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의 1층만 만 년째, 드디어 올라갑니다

15화: 정산 회랑은 밥 냄새가 안 난다
정산 회랑에는 밥 냄새가 없었다.
현우는 문턱을 밟자마자 그 사실부터 알았다. 불씨갈비수의 재 냄새는 뒤쪽 전장에 남았고 앞쪽에는 마른 종이와 차가운 쇠 냄새만 가득했다.
벽은 검은 돌이었다. 천장에는 흰 문양들이 길게 늘어져 있었다. 문양들은 눈처럼 깜빡이지 않았다. 그 대신 지나가는 사람의 숨과 발소리를 하나씩 세는 듯 희미하게 밝아졌다.
현우는 그 문양들을 보고 바로 표정을 구겼다.
몬스터보다 귀찮은 얼굴이었다.
회랑 가운데에는 돌기둥 세 개가 솟아 있었다. 왼쪽 기둥에는 적요길드의 붉은 문장이 떠 있었다. 오른쪽 기둥에는 아직 이름이 붙지 않은 빈 칸이 있었다. 가운데 기둥에는 전장에서 본 글자가 다시 떠올랐다.
[20층 레이드 정산 회랑]
[선점 기록: 적요길드]
[처치 결정 기여도 1위: 강현우]
[공략권 이의 제기 가능]
현우는 돌기둥보다 회랑 끝을 먼저 보았다.
문이 있었다.
문 너머에서 따뜻한 국물 냄새는 나지 않았다. 그래도 문은 문이었다. 넘어가면 다음 층이었다.
"그냥 가면 안 되냐."
다서연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녀는 기록판과 회랑 바닥을 번갈아 보았다. 바닥에는 저울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한쪽 접시에는 적요길드의 선점 기록이 올라갔다. 다른 한쪽 접시에는 현우의 이름이 올라갔다.
두 접시는 어느 쪽도 완전히 내려가지 않은 채 떨고 있었다.
도율이 창대를 바닥에 세웠다.
"정산 전 이동은 불가능하다. 적요길드가 선점한 레이드다."
"잡은 건 저쪽 뼈였고 뼈는 무너졌고 문도 열렸잖아."
"그게 문제가 아니다."
"그럼 더 문제네."
도율의 얼굴이 굳었다.
전장에서는 부하를 살리기 위해 현우의 말을 들었다. 그러나 회랑에서는 다시 길드의 대장으로 서야 했다. 적요길드 공략대원들도 그의 뒤에 모여 있었다. 손목에 남은 검푸른 자국은 사라졌지만 눈빛은 아직 전장을 빠져나오지 못했다.
다서연이 낮게 말했다.
"20층 이후에는 레이드 보상과 공략권이 이동 조건에 묶인다. 선점 기록과 처치 기여가 갈라지면 회랑이 보류 판정을 건다."
"얼마나 걸리는데."
"보통은 길드 간 조정으로 하루 이상이다."
현우의 눈이 처음으로 차갑게 식었다.
"밥을 하루 뒤에 먹으라고?"
도율이 이를 악물었다.
"비등록 예외 대상의 보상 수령 자격부터 확인해야 한다. 너는 적요길드 공략대원이 아니었다."
회랑 가운데 돌기둥이 도율의 말을 받아 적었다.
[이의 제기 접수 대기]
[사유: 비등록 대상의 레이드 보상 수령 자격 불명]
[이의 제기 시 다음 층 이동권 임시 동결]
적요길드 공략대원 하나가 작게 숨을 내쉬었다.
그들은 보스를 빼앗겼다고 생각하는 눈빛이 아니었다. 기록을 지키려는 눈빛이었다. 현우가 가져간 것은 보상 상자가 아니었다. 그래도 기여도 1위라는 글자는 길드 문장 위에 난 금처럼 보였다.
다서연은 기록판에 손가락을 댔다.
"아르페우스 현장 보고. 강제 충돌 금지 유지. 적요길드 이의 제기 가능성 확인. 비등록 예외 대상의 처치 결정 판정은 생존 우선 판정과 결합된 상태."
기록판 너머에서 짧은 침묵이 흘렀다.
현우는 그 사이에 회랑 바닥을 내려다봤다.
문양은 복잡했지만 낯설지는 않았다. 1층에도 정산은 있었다. 고블린을 잡고 돌아오면 낡은 기록석이 하루치 보급을 나눴다. 몇 번을 돌아도 똑같은 빵과 물이 나왔다.
처음에는 기뻤다.
나중에는 화가 났다.
아주 나중에는 어느 칸이 먼저 열리는지 외워 버렸다.
보상 상자보다 먼저 열리는 칸이 있었다.
생존 보급.
그건 상이 아니었다. 다음 시도 전에 죽지 말라고 던져 주는 최소 지급품이었다. 탑은 공정하지 않았지만 죽은 사람에게 보상을 줄 수는 없다는 정도는 알고 있었다.
현우는 주머니를 뒤졌다.
다서연의 시선이 따라왔다.
"금화인가?"
"식권."
"식권?"
현우는 낡은 가죽 조각을 꺼냈다.
정확히는 식권이었다고 주장하기 힘든 물건이었다. 모서리는 닳았고 글자는 거의 지워져 있었다. 그래도 중앙에는 희미하게 찍힌 문구가 남아 있었다.
[1층 튜토리얼 생존 보급권]
[미수령 잔여 판정]
도율이 어이없다는 얼굴로 웃었다.
"20층 레이드 정산 회랑에서 1층 식권을 쓰겠다고?"
"밥 달라며."
"그건 보상이 아니다."
"그러니까 먼저 줘야지."
회랑의 저울 문양이 멈췄다.
도율의 웃음도 멈췄다.
돌기둥 위의 글자가 한 줄씩 바뀌었다.
[튜토리얼 지급품 감지]
[생존 보급 미수령 권한 확인]
[레이드 보상 분류와 별도 처리 가능]
다서연의 눈이 커졌다.
"보상 정산이 아니라 생존 보급 정산으로 우회한다."
"우회 아니야. 배고파서 받는 거야."
"그게 우회다."
현우는 식권 조각을 가운데 돌기둥에 붙였다.
돌기둥은 적요길드 문장과 현우 이름 사이에서 잠깐 흔들렸다. 보상 상자를 열지 않으면 적요길드의 이의 제기는 바로 확정될 수 없었다. 그러나 생존 보급은 이의 제기 대상이 아니었다.
정산 회랑은 길을 막기 위해 만들어진 곳이 아니었다.
죽은 자와 산 자의 보상을 나누고 다음 층으로 올릴 사람을 정하는 곳이었다. 산 자에게 최소 보급을 주는 판정은 길드 체면보다 먼저였다.
도율이 창대를 들었다.
"그 판정은 레이드 보상 회피다."
다서연이 한발 앞으로 나섰다.
"강제 충돌 금지."
도율은 그녀를 보았다.
"아르페우스가 적요길드 정산에 개입하겠다는 건가."
"아니다. 현장 생존권 판정을 방해하지 말라는 보고를 유지하는 것이다."
도율의 손가락이 창대를 파고들었다. 그는 현우를 보지 않았다. 돌기둥 위의 글자를 보았다. 거기에 적힌 것은 패배가 아니었다. 그래서 더 나빴다. 적요길드는 선점 기록을 잃지 않았다. 그런데도 회랑은 현우를 먼저 읽고 있었다.
현우는 두 사람 사이의 긴장을 별로 보지 않았다.
그는 돌기둥 아래 작은 틈을 보고 있었다. 틈 안에서 오래된 기계가 움직이는 소리가 났다. 종이가 말려 올라가고 쇠가 긁혔다. 잠시 뒤 무언가 딱딱한 것이 떨어졌다.
작은 보급 상자가 나왔다.
상자 안에는 딱딱한 빵 하나와 미지근한 물주머니가 있었다.
현우는 빵을 집어 들었다.
"이거지."
도율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걸 받으면 레이드 보상은?"
돌기둥이 대답했다.
[레이드 보상 본정산 보류]
[공략권 이의 제기 상층 기록망 이관]
[생존 보급 지급 완료]
[21층 임시 이동권 발급]
회랑 끝의 문양이 열렸다.
적요길드 공략대가 동시에 술렁였다. 그들이 지키려던 선점 기록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현우의 발목을 붙잡던 정산 동결은 풀렸다. 길드가 싸울 보상은 위로 올라갔고 현우가 지나갈 길은 아래에서 열렸다.
다서연은 기록판을 꽉 쥐었다.
"아르페우스 현장 보고 갱신. 강현우는 보상 본정산을 선택하지 않고 생존 보급 미수령 판정으로 21층 임시 이동권을 받았다. 분류명 확인."
기록판 위에 흰 글자가 떠올랐다.
[비등록 예외 대상]
[정산 우선 생존권 보유자]
다서연은 그 문장을 오래 보았다.
비등록 예외 대상이라는 말만으로는 부족해졌다. 현우는 규칙 밖의 괴물이 아니었다. 규칙의 가장 낮은 곳에서 시작해 너무 오래 눌어붙은 사람에 가까웠다. 그래서 높은 층의 절차가 그를 막으려 할 때마다 더 오래된 판정이 먼저 고개를 들었다.
도율은 창을 내렸다.
"적요길드는 정식 이의 제기를 유지한다."
"그래."
"상층 기록망이 네 이름을 볼 것이다."
"이름은 이미 있잖아."
현우는 빵을 한입 베어 물었다.
딱딱했다.
그래도 먹을 수는 있었다. 만 년 동안 1층에서 받은 보급빵보다는 조금 나았다. 아주 조금.
다서연이 조용히 물었다.
"정말 보상 상자는 안 볼 건가?"
"밥 먹고 보면 안 돼?"
"본정산으로 넘어가면 지금보다 더 오래 붙잡힐 수 있다."
"그럼 안 봐."
다서연은 대답하지 못했다.
도율도 더 말하지 않았다. 직접 막으면 강제 충돌이 된다. 회랑도 이미 생존 보급 지급을 끝냈다. 남은 것은 상층 기록망과 길드 체면뿐이었다.
현우는 물주머니를 허리에 걸고 회랑 끝으로 걸었다.
문 가까이 가자 새로운 냄새가 났다.
휴게소 냄새가 아니었다. 음식도 불도 사람 많은 쉼터의 눅눅한 냄새도 아니었다.
차가운 금속과 젖은 돌 냄새.
문 위에 글자가 켜졌다.
[21층 진입]
[선별 구역]
[임시 이동권 소지자 우선 검문]
[동행자 기록 재확인]
현우는 빵을 씹다가 멈췄다.
"검문?"
다서연의 얼굴이 굳었다.
도율이 뒤에서 낮게 말했다.
"21층부터는 탑이 사람을 고른다."
현우는 열린 문 안쪽을 보았다.
밥 냄새는 여전히 없었다.
"탑도 입맛이 까다롭네."
그는 빵을 든 채 21층 문턱을 밟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