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의 1층만 만 년째, 드디어 올라갑니다

2화: 2층의 첫 발
빛이 걷히자 흙냄새가 먼저 들어왔다.
강현우는 한동안 숨을 들이마셨다. 1층에도 흙은 있었다. 수없이 밟아 으깬 초원의 흙과 보스 방 돌가루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 코끝을 스치는 냄새는 달랐다.
젖은 나뭇잎, 식은 피, 낯선 마력.
그리고 사람의 땀 냄새.
현우는 발밑을 내려다봤다. 푸른 계단은 사라지고 숲길이 이어져 있었다. 굵은 나무들이 양쪽에 서 있었고 가지 사이로 붉은 하늘이 보였다. 멀리서는 짐승 울음이 낮게 번졌다.
[2층에 도착했습니다.]
[구역: 회색갈기 숲 초입]
[초보 도전자 보호 권고: 파티 구성]
현우는 창을 손등으로 밀어냈다.
"또 파티 타령이네."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비명이 들렸다.
"막아! 왼쪽 비었다!"
사람 목소리였다.
현우의 눈이 아주 조금 가늘어졌다. 만 년 동안 그에게 달려든 것은 슬라임과 고블린과 늙은 홉고블린뿐이었다. 사람 목소리는 기억 속에서만 낡아가던 물건이었다.
그는 걷기 시작했다.
숲은 길을 숨기려 했다. 덩굴이 발목을 감고 나뭇가지가 얼굴을 긁는 높이로 뻗었다. 현우는 멈추지 않았다. 덩굴은 닿기 전에 끊겼고 가지는 스스로 비켜난 것처럼 양옆으로 젖혀졌다.
비명은 가까워졌다.
작은 공터에 네 명이 있었다. 셋은 이미 쓰러져 있었고 한 명만 방패를 들고 서 있었다. 젊은 남자였다. 입술은 질려 있었고 손목은 떨렸다. 그래도 방패는 내리지 않았다.
그들을 둘러싼 것은 회색 털의 늑대 여섯 마리였다. 등줄기에 희미한 검은 줄무늬가 있었고 이빨 사이로 푸른 마력이 새어 나왔다.
공터 가장자리에는 부러진 나무 표지판이 박혀 있었다.
[2층 공략 파티 등록소: 직진 300보]
현우는 표지판과 쓰러진 도전자들을 번갈아 봤다.
등록소 가는 길부터 이 모양이라.
"야! 거기!"
방패를 든 남자가 현우를 보고 소리쳤다.
"신입이면 도망쳐! 여긴 보스 무리야!"
현우는 자신의 옷차림을 내려다봤다. 낡은 가죽 아머, 녹슨 단검, 튜토리얼 지급품 그대로였다.
"신입처럼 보이나."
"그럼 뭐로 보여! 뒤로 빠져!"
남자는 그렇게 외치면서도 늑대의 돌진을 방패로 받았다. 충격에 발이 밀렸다. 뒤에 쓰러진 여자가 신음을 흘리자 남자는 이를 악물고 다시 앞을 막았다.
"성진아, 너라도 가."
쓰러진 남자 하나가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닥쳐. 다 같이 등록소 간다고 했잖아."
방패 남자, 이성진이 방패를 고쳐 쥐었다.
현우는 그 모습을 보다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버티는 자세는 괜찮네."
"평가하지 말고 뛰라고!"
늑대 셋이 동시에 움직였다.
왼쪽 놈은 미끼였다. 오른쪽 놈은 발목을 물기 위한 낮은 돌진. 중앙 놈은 방패가 내려가는 순간 목을 노리는 진짜 공격.
1층 고블린 협공보다 느렸다.
현우가 한 걸음 앞으로 나갔다.
그 한 걸음에 공터의 공기가 눌렸다. 왼쪽 늑대의 발이 허공에서 멈칫했다. 오른쪽 늑대는 자신이 달리던 방향을 잊은 것처럼 땅에 턱을 박았다. 중앙 늑대의 목덜미에는 어느새 녹슨 단검의 끝이 닿아 있었다.
"셋이 오면 셋 다 각도가 달라야지."
현우가 말했다.
"이건 협공이 아니라 줄 서기야."
단검이 흔들렸다.
세 마리의 늑대가 동시에 바닥으로 떨어졌다. 피가 크게 튀지도 않았다. 마력의 결만 끊겼다. 늑대들은 신음 한 번 내지 못하고 흩어지는 재처럼 무너졌다.
[회색갈기 늑대를 처치했습니다.]
[회색갈기 늑대를 처치했습니다.]
[회색갈기 늑대를 처치했습니다.]
이성진의 입이 벌어졌다.
"뭐야, 당신."
"지나가던 사람."
"2층에서 지나가던 사람이 늑대를 그렇게 잡아?"
현우는 대답하려다 고개를 돌렸다.
숲 안쪽에서 더 무거운 발소리가 났다. 남은 늑대들이 일제히 납작 엎드렸다. 쓰러진 도전자들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졌다.
검은 털이 먼저 보였다.
보통 늑대보다 두 배는 큰 마수가 공터로 들어왔다. 등 전체가 그을린 것처럼 검었고 이마에는 뿔 비슷한 뼈가 솟아 있었다. 발을 디딜 때마다 땅에 원형의 마력 문양이 피어났다.
[F급 구역 보스: 검은등 늑대 출현]
[공포 포효를 준비합니다.]
[초보 도전자는 즉시 방어 태세를 취하십시오.]
이성진의 목소리가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망했다. 저건 파티 둘이 붙어야 하는 놈인데."
"둘?"
"여덟 명이요. 최소 여덟."
검은등 늑대가 머리를 젖혔다.
포효가 터졌다. 공터 전체가 흔들렸다. 쓰러진 도전자들이 귀를 막고 몸을 웅크렸다. 이성진도 무릎을 꿇었다. 방패를 세우려던 팔이 힘없이 내려갔다.
현우만 그대로 서 있었다.
그는 귀를 후볐다.
"소리만 크네."
[공포 판정 적용 중.]
[대상자의 초보자 정신 저항 수치를 탐색합니다.]
[탐색 실패.]
[대상자에게 적용 가능한 초보자 공포 판정이 없습니다.]
검은등 늑대의 포효가 삐걱거리며 끊겼다. 마력 문양 하나가 깨진 접시처럼 갈라졌다.
현우는 한숨을 쉬었다.
"1층 홉고블린도 처음엔 소리 좀 질렀거든. 그래도 걔는 창이라도 잘 찔렀다."
검은등 늑대가 뛰었다.
빠르긴 했다. 초보 도전자들에게는 보이지도 않을 속도였다. 하지만 현우의 시야에서는 너무 많은 예고가 있었다. 어깨 근육의 떨림, 앞발이 밟은 흙의 깊이, 마력 문양이 돌아가는 각도, 이빨 사이로 모인 살기.
전부 친절했다.
[회피 불가 돌진 패턴이 발동됩니다.]
[경고: 방어 권장]
"회피 불가?"
현우는 피식 웃었다.
"그 말도 오랜만이네."
그의 발끝이 흙을 살짝 눌렀다. 1층에서 수억 번 밟았던 회피의 첫 박자였다. 시스템이 회피 불가라고 부른 선이 그의 발밑에서 접혔다.
현우는 반걸음 옆으로 비켜섰다.
늑대의 발톱이 그의 가죽 아머를 스치지도 못했다. 현우의 단검은 아래에서 위로 짧게 올라갔다. 찌르기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한 기본 동작이었다.
검은등 늑대의 거대한 몸이 공중에서 멈췄다.
그리고 가루가 됐다.
공터에 있던 마력 문양들이 한꺼번에 꺼졌다.
[F급 구역 보스 검은등 늑대를 처치했습니다.]
[처치 기여도 산정 중.]
[단독 처치.]
[비정상 전투 로그 감지.]
현우는 단검을 허리춤에 꽂았다.
"F급이면 튜토리얼 다음 단계 맞나?"
이성진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는 현우와 사라진 보스 자리를 번갈아 봤다.
"당신 대체 몇 층에서 내려온 랭커입니까?"
"올라온 건데."
"예?"
"1층에서."
공터가 조용해졌다.
누군가 기침을 했다. 쓰러졌던 여자 도전자가 반쯤 몸을 일으키다가 다시 주저앉았다.
"1층이라고요?"
이성진은 웃지도 못했다.
"그 장비가 진짜 튜토리얼 장비였습니까?"
"그렇지."
"그럼 왜 검은등 늑대가 한 방에 죽습니까?"
현우는 잠깐 생각했다.
"약해서?"
이성진의 표정이 무너졌다.
그때 시스템 창이 현우 앞에 다시 떠올랐다. 이번에는 하얀 창 뒤쪽에서 검은 줄이 가느다랗게 번졌다.
[비정상 처치 기록을 상층 관리 규칙에 전송합니다.]
[전송 실패.]
[대상자의 1층 판정 우선권이 상층 기록 양식과 충돌합니다.]
현우는 검은 줄을 손가락으로 눌렀다. 창이 질린 것처럼 흐려졌다.
"또 숨기는 말이 있네."
이성진은 그가 시스템 창을 만지는 것을 보고 완전히 굳었다.
"창을... 만졌습니까?"
"이것도 못 만져?"
"못 만집니다. 보통은."
"불편하겠네."
현우는 주변을 돌아봤다. 쓰러진 도전자들은 목숨은 붙어 있었다. 팔이 부러진 사람 하나, 옆구리에 물린 사람 하나, 마력 탈진으로 눈이 풀린 사람 하나. 죽을 상처는 아니었다.
이성진이 급히 고개를 숙였다.
"저는 이성진입니다. 신입 도전자고 방금은 정말 살려주셔서..."
"감사는 됐고 길이나 알려줘."
"길이요?"
"위로 가는 길."
이성진은 멍하니 현우를 보았다.
"2층 출구 말입니까?"
"응."
"여기서 바로 못 갑니다. 공략 파티 등록소에서 구역 통행증을 받고 붉은 이정표를 지나야 합니다. 보통은 며칠 걸리고 보스 기록도 제출해야 합니다."
현우의 미간이 아주 조금 좁아졌다.
"또 서류야?"
"서류라기보단 생존 확인 절차입니다. 그런데 형님은 절차보다 먼저 관리국 사람들이 찾으러 올 것 같습니다."
"형님?"
이성진은 자신도 모르게 말을 바꾼 걸 깨닫고 얼굴을 붉혔다.
"아니, 은인님. 아니 선배님. 뭐라고 불러야 합니까?"
"현우."
"현우 형님."
"줄이지 마."
"강현우 님."
현우는 귀찮다는 듯 손을 저었다.
이성진은 부상자들을 살피고 다시 그에게 다가왔다. 눈에는 아직 공포가 남아 있었지만 그보다 큰 것이 있었다. 방금 본 것을 놓치면 평생 후회할 것 같은 절박함이었다.
"제가 등록소까지 안내하겠습니다. 혼자 가시면 더 귀찮은 일 생깁니다. 2층은 신입이 모르는 규칙이 많습니다."
"규칙은 별로 안 좋아하는데."
"그래도 밥 파는 곳은 압니다."
현우가 멈췄다.
만 년 동안 먹은 것은 시스템이 던져준 무미건조한 보급식과 슬라임 젤리 비슷한 것들뿐이었다. 맛이라는 단어가 기억보다 더 오래 말라 있었다.
"밥?"
"등록소 옆에 식당이 있습니다."
현우는 이성진을 처음으로 조금 진지하게 봤다.
"안내해."
이성진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숲 너머 붉은 이정표가 보였다. 그 위에는 2층 공략 파티 등록소라는 글자가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현우가 걸음을 옮기자 늑대들이 남긴 마력 잔재가 길 양옆으로 갈라졌다.
그 순간 하늘 높은 곳에서 아무도 보지 못한 창 하나가 떠올랐다.
[2층 초입 보스 단독 처치 기록 갱신.]
[기록 소요 시간: 3초]
[기록 등급 판정 불가.]
현우는 그 창을 보지 못했다.
대신 오래간만에 사람 사는 곳으로 향했다.
그는 짧게 물었다.
"거기 고기 있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