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의 1층만 만 년째, 드디어 올라갑니다

23화: 반송할 수 없는 사람
검은 문틈에서 나온 젖은 손이 허공을 긁었다.
손끝 아래에는 미처 완성되지 못한 글자 하나가 떠 있었다.
강.
강현우는 녹슨 단검을 든 손을 내리지 않았다.
"다음 글자 쓰지 마. 손부터 찢긴다."
젖은 손이 움찔했다. 문틈 너머에서 종이를 구기는 소리가 길게 났다.
통로 벽에 붙어 있던 봉투들이 동시에 뒤집혔다. 봉투 안쪽의 검은 글자는 현우를 지나 뒤에 선 사람들의 발밑까지 훑었다.
[수취인 후보 강현... 임시 도착]
[동봉 목록 확인]
[임시 번호 소지자 37명]
17번 소년이 맨발을 한 걸음 뒤로 뺐다. 조금 전까지 끊긴 줄 알았던 숫자 17이 바닥에서 다시 젖은 먹처럼 번졌다.
24번 노인은 물주머니를 품에 바싹 끌어안았다. 비어 있는 주머니가 바스락거리는 소리마저 봉투가 여닫히는 소리와 섞였다.
다서연이 기록판을 들어 올렸다.
"도착 처리는 통과가 아닙니다. 반송물을 목적지에 넣고 보관하는 판정이에요."
기록판 표면에 얇은 글자가 계속 떠올랐다.
[대표 수취인 도착 시]
[동봉 목록 일괄 보관]
[반송 불가 서약 수령 완료]
"내 이름을 쓰면 너희까지 상자 안에 넣겠다는 거네."
현우가 손끝으로 문틈의 첫 글자를 가리켰다.
"싫은데."
검은 문이 소리 없이 조금 더 벌어졌다.
안쪽은 방이라기보다 거대한 보관함 같았다. 벽마다 사람 키만 한 칸이 층층이 파여 있었고 칸마다 젖은 봉투가 꽂혀 있었다. 봉투들 사이에는 번호가 지워진 종이 조각과 구겨진 이름표가 끼어 있었다.
가장 안쪽 칸에서 누군가가 고개를 들었다.
눈도 코도 없었다. 얼굴 자리에 붙은 빈 종이 한 장이 축축하게 흔들렸다. 종이 아래로 젖은 손 둘이 나와 있었다.
한 손은 현우 이름의 첫 글자 위에 떠 있었다. 다른 손은 37명의 번호가 적힌 봉투 더미를 쓰다듬고 있었다.
[원본 보관자]
[반송 불가 서약 수령 절차 진행]
[반송인 서명 필요]
현우가 미간을 찌푸렸다.
"아까는 수취인이라더니 이제 반송인이냐."
빈 종이 얼굴에 검은 글자가 번졌다.
[수취인 부재]
[반송인 서명으로 도착 처리 가능]
[대표 수령자 1명 선택]
위율의 붉은 기록판이 켜졌다가 곧 낮아졌다.
"대표 수령을 적요길드가 맡으면 절차를 늦출 수는 있을 겁니다."
그는 봉투 더미를 보고 말을 고쳤다.
"아닙니다. 길드가 받는 순간 이 사람들은 길드 보관물이 됩니다. 적요길드는 대표 수령을 맡지 않겠습니다."
보관함의 칸들이 덜컹거렸다.
1번 여자의 발밑에서 종이가 솟았다. 종이는 그녀의 발목을 감싸며 앞쪽 보관함을 가리켰다.
[선행 수취 대상]
[대표 수령 권고]
[동봉 목록 보호 가능]
여자는 잠시 뒤를 돌아봤다.
다친 팔을 품은 8번이 벽을 짚고 있었다. 13번은 종이 선을 밟지 않으려 발끝만 들고 있었다. 17번 소년은 자기 번호가 번지는 바닥을 내려다봤다.
여자가 고개를 저었다.
"보호한다는 말로 묶지 마."
종이가 그녀의 발목을 더 세게 조였다.
"혼자 받지 않겠습니다."
현우가 짧게 웃었다.
"잘했어."
그는 주머니 안쪽에서 1층 보급 대기표를 꺼냈다. 닳은 금속 조각은 검문문 앞에서 쓴 탓에 더 휘어 있었다.
현우가 뒤집자 뒷면에 눌려 있던 작은 글자가 희미하게 빛났다. 만 년 동안 보급 창구 앞에서 접혔다 펴진 흔적이었다.
[미수령 보급 반송표]
[수령자 현장 확인]
[대리 수령 불가]
다서연의 눈이 커졌다.
"보급을 못 받은 사람이 직접 줄에 서 있으면 누가 대신 수령하거나 반송할 수 없었던 기록입니다."
"사람을 물건으로 넣으려면 물건 취급부터 받아야겠지."
현우는 대기표를 바닥에 눌렀다.
보관함 바닥의 검은 선이 대기표의 닳은 모서리와 맞물렸다. 봉투 더미가 37명의 번호를 끌어오는 줄은 그 접점에서 처음 굳어 있었다.
현우에게는 그 자리가 너무 선명했다.
[기본 찢기]
[동봉 목록 첫 매듭 접촉]
찍.
대기표와 바닥 사이에서 마른 소리가 났다.
37개의 번호가 한꺼번에 흔들렸다. 젖은 손 하나가 급히 봉투를 끌어안으려 했다.
현우가 뒤를 돌아봤다.
"각자 말해."
17번 소년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이름 말하라는 겁니까?"
"아니. 네가 여기 있다고만 해. 번호는 주지 마."
소년은 바닥에 번진 17을 한참 봤다. 종이 선이 발등 가까이 올라오자 소년은 천천히 발을 앞으로 내밀었다.
"저는 여기 있습니다."
소년의 목소리가 떨렸다.
"제 번호는 안 줍니다."
번지던 숫자가 잠시 멈췄다.
24번 노인이 물주머니를 든 손을 들어 보였다.
"나는 내 발로 받을 거네. 누가 대신 넣어 두지 마."
그의 발밑에서 비틀리던 종이 선이 느슨해졌다.
1번 여자가 곧바로 말했다.
"우린 같이 서 있습니다."
한 사람이 말을 잇자 다른 사람들도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작았지만 보관함 안의 종이 긁는 소리보다 분명했다.
"여기 있어요."
"대신 받지 마요."
"내 발로 갑니다."
다친 사람은 벽을 짚고 말했다. 지친 사람은 고개만 들었다. 그래도 누구도 자기 번호를 부르지 않았다.
[현장 수령 의사 37건]
[대리 수령 거부]
[동봉 목록 분리 중]
보관자의 빈 종이 얼굴이 구겨졌다.
검은 글자가 종이 한복판을 찢고 나왔다.
[반송인 서명 공란]
[강현... 대체 기입]
젖은 손이 다시 움직였다.
이번에는 현우 이름을 공중에 쓰지 않았다. 대기표 위로 검은 먹을 한 방울 떨어뜨리고 그 위에 다음 획을 그리려 했다.
현우는 손가락 대신 손목을 봤다.
젖은 손목 뒤로 가느다란 종이실이 이어져 있었다. 실은 보관함 가장 안쪽의 검은 장부 속으로 들어가 있었다.
"손이 쓰는 게 아니네."
다서연이 기록판을 가까이 댔다.
"원본 보관자는 원본을 가진 게 아닙니다. 기록실에서 내려온 지시를 받아 쓰는 손이에요. 저 실 끝이 원본 첫 장과 연결돼 있습니다."
"그럼 이건 문지기지."
현우가 보관자를 보았다.
"문지기한테 이름 줄 생각 없어."
그는 단검을 손목 쪽으로 밀어 넣었다.
보관자가 양손을 움켜쥐며 봉투들을 들썩였다. 하지만 현우는 손가락도 손목도 찌르지 않았다. 젖은 종이실과 장부가 처음 붙는 자리에만 칼끝을 댔다.
[기본 찢기]
[원본 첫 장 연결선 접촉]
찍.
보관함 전체가 크게 흔들렸다.
젖은 손목은 끊어지지 않았다. 대신 그 뒤에서 늘어진 종이실이 찢어지며 검은 장부 한 장이 칸 밖으로 튀어나왔다.
그 장부 첫 줄에는 현우 이름의 앞부분이 적혀 있었다.
[임시 도착 기록]
[수취인 후보 강현...]
[반송인 기록실 이관 대기]
다서연이 숨을 들이켰다.
"이미 한 장을 만들었습니다. 저 기록이 끝까지 이관되면 현우 씨가 수취인으로 굳고 접힘 거부 생존 통행 효력도 같이 재검토될 수 있어요."
보관자의 종이 얼굴이 크게 벌어졌다. 장부 첫 장이 입 안으로 말려 들어갔다.
현우가 재빨리 장부 모서리를 붙잡았다.
"그건 두고 가."
종이 얼굴이 장부를 삼키려 버텼다. 현우가 잡은 장부 모서리와 보관자의 입 사이에서 젖은 종이가 길게 늘어났다.
보관자는 말을 하지 못했다. 대신 빈 얼굴에 새로운 글자를 띄웠다.
[반송인 기록실 위치 공개]
[통행료: 이름 또는 임시 번호 1건]
보관함 바닥이 갈라졌다.
갈라진 틈 아래로 종이 계단이 드러났다. 계단마다 지워진 이름의 자국과 찢긴 번호표가 얇게 깔려 있었다. 계단 끝은 보이지 않았지만 아래쪽에서 장부 넘기는 소리가 일정하게 올라왔다.
17번 소년이 계단을 내려다봤다.
"또 하나를 내라는 건가요."
현우가 장부 모서리를 놓지 않은 채 말했다.
"안 내."
"그런데 길이..."
"기록을 돌려받으러 가는 길인데 왜 새 기록을 내. 이상하잖아."
그는 통행료 문구 아래를 살폈다.
검은 글자가 종이 계단 첫 칸에 닿는 자리에는 작은 매듭이 있었다. 계단이 사람의 이름을 받는 게 아니라 통행료 문구를 받아야만 열리는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매듭이었다.
현우는 단검 끝을 그 위에 얹었다.
[기본 찢기]
[통행료 문구 첫 매듭 절단]
찍.
계단 위의 검은 글자가 갈라졌다.
[반송 보급표 목적 확인]
[미수령 기록 회수 통행 허가]
[현장 대기자 동행 가능]
바닥을 덮던 번호표들이 계단 가장자리로 밀려났다. 37명의 발밑에 붙어 있던 종이 선도 더는 안쪽으로 당기지 못했다.
위율이 붉은 기록판을 내려다봤다.
"길드 보증 없이도 동행 판정이 유지됩니다."
"당연하지."
현우가 계단을 가리켰다.
"사람이 걷는 건데 길드 도장까지 왜 필요해."
다서연은 노출된 장부 첫 장을 빠르게 베껴 적었다. 그녀의 손끝이 한 줄에서 멈췄다.
"반송인 기록실에 임시 도착 기록이 한 장 보관돼 있습니다. 그리고 이 기록은 아직 수취인명을 기다리는 중이에요."
현우가 고개를 들었다.
"누가 내 이름을 보낸 건지는 적혀 있어?"
다서연이 장부 맨 아래를 읽었다.
[발신자: 확인 불가]
[반송인 기록실 보관]
[강현우 수취인명 완성 대기]
현우의 표정이 천천히 굳었다.
자기 이름을 아는 누군가가 있었다. 단순히 검문문이 우연히 긁어낸 이름 일부가 아니었다. 그 이름을 반송인 기록실까지 보내 둔 손이 따로 있었다.
보관자의 종이 얼굴이 마지막으로 꿈틀거렸다.
[기록 이관 잔여 시간]
[종이 세 장]
계단 아래에서 장부 넘기는 소리가 한 번 났다.
사각.
현우가 단검을 쥔 손에 힘을 줬다.
"발신자부터 찾는다."
그는 종이 계단 첫 칸을 밟았다.
뒤에서 1번 여자가 사람들을 정리했다. 빠른 사람은 앞에 서지 않고 다친 사람 곁에 섰다. 17번 소년은 더는 바닥의 숫자를 보지 않았다.
다서연이 기록판을 품에 안고 현우 뒤를 따랐다.
"세 장이 넘어가기 전에 기록실에 닿아야 합니다."
"알아."
현우가 어둠을 향해 말했다.
"이번에는 우편함 주인보다 먼저 장부부터 찢는다."
계단 아래에서 종이가 한 장 더 넘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