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의 무기들이 나한테만 말을 걸어

21화: 날개 밑의 가시
서울 도심 위로 내려온 것은 용이 아니었다.
시우는 그 사실을 아스칼론의 침묵에서 먼저 알았다. 진짜 용이라면 저 괄괄한 검이 벌써 피 끓는 욕을 쏟아 냈을 것이다. 하지만 아스칼론은 숫돌대 위에서 검날만 낮게 세우고 있었다.
저놈은 흉내다.
"용이 아니라는 뜻입니까?"
용 냄새를 덮어쓴 날개 달린 잡것이다. 그런데 흉내를 꽤 그럴듯하게 냈군.
에제키엘의 반사면이 붉은 균열을 확대했다. 불꽃 속에서 긴 머리가 빠져나왔다. 찢어진 입과 비늘 덮인 목, 건물 유리창을 긁는 듯한 괴성.
현장 화면이 한 번 흔들렸다.
마도윤의 목소리가 통신으로 들어왔다.
"전 대원 도로 이탈 완료. 공중 대응팀 대기. A급 헌터 세 명은 공격 각도 확보 중."
윤채아가 병실 스크린 아래 시우의 산소 수치를 확인했다.
"강시우 씨. 지금부터는 정보만 짧게 말합니다."
"네."
시우는 손가락을 침대 시트 위에 눌렀다. 몸을 움직이지 않기 위해서였다. 마음은 이미 균열 아래로 달려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곳으로 가면 약속을 깨는 것이고 자신을 보호해 준 무기들의 말을 무시하는 일이었다.
아이기스가 벽감 안에서 말했다.
뒤에 있어라.
"알고 있어요."
말은 병실에서 나왔지만 대답은 대장간 안으로도 떨어졌다.
비행 마수가 날개를 펼쳤다. 붉은 막이 하늘을 찢듯 벌어지고 그 아래 가시들이 줄지어 드러났다. 가시 끝에서는 불꽃이 떨어지지 않았다. 대신 공기가 그 근처에서 일그러졌다.
글레니르가 들보에서 느슨하게 흔들렸다.
바람이 묶이지 않는다.
"마도윤 팀장님. 바람이 정면으로 밀리는 게 아닙니다. 날개 밑에서 방향이 꺾입니다."
"구체적으로."
"하강풍처럼 보여도 옆으로 접힙니다. 공중 대응팀을 게이트 바로 아래에 두면 밀리는 게 아니라 옆 건물 쪽으로 처박힐 수 있습니다."
마도윤은 지체하지 않았다.
"공중 대응팀 고도 유지. 건물 사이 사선 비워. 하강풍을 정면으로 받지 마라."
현장 A급 헌터 하나가 통신에 끼어들었다.
"병실 지시로 공중 전술까지 바꿉니까?"
마도윤의 답은 짧았다.
"방금 시민들 살린 쪽 지시다."
그 순간 비행 마수가 날개를 한 번 내리쳤다. 열풍이 곧장 내려오지 않고 옆으로 꺾였다. 비워 둔 사선으로 붉은 바람이 스쳤고 바로 전까지 대응팀이 있던 위치의 광고판이 찢겨 날아갔다.
통신이 잠깐 조용해졌다.
시우는 숨을 삼켰다. 산소 라인이 코끝에서 작게 흔들렸다.
에제키엘이 품위 있게 말했다.
제 반사면에 비친 각도는 훌륭했습니다. 다만 저 괴물의 얼굴은 품격이 없습니다.
아스칼론이 코웃음을 쳤다.
얼굴을 보지 마라. 날개 밑을 봐라.
현장 헌터들이 다시 움직였다.
푸른 창을 든 헌터가 왼손으로 창대를 고쳐 잡았다. 방금 시우의 말로 손잡이 틈을 확인한 남자였다. 그는 다른 두 명과 눈짓을 나눈 뒤 하늘로 뛰어올랐다.
활 형태의 아티팩트를 든 헌터가 빛의 화살을 세 발 쏘았다. 포격형 팔찌를 찬 헌터는 압축 마력탄을 마수의 목 아래로 날렸다. 창은 마지막으로 들어갔다.
공격은 빠르고 정확했다.
그래서 더 이상했다.
빛의 화살은 목을 향해 날아가다 갑자기 날개 쪽으로 휘었다. 마력탄은 열 장막 표면에서 납작하게 눌리더니 방향을 잃고 허공에서 터졌다. 창날은 비늘 사이를 노렸지만 마수의 날개가 접히는 순간 옆으로 미끄러졌다.
피 한 방울 나지 않았다.
대신 현장 무기들이 한꺼번에 비명을 냈다.
휘었다.
잡아먹힌다.
날이 돌아간다.
시우의 관자놀이가 찌릿했다. 직접 손에 쥔 무기들의 말이 아니었다. 대장간 문 밖 먼 골목에서 여러 사람이 동시에 문을 두드리는 것처럼 흐릿하고 아팠다.
윤채아가 즉시 말했다.
"회선 출력 낮춥니다."
"잠깐만요."
"수치가 흔들립니다."
"저 무기들이 공격을 맞고 있는 게 아닙니다. 공격이 틀어지는 순간 안쪽에서 비틀리고 있어요."
윤채아의 손이 멈췄다.
"근거."
시우는 눈을 감았다. 에제키엘의 반사면과 병실 스크린, 대장간의 화덕 소리가 한 줄로 겹쳤다.
"활은 화살을 세 발 쐈는데 두 번째 화살만 먼저 꺾였습니다. 팔찌는 바깥 장식이 아니라 안쪽 고정핀이 떨립니다. 창은 날이 미끄러진 게 아니라 손잡이 뒤쪽부터 돌아갔습니다."
현장 헌터들이 말을 잃었다.
백은서가 화면을 당겼다.
"두 번째 화살 잔광만 궤도가 다릅니다. 팔찌 안쪽 고정핀 진동 확인. 창대 후미 회전 흔적 있습니다."
아스칼론이 낮게 웃었다.
이제 좀 들을 귀가 생겼군.
마도윤이 명령했다.
"정면 공격 전면 중지. 마수의 날개 밑 기관 확인 전까지 목과 머리 노리지 마."
"기관?"
누군가 되물었다.
통신 너머로 짧은 욕설이 섞였다. 현장 헌터들이 겁을 먹은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은 너무 익숙하게 버티고 있었다. A급 게이트 앞에서 뒤로 물러나는 일보다 실패한 공격의 이유를 모르는 일이 더 견디기 어려운 얼굴들이었다.
창을 든 헌터가 이를 악물었다.
"그럼 어디를 보라는 겁니까. 저놈이 하늘에서 버티는 동안 아래 건물 외벽이 녹고 있습니다."
화면 왼쪽에서 유리 파편이 비처럼 떨어졌다. 대피가 끝난 도로였지만 건물 안에는 아직 몸을 숨긴 사람들이 있을 수 있었다. 마도윤이 구조팀을 움직이려는 순간 비행 마수의 꼬리가 아래로 길게 휘었다.
검은 가시가 박힌 꼬리 끝이 바로 그 건물을 가리켰다.
현장 헌터 둘이 동시에 반응했다. 한 명은 활시위를 당겼고 다른 한 명은 팔찌의 포격구를 꼬리 쪽으로 돌렸다.
아스칼론이 사납게 울었다.
미끼다.
"쏘지 마세요!"
시우의 목소리가 병실 스피커에서 찢어졌다.
마도윤의 명령이 거의 동시에 떨어졌다.
"꼬리 사격 금지. 사선 유지."
활의 빛이 겨우 멈췄다. 하지만 이미 포격형 팔찌의 마력은 반쯤 차올라 있었다. 팔찌가 주인의 손목을 조여 멈추려 했고 헌터는 통증에 신음을 삼켰다.
싫다.
안 된다.
저건 문이 아니다.
시우는 그 말을 그대로 옮겼다.
"팔찌가 막고 있습니다. 꼬리 끝은 약점이 아니라 열 장막을 빼내는 유도점입니다. 거길 치면 마력이 빨려 들어갑니다."
백은서가 화면의 잔광을 확인했다.
"꼬리 끝 주변에 흡입성 마력 소용돌이 있습니다. 육안 기준으로는 가시처럼 보이지만 중심이 비어 있습니다."
팔찌를 찬 헌터가 뒤늦게 손을 내렸다. 손목 보호대 아래로 붉은 자국이 남았다. 그의 장비가 주인을 다치게 하면서까지 사격을 멈춘 것이다.
시우는 그 광경을 보며 입술을 세게 눌렀다. 현장에 없어서 모르는 것이 아니었다. 현장에 없기 때문에 들어야 하는 소리들이 있었다.
시우는 에제키엘을 보았다. 반사면 속 마수의 날개 밑 가시들이 불꽃 너머로 번졌다. 여섯 개처럼 보였다. 모두 같은 길이였다.
그런데 아스칼론은 불만스럽게 검날을 떨었다.
가짜가 섞였다.
에제키엘이 반사면을 좁혔다.
가짜라면 제 반사면 앞에서 오래 버티지 못합니다.
그림자의 계약이 서명대 위에 문장을 펼쳤다.
초대받지 않은 위장은 보호 시야에 효력을 갖지 못한다.
문장이 대장간 바닥에 박히자 반사면의 불꽃이 한 겹 벗겨졌다. 여섯 개 가시 중 오른쪽 끝 가시가 텅 빈 껍데기처럼 흐려졌다.
하지만 아스칼론은 바로 부정했다.
저건 미끼다. 빈 껍데기를 보라고 일부러 흔드는 거다.
"그러면 진짜는 어디죠?"
용을 흉내 내는 놈들은 목을 지키려 한다. 하지만 나는 용 목만 벤 게 아니다.
아스칼론의 검날에 푸른 선이 떠올랐다.
날개 밑. 왼쪽 둘째. 접히는 뿌리 안쪽.
시우가 그대로 말하려는 순간 비행 마수가 고개를 돌렸다.
화면 속 마수의 눈이 병실을 보는 듯했다. 거대한 동공이 붉은 빛 사이에서 가늘게 줄었다.
그와 동시에 대장간 문틈으로 열기가 역류했다.
시우의 목이 막혔다. 산소 수치가 떨어졌다. 윤채아가 회선 차단 스위치에 손을 올렸다.
"여기까지입니다."
"아직..."
뒤에 있어라.
아이기스가 벽감에서 떨어져 나와 시우 앞을 막았다. 방패의 가장자리에서 청동빛과 검은 얼룩이 동시에 일어났다. 열기가 방패에 닿자 대장간 바닥이 크게 울렸다.
글레니르가 사슬을 내렸다.
짧게 묶는다.
그림자의 계약이 문장을 덧붙였다.
허락된 통로는 생존 조건을 넘지 않는다.
회선이 가늘어졌다. 시우는 숨을 몰아쉬며 마지막으로 에제키엘의 반사면을 보았다.
마수의 날개가 하강을 준비하며 위로 젖혀졌다. 그 순간 왼쪽 두 번째 가시 안쪽에 푸른 균열 같은 선이 나타났다. 열 장막은 그곳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왼쪽 두 번째 날개 밑 가시."
시우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겉을 치면 안 됩니다. 하강 직전 날개가 위로 젖혀질 때 안쪽 뿌리가 열립니다. 그때 찔러야 합니다."
마도윤의 목소리가 바로 돌아왔다.
"좌표 고정. 공중 대응팀 대기. 하강 직전만 노린다."
현장 A급 헌터가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한 번 놓치면?"
아스칼론이 먼저 대답했다.
놓치면 도시가 긁힌다.
시우는 그 말을 그대로 전하지 않았다. 하지만 모두가 이미 알고 있었다.
비행 마수가 날개를 접었다.
서울 도심의 유리창들이 일제히 떨렸다. 마수의 몸이 균열 밖으로 더 빠져나왔고 붉은 비늘 아래 불꽃이 심장처럼 뛰었다.
윤채아가 회선을 자르기 직전 물었다.
"강시우 씨. 더 말할 것 있습니까?"
시우는 아이기스 뒤에서 숨을 삼켰다.
"꼬리 보지 말라고 전해 주세요."
"꼬리?"
"꼬리는 일부러 흔드는 겁니다. 날개 밑을 열기 위해 시선을 빼앗는 미끼예요."
아스칼론이 만족스럽게 검날을 울렸다.
이번에는 조금 빨리 배웠군.
윤채아가 통신에 전달했다.
"전 현장. 꼬리 유인에 반응 금지. 왼쪽 두 번째 날개 밑 가시 안쪽만 확인."
그 순간 비행 마수가 도시를 향해 급강하를 시작했다.
하늘의 붉은 균열이 더 크게 찢어졌다.
날개 밑 가시가 열렸다.
그리고 병실의 회선이 검게 끊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