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의 무기들이 나한테만 말을 걸어

13화: 값으로 부르는 자들
시우는 침대로 가기 전에 문서만 확인하겠다고 했다.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공방 중앙 단말기가 다시 켜졌다.
백은서가 반사적으로 차단 레버에 손을 얹었다. 윤채아는 먼저 화면을 확인했다. 검은 잡음은 없었다. 대신 붉은 긴급 공문 표시가 화면 위쪽에서 깜박였다.
[태양 길드 공동 감정 요청]
[위험 유물 선매입 권고]
아스칼론이 검집 안에서 낮게 웃었다.
"방금 종이쪼가리가 예고하더니 진짜 가격표가 왔군."
에제키엘의 반사면은 차갑게 가라앉았다.
"제 이름 옆에 가격을 붙이려는 시도라면 대단히 천박합니다."
시우는 팔걸이를 붙잡았다. 어깨는 아직 뜨거웠고 의료 결계는 계속 노란빛을 띠고 있었다. 그래도 화면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그림자의 계약이 보존 케이스 안에서 사각거렸다.
값으로 부르는 문서다.
윤채아가 통신을 열었다.
"발신자 확인."
단말기 너머로 남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단정한 정장과 길드 배지를 단 삼십 대 남자였다. 그의 뒤에는 태양을 형상화한 문양이 걸려 있었다.
"태양 길드 감정전략실 한도겸입니다. 관리국 임시 보존 공방에 미등록 고위험 아티팩트가 다수 있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윤채아의 목소리는 평평했다.
"보고 출처를 밝히십시오."
"공동 감정 위탁망입니다. 폐기 예정 서류 유물 보관칸에서 A급 이상 반응이 발생했고 민간 감응 대상이 그 유물들을 임의 운용 중이라는 기록도 확인했습니다."
백은서의 얼굴이 굳었다.
"공방 내부 기록은 비공개입니다."
한도겸은 웃었다.
"위험물 감정 요청은 비공개 기록보다 우선합니다. 태양 길드는 관리국과 재난 대응 협약을 맺은 길드입니다. 해당 유물들의 외부 감정과 긴급 매입 절차를 요청합니다."
"매입?"
시우가 낮게 물었다.
한도겸의 시선이 화면 너머로 시우에게 향했다. 사람을 보는 눈이라기보다 보상 수령자를 확인하는 눈에 가까웠다.
"위험 유물을 안정적으로 운용할 수 있는 기관이 맡겠다는 뜻입니다. 보상은 충분히 지급됩니다. 민간인이 감당할 사안이 아닙니다."
아스칼론이 으르렁거렸다.
"꼬맹이. 저놈이 방금 나를 돈으로 산다고 했나."
"그렇게 들렸습니다."
"그럼 귀가 멀쩡하군."
에제키엘은 더 조용히 말했다.
"품격 없는 자는 늘 보상을 입막음으로 착각합니다."
시우는 그 말을 그대로 옮기지 않았다. 대신 윤채아를 보았다.
"윤 분석관님. 저 문서 먼저 확인해야 합니다."
의료 대원이 통신으로 끼어들었다.
"강시우 씨는 침상 복귀가 우선입니다."
"문서가 유물 이름을 건드리면 침상으로 가도 끝나지 않습니다."
그림자의 계약이 케이스 안에서 접히는 소리를 냈다.
값을 먼저 쓰면 의사는 지워진다.
윤채아는 짧게 판단했다.
"외부 감정 문서 비접촉 열람. 강시우 씨 관찰석 유지. 직접 접촉 금지. 백은서 씨, 빈 보존지와 차단 유리를 준비하세요."
한도겸의 눈매가 살짝 굳었다.
"감정 요청서를 임의로 훼손하면 절차 위반입니다."
"비접촉 검증입니다. 절차 위반 여부도 기록하겠습니다."
감정표가 화면에서 보존지 위로 투영되었다. 처음에는 평범한 표였다. 유물명, 등급, 위험도, 보상 산정액. 그런데 유물명 칸이 천천히 움직였다.
아스칼론의 이름 위로 새 글자가 덧씌워졌다.
[전투 불능 의장검]
에제키엘의 칸에는 [파손 장식 거울]이 떠올랐다.
글레니르의 칸에는 [폐철 사슬].
그림자의 계약의 칸에는 [폐기 양피지].
시우의 속에서 뭔가 차갑게 내려앉았다.
"이거 이름을 낮춰 부르고 있습니다."
아스칼론이 검집 안에서 울었다.
"낮춰 부르는 정도가 아니다. 다시 묻는 냄새다."
에제키엘의 반사면이 금빛으로 번쩍였다.
"가치 평가가 아니라 이름 훼손입니다. 그리고 제 반사면은 장식이 아닙니다."
글레니르가 낮게 울었다.
값은 매듭이 아니다.
그림자의 계약이 보존지 위로 그림자를 뻗었다. 검은 조항이 감정표 아래에서 뒤집혀 올라왔다.
소유 의사 미확인 유물은 위험물로 산정한다.
위험물은 운용권자의 동의 없이 선매입 가능하다.
명의 불명 유물은 감정 기관이 임시 소유권을 대행한다.
윤채아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한도겸 실장. 이 조항은 협약 표준안에 없습니다."
한도겸은 흔들리지 않았다.
"고위험 재난 대응 예외 조항입니다."
그림자의 계약이 바스락거렸다.
예외가 아니다.
숨긴 문장이다.
에제키엘이 감정표를 비추자 반사면에 다른 서명이 나타났다. 태양 길드 직인이 아니라 검은 그림자 같은 인장이었다. 뒤집힌 왕관과 비슷한 형태였다.
시우는 숨을 멈췄다.
"저 문서, 태양 길드 직인 밑에 다른 인장이 있습니다."
윤채아가 물었다.
"형태는?"
"뒤집힌 왕관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침입자 손목 문양과 완전히 같은지는 모르겠습니다."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해야 했다. 시우는 그 선을 넘지 않았다.
한도겸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민간 감응자의 착각을 공식 회의록에 넣을 생각입니까?"
마도윤의 목소리가 공방 출입구 통신에서 들렸다.
"착각 덕분에 저희 팀은 살아 돌아왔습니다."
문이 열리며 마도윤이 들어왔다. 그는 방어팀 둘을 데리고 있었다. 시우를 보자 짧게 고개를 숙이고 윤채아에게 보고했다.
"외부 감정 인력 세 명이 병원 지하 출입구에 도착했습니다. 태양 길드 출입 허가서를 들고 있습니다."
윤채아가 단말기를 보았다.
"제 승인 없는 허가입니다."
한도겸이 차분히 말했다.
"공동 협약 권한입니다. 현장에 가서 직접 설명하겠습니다."
통신이 끊겼다.
공방 안 공기가 무거워졌다.
시우는 보존 케이스들을 보았다. 아스칼론은 노골적으로 분노했고 에제키엘은 모욕당한 듯 어두웠다. 글레니르는 매듭을 단단히 조이고 있었다. 그림자의 계약은 가늘게 떨었다.
시우가 말했다.
"의사 확인 절차를 먼저 남겨야 합니다."
윤채아가 바로 이해했다.
"자의식 아티팩트 전원 의사 확인 기록."
"네. 저 사람들이 오기 전에요."
백은서가 빈 보존지를 펼쳤다. 시우는 아스칼론을 보았다.
"아스칼론. 감정이나 매입에 동의하십니까?"
"내 주인은 가격표를 들고 오는 놈이 아니다."
시우는 그대로 옮겼다.
"아스칼론은 감정 및 매입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이유는 가격표를 든 상대를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스칼론이 흡족하게 울었다.
에제키엘은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저는 파손 장식 거울이 아니라 진실의 반사 거울입니다. 무례한 감정표 앞에 서는 것만으로도 반사면이 더러워질 우려가 있습니다."
"에제키엘은 명칭 훼손과 비강제 동의 없는 감정에 거부 의사를 표시합니다."
글레니르가 낮게 울었다.
묶이지 않는다.
문을 닫는 매듭은 팔리지 않는다.
"글레니르는 강제 매입과 운용권 이전을 거부합니다. 이유는 자기 역할이 매매 대상이 아니라 봉인 유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림자의 계약이 마지막으로 사각거렸다.
서명 전에 묻는다.
묻지 않은 값은 무효다.
시우는 숨을 고르고 말했다.
"그림자의 계약은 사전 의사 확인 없는 감정가와 매입 조항을 무효로 봅니다."
빈 보존지 위에 네 문장이 차례로 떠올랐다. 그림자의 계약이 조항 형식으로 정리하고 에제키엘이 반사면으로 위조 없는 문장임을 비췄다. 글레니르의 봉인선이 보존지 가장자리를 감았다.
[자의식 아티팩트 의사 확인서]
[감정 및 매입 거부]
[강제 명칭 변경 거부]
[운용권 이전 거부]
윤채아는 바로 전자 기록을 봉인했다.
"기록 완료. 현장 책임자 윤채아 확인."
마도윤이 출입구 쪽을 보았다.
"왔습니다."
문 너머에서 발소리가 멈췄다.
한도겸은 실제로 화면보다 더 매끈한 사람이었다. 그는 공방에 들어오자마자 보존 케이스들을 훑었다. 물건을 보는 눈이었다.
시우는 그 시선이 싫었다.
"강시우 씨."
한도겸이 말했다.
"당신에게도 좋은 일입니다. 지금 저 유물들은 당신을 위험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태양 길드는 합당한 보상과 안전한 보호 설비를 제공할 수 있습니다."
"저한테 묻기 전에 저분들한테 먼저 물어보셔야 합니다."
한도겸의 미소가 얇아졌다.
"유물에게 법적 의사 능력은 없습니다."
그 순간 아스칼론이 검집 안에서 길게 울었다. 칼날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감정표 위에 묶여 있던 검은 매듭 하나가 탁 끊겼다.
에제키엘의 반사면이 한도겸의 손목을 비췄다. 셔츠 소매 안쪽에 아주 짧게 검은 인장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윤채아가 바로 말했다.
"손목을 보여 주십시오."
한도겸은 손을 뒤로 물렸다.
"무례하군요."
그림자의 계약이 보존지 위에 새 문장을 띄웠다.
감정을 빙자한 강제 매입은 계약이 아니다.
숨긴 인장은 서명을 대신하지 못한다.
글레니르의 매듭이 감정표를 감았다. 감정표의 보상 산정액 숫자들이 부풀어 오르더니 하나씩 터졌다. 금액이 사라진 자리에는 유물들이 거부한 문장이 남았다.
한도겸의 얼굴이 처음으로 일그러졌다.
"관리국이 길드 협약을 이렇게 무시하면 후폭풍이 있을 겁니다."
윤채아는 단말기를 내밀었다.
"협약 위반 가능성은 귀 길드 쪽에 있습니다. 비표준 조항 삽입, 비공개 공방 기록 무단 열람, 현장 책임자 승인 없는 출입 시도. 모두 공식 항의하겠습니다."
마도윤이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그리고 지금부터 이 공방은 현장 방어 대상입니다. 허가 없는 접근은 차단합니다."
한도겸은 시우를 보았다.
"민간인 하나가 감당할 판이 아닙니다."
시우는 무릎 위 손을 꽉 쥐었다. 무서웠다. 대형 길드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그는 정확히 몰랐다. 그래서 더 무서웠다.
하지만 아스칼론의 울림이 있었다. 에제키엘의 금빛이 있었다. 글레니르의 매듭과 그림자의 계약의 사각거림이 있었다.
"감당은 혼자 안 합니다."
시우가 말했다.
"그리고 값부터 묻는 사람한테는 아무도 맡기지 않겠습니다."
한도겸은 잠시 침묵했다. 그러다 감정표 조각 하나를 회수하려 했다.
그림자의 계약이 먼저 접혔다.
무효 조항은 남긴다.
감정표가 검게 타들었다. 다 타지 않은 작은 조각 하나가 보존지 위에 떨어졌다. 거기에는 가격 대신 문장 하나가 남아 있었다.
값을 매길 수 없으면 관리자부터 산다.
공방 안이 조용해졌다.
한도겸은 그 문장을 보지 못한 척했다.
"오늘은 물러나겠습니다."
윤채아가 답했다.
"출입 정지 통보는 별도로 갈 겁니다."
한도겸이 돌아서자 에제키엘이 차갑게 말했다.
"품격 없는 퇴장입니다."
시우는 작게 옮겼다.
"에제키엘이 퇴장 예절에 불만이 많으십니다."
한도겸의 걸음이 아주 잠깐 멈췄다. 하지만 그는 돌아보지 않았다.
문이 닫힌 뒤 의료 대원이 통신으로 거의 화를 냈다.
"이제 진짜 침상 복귀입니다."
시우는 작게 웃었다.
"네. 이번에는 가격표 말고 처방전만 들고 갈게요."
아스칼론이 코웃음을 쳤다.
"처방전에도 네 이름 함부로 쓰면 베어라."
에제키엘이 바로 말했다.
"처방전은 먼저 읽어야 합니다."
그림자의 계약이 만족스럽게 사각거렸다.
서명 전에 묻는다.
글레니르가 낮게 울었다.
문을 지킨다.
윤채아는 타다 남은 조각을 차단 케이스에 넣었다. 그녀의 표정은 더 차가워져 있었다.
"다음 압박은 강시우 씨 본인에게 올 가능성이 큽니다. 관리자부터 산다는 문장은 보호 권한이나 후견 권한을 노린다는 뜻일 수 있습니다."
시우는 대답하지 못했다.
무기들을 값으로 부르던 시선이 아직 피부에 남아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의 이름을 빼앗기지 않았고 유물들의 이름도 낮춰 쓰이지 않았다.
그것만은 분명했다.
"그럼 제 보호자도 가격표 붙기 전에 확인해야겠네요."
윤채아가 안경을 고쳐 썼다.
"농담으로 넘길 사안은 아닙니다."
"알고 있습니다."
시우는 보존 케이스들을 차례로 보았다.
"그래도 먼저 물어보면 됩니다. 누가 누구를 맡아도 되는지."
아스칼론이 낮게 웃었다.
"좋다. 그 질문은 마음에 든다."
공방 조명 아래에서 타다 남은 감정표 조각이 검게 식었다.
값으로 부르는 자들은 물러갔다.
하지만 이제 그들은 시우를 유물들의 곁에서 떼어 놓을 방법을 찾기 시작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