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의 무기들이 나한테만 말을 걸어

24화: 스카우트 보류
윤채아의 단말기는 꺼져 있어도 울렸다.
정확히는 화면이 꺼진 뒤에도 진동이 멎지 않았다. 병실 책상 위에 엎어 둔 단말기가 짧게 떨릴 때마다 영혼의 대장간 천장에 매달린 글레니르의 사슬도 아주 작게 흔들렸다.
시우는 눈을 감은 채 물었다.
"또 길드예요?"
"길드, 협회 산하 재단, 민간 연구소, 이름만 재단인 길드 계열 회사까지 섞였습니다."
윤채아는 알림 목록을 훑다가 바로 보류 표시를 눌렀다.
"전부 면담 불가."
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손끝은 바빴다. 제한 발언 뒤 시우의 산소 수치는 가까스로 안정권에 들어왔고 회복 약도 이제야 제대로 돌기 시작했다.
그런데 바깥에서는 그 짧은 목소리 하나를 입장권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에제키엘의 반사면이 병실 밖 복도를 비췄다.
품격 없는 구두가 셋. 병원 바닥을 사무실 복도처럼 밟고 있습니다.
"누가 올라왔어요?"
"태양 길드 법무팀입니다. 병원 출입 권한은 없습니다."
윤채아가 짧게 답하고 보안 라인에 지시를 넣었다.
"보호 병동 접근 차단. 임시 회의실로 이동시키세요. 보호 대상자 위치 질문에는 답하지 마십시오."
아스칼론이 숫돌대 위에서 퉁명스럽게 말했다.
또 태양이냐. 저놈들은 남의 칼집에 손 넣는 법부터 배우나.
시우는 희미하게 웃으려다 목이 따가워 그만두었다. 태양 길드라는 이름은 익숙했다. 공방에서 단검을 헐값에 빼앗으려 했던 간부의 얼굴이 잠깐 떠올랐다.
그때 백은서의 목소리가 통신으로 들어왔다.
"분석관님. 회의실 쪽 제안서 세 부 확보했습니다. 조건이 이상합니다."
윤채아가 화면을 병실 쪽으로 돌리지 않고 물었다.
"읽어 보세요."
"보호 명목으로 대상자 신병을 길드 보안 시설에 이전. 보유 아티팩트 일체는 길드 전용 보관고에 등록. 긴급 게이트 상황에서는 길드 지휘부가 우선 운용권을 가진다."
병실 공기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시우는 눈을 떴다.
"보유 아티팩트 일체요?"
아스칼론의 검날에서 푸른 선이 번쩍였다.
보유?
에제키엘이 매우 낮고 품위 없는 욕을 삼켰다.
저 문서 작성자는 거울 앞에서 자기 얼굴을 오래 볼 자격이 없습니다.
그림자의 계약이 서명대 위에서 스스로 펼쳐졌다. 검은 글자가 종이 위로 떠올랐다.
동의 없는 운용권은 보호가 아니다.
윤채아는 안경을 고쳐 쓰고 통신을 열었다.
"마도윤 팀장님. 대표단 직접 면담은 허가하지 않습니다. 다만 제안 조건을 녹취로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보호 대상자 연결은 위험하지 않습니까?"
"위험합니다. 그래서 짧게 갑니다. 무기 의사 확인 절차가 없는 제안을 당사자가 거절했다는 기록도 필요합니다."
마도윤이 잠시 침묵했다.
"공식 압박에 대비하겠다는 뜻이군요."
"이미 들어왔습니다."
윤채아는 시우를 보았다.
"강시우 씨. 듣기만 해도 됩니다. 불편하면 즉시 끊습니다."
시우는 대장간 안을 보았다. 아이기스가 이미 앞에 서 있었다. 글레니르는 사슬을 짧게 묶었고 에제키엘은 반사면을 어둡게 눌렀다. 아스칼론은 조용했다.
그 침묵이 더 날카로웠다.
"들을게요."
윤채아는 바로 조건을 붙였다.
"대답은 짧게. 이름 말하지 않습니다. 무기 이름도 상대가 먼저 말하면 제가 차단합니다."
"네."
병실 스크린이 검게 바뀌었다.
잠시 뒤 위층 임시 회의실 화면이 열렸다. 얼굴이 보이지 않는 시우와 달리 회의실 쪽은 선명했다. 넥타이를 맨 남자 셋과 중년 여성 하나가 테이블 앞에 앉아 있었다. 그들은 병원이 아니라 계약 현장에 온 사람들처럼 두꺼운 서류철을 펼쳐 두고 있었다.
가운데 남자가 먼저 웃었다.
"관리국 보호 대상자분. 몸은 좀 어떠십니까. 저희 태양 길드는 국내 최고 수준의 의료 시설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윤채아가 바로 말했다.
"소개와 조건만 말하십시오."
남자의 미소가 얇아졌다.
"좋습니다. 저희는 보호 대상자분의 안전을 위해 전담 보안팀과 전용 치료실을 제공할 수 있습니다. 정식 헌터 등록 전까지 등급 특례 심사도 지원하겠습니다."
조건만 들으면 나쁘지 않았다.
그래서 더 싫었다.
시우는 손가락을 이불 위에 눌렀다. 대장간 안에서 에제키엘의 반사면이 서류철을 비췄다. 본문보다 작은 글씨들이 반사면 안에서 유난히 선명하게 튀어나왔다.
아티팩트 운용권.
장기 보관.
전술 자산 편입.
그림자의 계약이 검게 번졌다.
초대받지 않은 조항은 서명자의 마음을 대신하지 못한다.
시우가 물었다.
"제 무기들 의사는 어디에 적혀 있나요?"
회의실이 잠깐 조용해졌다.
남자가 웃음을 유지한 채 되물었다.
"무기들의 의사라면 어떤 의미입니까?"
"같이 갈지, 보관고에 들어갈지, 누가 잡아도 되는지요."
옆자리 여성이 펜을 내려놓았다.
"아티팩트 운용은 전문 지휘 체계가 판단합니다. 보호 대상자분은 아직 미성년이고 정식 헌터 등급도 없습니다."
아스칼론이 낮게 웃었다.
저 여자는 검한테 나이 묻고 휘두를 작정이군.
시우는 그 말을 옮기지 않았다. 대신 다시 물었다.
"그럼 제 무기들이 싫다고 하면요?"
"위험 상황에서는 개인 선호보다 공공 안전이 우선입니다."
남자가 재빨리 끼어들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저희는 보호 대상자분의 능력을 높게 평가합니다. 다만 그런 희귀한 장비들은 개인 병실에 둘 것이 아니라 검증된 시설에서 관리해야 합니다."
장비.
그 단어가 병실 벽을 치고 대장간으로 들어왔다.
아스칼론의 검날이 길게 울었다.
아이기스가 시우 앞을 막았다.
뒤에 있어라.
에제키엘의 반사면에는 회의실 남자의 얼굴보다 서류 아래쪽 로고가 더 크게 비쳤다. 태양 길드 문양 아래 희미한 검은 점이 있었다. 처음에는 인쇄 얼룩처럼 보였다.
하지만 시우가 눈을 가늘게 뜨자 그 점이 세 갈래로 갈라졌다.
검은 흉터.
에제키엘이 속삭였다.
문서 뒤쪽에 낙인이 있습니다. 표면에는 없고 잉크 아래 있습니다.
글레니르의 사슬이 짧게 울렸다.
제안도 길이다.
시우는 등골이 서늘해졌다. 검은 왕관의 누군가가 직접 회의실에 앉아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저 사람들이 알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제안서라는 길 위에 무언가가 묻어 있었다.
남자는 시우의 침묵을 망설임으로 착각한 듯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현재 확인된 주요 아티팩트들을 저희가 안전하게 운용하면 훨씬 큰 피해를 막을 수 있습니다. 보호 대상자분은 감응 정보를 제공하고 현장 운용은 길드가 맡는 방식입니다."
윤채아의 표정이 굳었다.
"개별 아티팩트 지정 발언은 금지합니다."
"알겠습니다. 핵심은 이겁니다. 무기는 결국 장비입니다. 좋은 장비는 좋은 조직이 관리해야 합니다."
병실 스크린의 검은 화면 앞에서 시우가 숨을 들이마셨다.
목이 아직 아팠다. 오래 말하면 윤채아가 끊을 것이다. 그래서 짧아야 했다.
"그 계약에는 안 갑니다."
회의실의 미소들이 동시에 굳었다.
중년 여성이 낮게 말했다.
"아직 계약서를 충분히 검토하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봤어요."
"화면도 보지 못하셨는데요."
"제 거울 선생님이 봤습니다."
에제키엘의 반사면이 아주 만족스럽게 빛났다.
품격 있는 호칭입니다.
시우는 이불 위에 올린 손을 천천히 폈다.
"그리고 제 검 선생님이 들었고요. 제 방패가 막으려고 했고 제 사슬이 길이라고 했어요."
남자가 눈썹을 찌푸렸다.
"그건 객관적 판단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저한테는 그게 제일 객관적입니다."
시우의 목소리는 변조되어 낮게 나갔다. 하지만 말끝은 흔들리지 않았다.
"무기 의사를 확인하지 않는 계약에는 안 갑니다. 보관고에 넣고 우선 운용권 가져가겠다는 곳에는 더더욱 안 갑니다."
윤채아가 차단 버튼 위에 손을 올렸다. 그러나 이번에는 누르지 않았다.
시우가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저는 장비 보유자가 아닙니다."
회의실 한쪽에서 누군가 비웃음을 삼켰다.
"그럼 뭡니까?"
시우는 잠시 대장간을 보았다.
아스칼론은 숫돌대 위에 있었다. 에제키엘은 금 간 반사면을 높이 들고 있었다. 아이기스는 앞에 섰고 글레니르는 통로를 짧게 묶었다. 그림자의 계약은 문장 하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같이 살아남는 쪽입니다."
윤채아가 송출을 끊었다.
회의실 화면이 꺼졌다.
병실에는 다시 조용한 기계음만 남았다. 시우는 숨을 내쉬었다. 이번에는 산소 수치가 크게 흔들리지 않았다.
윤채아가 말했다.
"잘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부터는 제가 처리합니다."
"화내도 돼요?"
"제가 대신 화내겠습니다."
아스칼론이 못마땅하게 투덜거렸다.
검은 직접 화내야 맛인데.
에제키엘은 반사면을 병실 천장 쪽으로 기울였다.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 말과 함께 반사면에 방금 회의실 서류가 다시 비쳤다. 태양 길드 로고 아래 검은 얼룩이 더 선명해졌다. 뒤집힌 왕관의 곡선이 잉크 안쪽에서 떠올랐다. 그 아래 세 갈래 흉터가 서류 가장자리를 긁고 있었다.
그림자의 계약이 서명대 위에 문장을 세웠다.
초대받지 않은 제안은 문턱을 넘지 못한다.
검은 얼룩은 문장에 밀려 희미해졌지만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윤채아는 녹취 파일을 봉인하고 새 명령을 내렸다.
"대형 길드 면담 전면 보류. 보호 병동 접근 권한 재검토. 제출 문서 전수 분석."
마도윤의 목소리가 회의실 쪽 통신으로 들어왔다.
"대표단은 나갔습니다. 하지만 태양 쪽에서 미성년 보호 대상자의 판단 능력을 문제 삼겠다고 합니다."
윤채아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공식 질의로 보내라고 하세요. 답변은 관리국 법무팀 명의로 갑니다."
통신이 끊기자 시우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채아 씨."
"말하지 마세요. 쉬어야 합니다."
"다음에는 제가 조금 더 제대로 말해야 할 것 같아요."
윤채아가 멈칫했다.
시우는 대장간 안의 무기들을 떠올렸다. 누군가는 장비라고 불렀고 누군가는 자산이라고 썼고 누군가는 운용권이라고 숨겨 넣었다. 그 말들이 다시 문이 될 수 있다면 짧은 거절만으로는 부족했다.
"무기를 도구로만 보는 곳에는 안 간다고요."
아스칼론이 낮게 웃었다.
이제야 꼬맹이 입에서 칼 같은 말이 나오네.
아이기스는 여전히 시우 앞에 서 있었다.
뒤에 있어라.
"네."
시우는 대답했다.
"근데 이번에는 제 뒤에 누가 있는지도 같이 말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