장에는 세 갈래 문양이 떠 있었다. 적요길드의 붉은 문장. 아르페우스의 푸른 문장. 그리고 검은 문장.
검은 문장은 다른 둘과 달랐다. 선이 너무 얇아 처음에는 금이 간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눈을 돌리면 금은 조금씩 자리를 바꿨다. 이름을 밝히지 않으려는 사람의 그림자 같았다.
현우는 그 문장을 보다가 빵 봉지를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밥 냄새는 없네."
다서연은 기록판을 들어 올렸다.
"예비 관문이다. 22층 중계소로 들어가기 전에 소속과 통과 권한을 확인한다."
"또 확인?"
"21층 선별은 동행과 이동권이었다. 여기는 소속이다."
현우의 표정이 바로 시큰둥해졌다.
"소속 없는데."
그 말이 떨어지자 바닥이 켜졌다.
[22층 예비 관문 진입]
[선별 결과 연동]
[소속 확인 절차 개시]
붉은 문장이 먼저 내려왔다. 얇은 붉은 실이 바닥을 타고 현우의 발끝까지 뻗었다.
[적요길드 상층 기록망 이의 제기 유지]
[공략권 분쟁 대상]
[보류 표식 부착 대기]
도율이 뒤에서 걸음을 멈췄다. 그는 창을 들지 않았다. 대신 자기 기록판을 보고 있었다.
"나는 절차를 요구할 뿐이다."
현우가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절차가 밥 주냐고 물었던 것 같은데."
"기록을 무시하면 더 큰 분쟁이 생긴다."
"나는 빵 하나 받는 데도 분쟁이 생기던데."
푸른 문장도 내려왔다. 이번에는 다서연의 기록판과 연결된 선이었다. 선은 현우와 다서연 사이를 망설이다가 둘을 한꺼번에 감싸려 했다.
[아르페우스 현장 동행 기록 확인]
[본부 승인 대기]
[보호 관찰 표식 부착 대기]
다서연의 눈썹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보호 관찰이 아니다. 현장 동행 기록이다."
기록판 너머에서 바로 응답이 왔다.
"본부 기준으로는 비등록 예외 대상의 이동 안정화를 위한 보호 관찰에 가깝습니다. 현장 동행은 임시입니다."
"그 표현은 대상자의 이동을 막을 수 있다."
"이동 제한이 아니라 위험 분류입니다."
현우가 다서연을 보았다.
"나 보호받는 거야?"
"아니다."
"그럼 됐어."
다서연은 대답을 더 잇지 못했다.
검은 문장이 마지막으로 움직였다.
소리가 없었다. 붉은 선과 푸른 선은 빛으로 내려왔지만 검은 문장은 빈칸처럼 떨어졌다. 관문 중앙의 돌판이 검게 물들었고 그 위에 흰 글자가 떠올랐다.
[이름칸 확인]
[소속 미기재]
[서약 대기]
현우의 눈이 가늘어졌다.
"저건 뭐야."
다서연은 기록판을 빠르게 넘겼다.
"문장 이름이 없다. 상층 길드 등록 문장도 아니고 관리국 문장도 아니다."
도율의 얼굴이 굳었다.
"검은 사다리인가."
다서연은 바로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단정할 수 없다. 문양 구조가 너무 얇다. 본체 문장이라기보다 하위 서약문에 가깝다."
검은 돌판이 다시 글자를 띄웠다.
[이름 없는 통과 가능]
[소속 없는 통과 가능]
[서약 시 검문 면제]
현우는 검은 글자를 한참 보았다.
검문 면제.
그 말은 조금 좋았다. 줄을 서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었다. 누군가의 기록판에 잡혀 있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 앞에 붙은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름 없는.
1층에도 이름이 없는 칸은 있었다.
처음에는 고블린들이 이름을 몰라서 그렇게 부르는 줄 알았다. 나중에는 시스템도 그 칸을 썼다. 보급 창구가 고장 나거나 기록석이 밀리면 가장 뒤쪽에 이름 없는 대기자가 생겼다. 이름 없는 대기자는 빵을 받지 못했다. 물도 받지 못했다. 죽어도 기록이 밀리지 않았다.
한 번 그렇게 밀리면 다시 앞으로 나오기까지 오래 걸렸다.
오래.
현우에게는 그 말이 너무 길었다.
그는 주머니를 뒤졌다.
다서연이 숨을 멈췄다.
"이번에는 뭔가."
"이름표."
현우가 꺼낸 것은 낡은 나무 조각이었다. 줄표보다 조금 컸고 한쪽에는 녹슨 핀이 박혀 있었다. 원래는 가죽 아머 안쪽에 달려 있던 물건이었다. 글자는 거의 지워졌지만 긁힌 자국 사이에 두 글자가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강현.
마지막 한 글자는 닳아 없었다.
[1층 튜토리얼 보급 이름표]
[식별 불완전]
[생존 보급 수령자 확인]
도율이 낮게 말했다.
"그걸 소속 증표로 쓰겠다는 건가."
"소속 없다니까."
"그럼 무엇으로 쓰겠다는 거지."
"내 거."
현우는 이름표를 관문 중앙 돌판 위에 올렸다.
붉은 문장이 즉시 반응했다.
[분쟁 대상 이름 확인]
[공략권 보류 표식 연결 시도]
푸른 문장도 이어졌다.
[현장 동행 대상 이름 확인]
[보호 관찰 표식 연결 시도]
검은 문장은 한 박자 늦었다.
[이름 삭제 불가]
[서약 전환 실패]
관문 전체가 흔들렸다.
붉은 선과 푸른 선은 이름표를 서로 다른 쪽으로 끌었다. 검은 돌판은 이름표 아래로 빈칸을 열어 삼키려 했다. 그러나 낡은 이름표는 어느 쪽에도 완전히 붙지 않았다.
그 이름표는 길드 증표도 관리국 등록증도 아니었다.
그저 보급을 받을 사람이 아직 살아 있다는 표시였다.
현우는 이름표 위에 발을 올렸다.
"밥 받을 사람 확인했으면 길 열어."
다서연의 기록판이 새하얗게 깜빡였다.
[하위 생존 식별 판정 감지]
[소속 지정 절차와 충돌]
[무소속 생존 통과자 임시 분류]
도율의 적요길드 기록판도 울렸다. 그는 이를 악물었다.
"보류 표식이 붙지 않는다."
"안 붙였으니까."
"이의 제기는 유지된다."
"그래."
현우는 대답하면서도 검은 돌판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검은 문장은 조용히 물러나지 않았다. 오히려 더 얇아졌다. 얇아진 선들이 이름표 가장자리를 타고 올라왔다. 글자가 닳은 부분부터 검은 기운이 스며들었다.
[무명 서약문 개방]
[이름표 훼손 시 검문 면제]
[중계소 식당 위치 제공 가능]
현우의 발끝이 멈췄다.
"식당?"
다서연이 급히 말했다.
"현우."
검은 돌판 위로 작은 지도가 떠올랐다. 22층 중계소 안쪽의 짧은 복도. 물 보급 창구. 간단한 식사 표식. 실제로 음식 냄새가 나는 쪽이었다.
현우의 배가 작게 울렸다.
검은 문장은 그 소리를 들은 것처럼 다시 글자를 띄웠다.
[이름 없는 통과자는 대기하지 않음]
[소속 없는 통과자는 분쟁에 묶이지 않음]
[서약 시 즉시 안내]
좋은 말만 적혀 있었다.
그래서 더 수상했다.
현우는 검은 선이 이름표의 마지막 글자 자리를 핥는 것을 봤다. 강현 다음에 비어 있는 자리. 오래 닳아 사라진 자리였다. 그래도 그 자리는 빈칸이 아니었다.
수없이 불리고 수없이 무시당하고 수없이 다시 적힌 자리였다.
현우는 발에 힘을 줬다.
낡은 이름표가 바닥에 딱 붙었다.
"밥은 내 이름으로 먹어."
검은 문장이 멈췄다.
현우는 녹슨 단검을 꺼냈다. 화려한 기술은 필요 없었다. 검은 선은 문장이 아니라 매듭이었다. 이름표를 태우기 전에 붙잡는 첫 매듭.
그는 단검 끝으로 이름표 가장자리에 붙은 검은 선을 긁었다.
[기본 찢기]
[무명 서약문 첫 매듭 접촉]
[서약 전환 중단]
검은 돌판이 갈라졌다.
큰 폭발은 없었다. 검은 선들이 종잇장처럼 말려 올라가더니 천장의 금 간 문장으로 되돌아갔다. 그러나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금은 더 가늘어졌을 뿐 관문 천장에 남았다.
다서연은 곧장 기록판을 눌렀다.
"아르페우스 현장 보고. 22층 예비 관문에서 무명 서약문 추정 문양 확인. 검은 사다리 본체 여부는 미확정. 대상자 강현우는 서약을 거부하고 하위 생존 식별 판정으로 소속 지정 절차를 통과했다."
보고선 너머가 술렁였다.
"대상자를 관문 안에 대기시키십시오. 현장 분석 인력이..."
"길을 막지 않는 조건을 유지한다."
다서연의 말은 짧았다.
"대상자는 이동한다."
현우는 그녀를 힐끗 보았다.
"밥집도?"
"중계소 안쪽에 물 보급 창구가 있다. 식당 표식도 확인됐다."
"확실해?"
"방금 검은 문장이 보여 준 지도와 관문 기록이 일치한다."
"쓸모 있는 문장이었네."
"위험한 문장이다."
"밥집 알려 줬잖아."
다서연은 아주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때 관문 끝의 문이 열렸다.
[22층 예비 관문 임시 통과]
[무소속 생존 통과자]
[정보 안내자 동행 유지]
[상층 기록망 이의 제기 후속 처리]
도율은 더 따라오지 않았다. 적요길드 공략대는 예비 관문 안쪽의 붉은 선에 붙잡혀 있었다. 이의 제기를 유지하는 쪽은 절차를 밟아야 했다. 현우를 붙잡기 위해 만든 절차가 도율의 발목을 먼저 잡고 있었다.
도율이 낮게 말했다.
"강현우. 검은 문장과 엮이면 길드 분쟁보다 위험해진다."
현우는 이름표를 주워 주머니에 넣었다.
"안 엮였어."
"방금 서약문을 찢었다."
"엮이려는 거 잘랐지."
도율은 더 말하지 않았다.
다서연은 현우 옆으로 따라붙었다. 이번에는 바닥이 그녀를 밀어내지 않았다. 푸른 문장은 불안정하게 깜빡였지만 동행 기록은 유지됐다.
문 너머에서 처음으로 다른 냄새가 났다.
미지근한 물 냄새.
오래 끓인 국물이라고 부르기는 애매했지만 그래도 먹을 수 있는 냄새였다. 현우의 걸음이 조금 빨라졌다.
짧은 복도 끝에 안내판이 떠 있었다.
[22층 중계소]
[물 보급 창구]
[간이 식사 배급]
[무소속 생존 통과자 별도 창구]
현우는 마지막 줄을 보고 멈췄다.
"또 별도 창구네."
다서연이 기록판을 내려다봤다.
"별도 창구지만 보급 창구 안쪽이다."
"줄은?"
안내판이 답하듯 한 줄을 더 띄웠다.
[대기 인원: 37명]
현우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밥 앞에서 서른일곱 명?"
그는 주머니 속 이름표를 만지작거렸다.
"이번엔 누가 내 앞에 섰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