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의 무기들이 나한테만 말을 걸어

27화: 첫 음을 불어
임시 보존실의 공기는 병실보다 더 차가워 보였다.
화면 속 하프는 투명 보존대 위에 놓여 있었다. 선반 다리 밑에서 겨우 빠져나왔지만 편해 보이지 않았다. 휘어진 몸통은 한쪽으로 기울었고 끊어진 현들은 말라붙은 풀줄기처럼 목재 옆에 달라붙었다.
현장 보존팀원이 말했다.
"받침 제거 완료했습니다. 표면 먼지 제거를 시작하겠습니다."
그가 아주 부드러운 붓을 들었다.
팅.
시우의 손가락이 이불을 파고들었다.
아니.
이번에는 단어가 분명했다. 짧고 약했지만 거절이었다.
"멈춰 주세요."
윤채아가 곧바로 명령했다.
"현장팀. 접촉 중지."
보존팀원의 붓이 하프 몸통 위에서 멈췄다.
"표면 오염 제거도 안 됩니까?"
시우는 화면을 똑바로 보려 했다. 눈앞이 조금 흐려졌지만 하프의 떨림은 오히려 선명했다. 아이기스가 대장간 문턱에서 방패를 세웠다.
뒤에 있어라.
"먼지가 아니에요. 저건 덮인 게 아니라 막힌 거예요."
에제키엘의 반사면이 병실 천장을 비추더니 화면 속 하프의 음향공을 겹쳐 보여 주었다. 먼지처럼 보였던 회색 막 아래 검은 얼룩이 있었다. 얼룩은 숨구멍을 막은 밀랍처럼 음향공 안쪽에 눌어붙어 있었다.
에제키엘이 차갑게 말했다.
먼지를 흉내 낸 봉인 때입니다. 품격도 없고 손재주도 없습니다.
아스칼론이 숫돌대 위에서 이를 갈았다.
노래 못 하게 입을 틀어막아 놓고 먼지라고 부른 거냐.
글레니르의 사슬이 낮게 흔들렸다.
매듭은 순서대로 풀어야 한다.
윤채아가 보존팀에 말했다.
"표면 제거 금지. 확대 영상으로 전환하세요. 음향공 내부와 남은 현 매듭을 먼저 비춥니다."
화면이 가까워졌다.
하프의 몸통 아래쪽에는 남은 현 두 줄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묶여 있었다. 한 줄은 너무 팽팽해서 살짝만 건드려도 끊어질 듯했고 다른 한 줄은 늘어져 있었지만 매듭 끝이 음향공 안쪽으로 들어가 있었다.
시우는 아주 작게 물었다.
"어떻게 해 주면 돼?"
팅.
먼저.
"먼저?"
불어.
병실에 있던 사람들이 동시에 조용해졌다.
백은서의 통신이 떨렸다.
"분석관님. 보존실에 저압 정화 송풍 장비 있습니다. 유물 건식 세척용입니다."
윤채아가 시우를 보았다.
"가능합니까?"
"직접 닿는 것보다 나아요. 세게 말고요. 아주 약하게. 숨처럼."
보존팀원이 고개를 갸웃했다. 규정표를 보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정화 송풍은 표준 압력보다 낮추면 효율이 떨어집니다."
"효율 말고 하프가 버틸 수 있는지가 먼저예요. 닦아 내는 게 목적이면 또 다칠 수 있어요."
시우의 목소리는 아직 작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림자의 계약이 서명대 위에 문장을 세웠다.
허락 없는 침묵은 보존이 아니다.
윤채아가 말했다.
"표준값 무시합니다. 감응 대상 반응을 우선합니다. 최저 압력에서 시작하세요."
현장팀원이 장비를 가져왔다. 가느다란 노즐이 하프의 음향공 앞에 멈췄다.
그 순간 보존실 문 위의 상태등이 노랗게 바뀌었다.
마도윤의 통신이 날카롭게 들어왔다.
"분석관님. 반출 게이트 상태값이 다시 열립니다. 물리 잠금은 걸려 있는데 시스템에서 외부 연구 반출 대기열이 복구됩니다."
백은서가 바로 이어 말했다.
"접속 위치 없습니다. 작성자도 없습니다. 그런데 명령 형식은 경매 관리팀 내부 양식입니다."
에제키엘의 반사면에 보존실 문이 비쳤다. 문 위 노란 상태등 아래 아주 얇은 검은 선이 떠올랐다. 뒤집힌 왕관의 곡선이었다.
글레니르가 사슬을 당겼다.
문도 길이다.
아스칼론이 으르렁거렸다.
문이면 베면 되지.
"안 돼요. 보존실 안에 하프가 있어요."
시우는 숨을 고르고 말했다. 목 안쪽이 긁혔지만 이번에는 말을 삼키지 않았다.
"하프가 소리를 내면 길이 보일 것 같아요. 막힌 게 소리라면 길도 소리 쪽에 묶였을 거예요."
윤채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근거는요?"
"쟤가 첫 음을 원했어요. 그냥 살려 달라는 게 아니라 처음 소리를 내야 하는 거예요."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하프의 남은 현이 아주 희미하게 떨렸다.
맞아.
이번에는 시우 혼자만 들었지만 대장간 전체가 그 작은 대답을 알아들은 듯했다.
아이기스가 방패를 조금 낮췄다.
뒤에 있되 말은 해라.
윤채아가 결정을 내렸다.
"마도윤 대장. 반출 게이트 물리 봉쇄 유지. 백은서 주무관. 상태값 복구 로그 실시간 저장. 현장팀은 송풍 준비."
"예."
"강시우 군. 한 문장씩만 지시합니다."
시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보존실의 송풍 노즐이 음향공 앞에서 더 낮아졌다.
"바로 안쪽 말고 왼쪽 아래부터요. 먼지가 아니라 막을 들춘다고 생각해 주세요."
바람이 흘렀다.
하프 몸통 위에 붙어 있던 회색 가루가 아주 조금 일어났다. 평범한 먼지였다면 흩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얇은 껍질처럼 들리더니 다시 눌어붙으려 했다.
그림자의 계약이 문장을 바꿨다.
말을 빼앗은 막은 숨을 소유하지 못한다.
검은 막이 아주 미세하게 갈라졌다.
팅.
아파.
"멈춰요."
송풍이 멈췄다.
시우는 이를 악물었다. 목 안쪽이 뜨거웠다. 윤채아가 생체 수치를 확인하고 눈썹을 찌푸렸다.
"여기서 중단해도 됩니다."
"지금 멈추면 다시 닫혀요."
"몸 상태가 우선입니다."
"하프도 몸이에요."
병실 공기가 잠깐 멈췄다.
시우는 바로 덧붙였다.
"저 오래 안 해요. 순서만요."
윤채아는 짧게 숨을 내쉬었다.
"두 번 더. 그 이상은 중단합니다."
시우는 대장간 안쪽을 보았다. 글레니르의 사슬 끝이 하프의 현 매듭과 같은 모양으로 꼬여 있었다.
글레니르가 말했다.
느슨한 매듭을 먼저 풀면 팽팽한 현이 끊긴다. 팽팽한 현을 자르면 입이 닫힌다. 가운데를 눌러 숨길을 열어라.
"현을 풀지 마세요. 먼저 몸통 가운데를 아주 살짝 받쳐 주세요. 휘어진 곳이 내려앉지 않게."
현장팀원이 작은 무진동 받침을 밀어 넣었다.
하프의 몸통이 아주 조금 올라왔다.
팅.
차가워.
"알아요. 조금만 더."
시우는 두 번째 지시를 냈다.
"늘어진 현 끝이 음향공 안쪽에 들어가 있어요. 당기지 말고 매듭 아래를 바람으로 들어 올려 주세요."
송풍이 다시 흘렀다.
늘어진 현 끝이 먼지와 함께 아주 조금 떠올랐다. 그 밑에서 검은 봉인 때가 실처럼 늘어졌다.
에제키엘이 말했다.
지금입니다. 반사각이 열렸습니다.
반사면에 보존실 문과 하프의 음향공이 동시에 비쳤다. 음향공 안쪽에서 나온 검은 실은 보존실 문 상태등 아래로 이어져 있었다. 문서가 아니라 소리의 길을 막아 반출 게이트로 묶어 둔 흔적이었다.
백은서가 숨을 삼켰다.
"로그가 바뀝니다. 반출 대기열이 하프 상태값이 아니라 음향 상태값에 묶여 있어요."
윤채아가 차갑게 말했다.
"소리를 못 내는 상태를 반출 조건으로 걸어 둔 겁니까."
아스칼론이 웃었다.
비겁한 놈들답군. 입 막아 놓고 대답 없다고 끌고 가는 방식이다.
시우는 화면 속 하프를 보았다.
"이제 마지막이에요. 괜찮아?"
하프는 한참 대답하지 못했다.
남은 현 두 줄이 미세하게 떨렸다. 팽팽한 현은 끊어질 듯 울었고 느슨한 현은 음향공 가장자리에서 겨우 버텼다.
그리고 아주 작은 목소리가 왔다.
첫 음.
"응. 첫 음."
시우는 눈을 감았다.
병실이 사라지고 대장간의 공기가 코끝에 닿았다. 그는 실제로 하프 앞에 있지 않았다. 손으로 먼지를 털 수도 없고 입으로 숨을 불어 넣을 수도 없었다.
하지만 하프는 바람을 원한 게 아니었다.
먼저 물어보는 숨을 원했다.
"불어도 돼?"
짧은 침묵 뒤 하프가 대답했다.
돼.
시우가 말했다.
"최저 압력보다 더 낮춰 주세요. 한 번만. 길게 말고 숨 한 번처럼."
윤채아가 현장팀을 보았다.
"실행."
바람이 흘렀다.
그것은 소리보다 먼저 먼지를 흔들었다. 회색 막이 음향공 안쪽에서 벗겨졌다. 검은 봉인 때가 찢기며 보존실 바닥으로 떨어졌다. 늘어진 현 끝의 매듭이 풀리고 팽팽했던 현이 한순간 부드럽게 낮아졌다.
팅.
이번 소리는 달랐다.
낡은 하프가 낸 첫 음은 크지 않았다. 그러나 병실 스크린이 파르르 떨렸고 영혼의 대장간 벽에 걸린 모든 무기들이 동시에 고개를 든 것처럼 빛났다.
하프의 몸통 위로 황혼빛 선이 번졌다. 검게 죽어 있던 테두리의 조각 장식이 하나씩 살아났다. 끊어진 현들이 모두 돌아온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남은 두 줄 사이로 보이지 않는 현들이 빛의 선처럼 걸렸다.
관리국 단말기가 울렸다.
[감응 대상: 강시우]
[미등록 고대 아티팩트 진명 반응]
[진명 개방: S급 첫숨의 황혼 하프]
하프의 목소리가 대장간 안에 조심스럽게 내려앉았다. 처음으로 단어가 아니라 마음의 모양을 갖춘 소리였다.
나는 버려진 노래가 아니야.
시우의 눈가가 뜨거워졌다.
"응. 아니야."
하프의 첫 음이 다시 울렸다.
이번에는 소리가 지도처럼 퍼졌다. 보존실 바닥의 먼지가 원형으로 밀려나며 검은 선들을 드러냈다. 선들은 반출 게이트 아래로 이어졌고 그중 하나는 화면 밖 태양 물류 승인 창이 있던 방향으로 뻗었다.
백은서가 빠르게 말했다.
"잔향이 경로를 표시합니다. 보관소 하부 반출로 하나. 외부 물류망 연결 흔적 하나. 그리고..."
그녀의 목소리가 멈췄다.
"관리국 내부 접속 단자 하나입니다."
병실이 조용해졌다.
윤채아는 단말기를 닫지 않았다.
"전부 봉쇄합니다. 경매 관리팀은 지금부터 내부 감찰 대상입니다."
마도윤의 통신이 낮게 깔렸다.
"보안대 방향 전환합니다."
아스칼론이 기분 나쁘게 웃었다.
안쪽에도 벌레가 있었군.
에제키엘은 반사면을 닦아 달라는 듯 빛을 세웠다.
벌레라는 표현은 품격이 낮지만 정황은 맞습니다.
글레니르의 사슬이 새로 드러난 선 하나를 묶었다.
길은 숨을 따라 남는다.
그림자의 계약은 서명대 위에 마지막 문장을 남겼다.
첫 음을 들은 문은 거짓 침묵으로 닫히지 않는다.
시우는 힘이 빠져 베개에 머리를 묻었다.
윤채아가 바로 말했다.
"감응 종료."
화면 속 하프는 보존대 위에 조용히 놓여 있었다. 아직 낡았고 아직 부서진 곳이 많았다. 그래도 더는 받침처럼 보이지 않았다.
하프가 아주 작게 속삭였다.
고마워.
시우는 눈을 감은 채 대답했다.
"다음엔 네가 어디서 끌려왔는지도 물어볼게."
하프의 황혼빛 현이 한 번 더 떨렸다.
그리고 보존실 바닥 아래에서 드러난 검은 선 하나가 아직 묶이지 않은 채 천천히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