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조(Synchronization) : 그놈의 눈으로 본 것

12화: 사투 끝의 탈출
어둠 속에 방치된 폐창고 외벽을 타고 흐릿하게 일렁이는 붉고 푸른 경광등 빛이 깨진 창틀 사이로 끊임없이 들이쳤다.
오오오옹-.
가을 폭우가 쏟아지는 밤하늘을 찢는 듯한 사이렌 소리가 콘크리트 벽면에 부딪혀 지하 제어실로 무겁게 흘러들었다. 마포경찰서 수색대와 서도진 경감이 이끄는 강력반 형사들이 빗속에서 대성수산 폐창고 정문을 에워싸는 구둣발 소리가 지상층 콘크리트 바닥을 타고 진동으로 고스란히 전해졌다.
“진혁 씨…… 경찰들이…… 왔나 봐요…….”
전기 라디에이터 온기에 간신히 눈을 뜬 민세아가 어깨를 웅크린 채 부르르 떨며 힘겹게 말을 뗐다. 영하 25도 냉동고에서 겪은 저체온증의 마비 상태에서 채 빠져나오지 못한 탓에 그녀의 입술은 퍼렇게 질려 있었고, 바닥을 짚고 일어서려던 무릎은 맥없이 꺾였다. 진혁은 재빨리 왼손을 뻗어 쓰러지려던 세아의 어깨를 붙잡아 지탱했다.
“정신 차려요, 세아 씨. 정문과 측면 비상문 쪽은 이미 막혔습니다. 경찰들의 서치라이트 불빛이 그 방면으로 온통 쏠려 있는 게 보여요.”
진혁의 시선이 바닥에 의식을 잃은 채 누워 있는 한소윤에게 머물렀다. 호흡의 간격은 다소 안정되었지만 여전히 맥박이 미세하게 흔들리는 상태였고, 이 상태로 경찰 수사관들에게 발각되거나 빗속에 방치된다면 심각한 위험에 처할 것이 뻔했다. 더욱이 진혁 본인의 오른팔 부상 역시 냉동고 제어실에서 강화유리를 깨부수며 사투를 벌이는 와중에 완전히 터져, 붉은 피가 빗물과 범벅이 된 붕대를 뚫고 흘러내려 바닥을 적시고 있었다.
“제가 소윤 씨를 업겠습니다. 세아 씨는 제 가죽 재킷 끝자락을 꽉 쥔 채 뒤를 따라오세요.”
“하지만 진혁 씨, 그 팔로 소윤 씨를 업고 가기에는 무리예요…….”
“여기서 잡히면 다 끝장입니다. 한소윤 씨를 살린 공로자가 아니라, 살인마의 공범이자 납치범으로 몰려 감옥에 갇힐 테니까요. 놈이 정교하게 파놓은 함정에서 영영 벗어날 수 없게 됩니다.”
진혁은 비틀거리는 몸을 가누며 이빨을 악물고 한소윤의 상체를 들어 올려 등에 업었다. 오른팔 전완근의 찢어진 자상이 비틀리며 가죽 소매 안쪽에서 칼로 살을 후벼 파내는 듯한 날카로운 작열통이 척추를 매섭게 꿰뚫었다. 입술 사이로 터져 나오려던 비명을 턱에 힘을 주어 억지로 눌러 삼켰다. 왼손으로 소윤의 다리를 단단히 감싸 안아 고정하고, 세아의 차가운 손을 잡아 이끌었다.
“가요. 이쪽입니다.”
진혁은 제어실 구석, 오래되어 먼지와 거미줄이 자욱하게 내려앉은 보일러 배관실의 철문을 힘껏 밀어젖혔다. 과거 한강 정비 사업 이전에 지어진 수산물 폐창고들은 물청소 후 대량의 배수를 원활하게 처리하기 위해, 한강 옹벽 하부의 우수 배수로와 직접 연결되는 환기구 겸 하수 통로를 설치해 두곤 했다. 어둡고 축축한 계단 아래로, 녹물이 흘러내리는 낡은 콘크리트 원통형 배수로가 동굴처럼 깊은 어둠의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다.
질척이는 배수로 내부 통로는 성인 한 명이 겨우 허리를 잔뜩 구부려야만 전진할 수 있을 만큼 좁고 음산했다.
위쪽 콘크리트 천장을 타고 마포경찰서 강력반의 단호한 무전 소리와 고함이 흘러들었다.
“1조는 메인 슬라이딩 도어 개방하고 진입해! 2조는 후방 비상구의 부러진 걸쇠 흔적 감식반에 넘기고 주변 수풀 수색해라! 용의자 강진혁과 한소윤이 이 내부에 감금되어 있을 가능성이 크다. 라이트 더 밝혀!”
무전기에서 새어 나오는 특유의 지직거리는 소음과 경찰들의 다급한 구둣발 소리가 좁은 배수로 통로 내부의 공명 현상을 타고 사방에서 왜곡되며 고막을 때렸다. 진혁은 등에 업힌 한소윤의 무게가 어깨를 짓누를 때마다, 오른팔의 붕대 틈새에서 울컥하며 뜨거운 핏방울이 흘러내려 배수로 밑창의 오수 위로 뚝뚝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하아, 하아…….”
세아는 지하 통로에 차오른 매캐한 먼지와 약품 냄새 탓에 연신 헛구역질을 뱉으면서도, 진혁의 옷자락을 쥔 손가락끝에 힘을 주며 필사적으로 걸음을 옮겼다.
마침내 하수관로의 출구, 녹슬고 부러진 철창 틈새를 넘어 한강 고수부지의 무성한 덤불 지대가 어둠 속에 모습을 드러냈다. 차가운 가을 빗줄기가 진혁의 머리와 뺨을 사정없이 갈겨댔다. 시야가 흐린 어둠 속에서 가시나무와 넝쿨들이 그들의 얼굴과 손등을 긁어댔지만, 그 통증을 인지할 마음의 여유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스으으윽- 콰아아아!
그때였다. 머리 위 강변북로 교각 하부 이면도로 쪽에서 경찰차의 고출력 서치라이트 백색광이 빗줄기를 뚫고 사방을 거칠게 훑으며 그들이 서 있는 덤불 지대 바로 코앞까지 밀려들었다.
“이봐, 저 아래 한강 옹벽 밑 잡풀 구역도 랜턴으로 꼼꼼히 비춰봐!”
경찰관들의 단호한 지시 목소리가 불과 10여 미터 앞 언덕 위에서 생생하게 들려왔다. 진혁은 반사적으로 세아의 어깨를 내리누르며 한소윤을 등에 업은 상태로 깊은 진흙 구덩이 속에 바짝 몸을 웅크렸다. 무성하게 자란 억새풀과 불법 투기된 폐그물 더미가 그들의 흔적을 간신히 덮어주었다.
뚜벅, 뚜벅.
진흙과 물웅덩이를 짓밟는 무거운 군화 소리가 수풀을 헤치며 점점 가까워졌다. 손전등의 날카로운 하얀 불빛이 진혁이 숨어 있는 가시덤불 바로 머리 위 잎사귀들을 흔들며 이리저리 비추어 대기 시작했다.
“경감님, 이쪽 덤불 근처에는 발자국이나 도주 흔적이 보이지 않습니다. 폭우 때문에 쓸려 내려갔을 수도 있지만, 아무래도 다른 방향으로 빠져나간 것 같은데요.”
“아니, 샅샅이 뒤져봐. 강진혁 그 친구, 몸에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고 보고받았다. 흔적이 없더라도 멀리 도망치지 못했을 게 확실해.”
서도진 경감의 낮고 착잡한 목소리가 빗소리 틈새를 뚫고 진혁의 고막에 박혔다. 목소리에 담긴 옛 온정과 수사관으로서의 단호함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진혁의 심장은 서늘하게 얼어붙었다. 진혁은 혹여나 등에 업힌 소윤이 고통으로 인해 얕은 신음이라도 내뱉을까 봐, 떨리는 왼손을 뻗어 그녀의 입가를 조심스럽게 감싸 안았다. 오른팔에서 뿜어져 나온 피가 빗물과 섞여 억새풀 줄기를 타고 흘러내려 흙바닥에 작은 붉은 웅덩이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서도진 경감의 손전등 불빛이 진혁의 이마에서 불과 50센티미터 떨어진 풀더미에 머문 채 움직이지 않았다. 진혁은 허파가 터질 것 같은 고통 속에서도 호흡을 완벽하게 멈췄다. 빗방울이 가죽 재킷을 때리는 소리조차 폭음처럼 거대하게 느껴질 정도의 숨 막히는 서스펜스였다.
타다닥-! 키아아아악!
그 찰나의 순간, 바로 옆 폐그물 더미 속에 숨어 있던 길고양이 한 마리가 찢어지는 듯한 기괴한 비명을 지르며 덤불 밖으로 튀어 나가 경찰관의 구둣발 앞을 스쳐 지나갔다.
“악! 뭡니까, 고양이잖아!”
대원이 가슴을 쓸어내리며 랜턴 불빛을 멀리 치웠다. 서도진 경감은 고양이가 뛰쳐나간 덤불을 향해 한참 동안 서치라이트를 고정하고 무거운 침묵을 유지하다가, 이내 나직한 한숨을 내쉬며 등을 돌렸다.
“이쪽 구역 수색은 종료하고, 강변 선착장 진입로 방면으로 이동한다. 병력을 분산시켜 서둘러라.”
경찰들의 군화 소리와 무전기 음이 멀어지고, 사위를 때리는 세찬 빗소리만이 덤불 속의 깊은 고요를 다시 채웠다. 진혁은 참았던 숨을 토해내며 진흙바닥 위로 무너지듯 한쪽 무릎을 꿇었다.
“세아 씨, 정신 잃으면 안 됩니다. 조금만 더 버티면 도로 변이에요.”
“네…… 괜찮아요…… 어서 움직여요.”
세아는 얼굴이 빗물과 흘러내린 흙먼지로 엉망이 된 상태에서도 이빨을 딱딱 마주치며 진혁의 다친 몸을 밭쳐주기 위해 부축했다. 두 사람은 옹벽 구석진 배수로 출구를 완전히 벗어나, 선착장 입구에서 약 200미터 떨어진 어두운 굴다리 밑 이면도로 가로수 밑에 다다랐다. 다행스럽게도 세아가 사전에 주차해 두었던 소형 승용차는 수색대의 감시망을 피해 흔적 없이 빗속에 덩그러니 서 있었다.
세아는 떨리는 양손으로 바지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차 문을 조심스럽게 해제했다. 철컥, 하고 도어 잠금이 해제되는 소리가 구원의 종소리처럼 작게 퍼졌다.
진혁은 뒷좌석 문을 열고 한소윤을 비스듬히 눕힌 뒤, 뒷유리 선반에 있던 얇은 보조 담요 두 장을 겹쳐 체온을 보호해 주었다. 세아는 조수석에 젖은 빨래처럼 털썩 주저앉았고, 진혁은 깊은 한숨과 함께 운전석으로 들어가 앉았다.
오른손의 근육이 비틀려 감각이 소실된 탓에 시동 버튼을 누르는 간단한 동작조차 버거웠다. 진혁은 왼손을 뻗어 시동 버튼을 누르고 변속기를 드라이브 모드로 옮겼다.
“제 망원동 오피스텔 쪽으로 향하면 안 돼요. 경찰들이 제 차량 조회나 주변 기자 시절 커넥션을 조회하면 가장 먼저 추적할 장소예요.”
세아가 히터 구멍에서 나오는 미지근한 바람을 손으로 쬐며 약하게 속삭였다.
“그럼 갈 만한 임시 대피소가 있습니까?”
“성산동에…… 기자를 그만두기 직전 사설 자료실 겸 기사 작성용 보조 작업실로 임대해 둔 소형 원룸 오피스텔이 있어요. 제 명의가 아니라 해외에 체류 중인 선임 기자 선배의 명의로 계약된 곳이에요. 그곳 주소로 네비를 켜지 말고 이동해요.”
세아가 가리킨 성산동 골목 주소를 머릿속으로 되뇌며 진혁은 천천히 차를 골목 밖으로 밀어냈다. 밤공기를 가르는 폭우 속에서 와이퍼가 요란하게 유리창을 긁었지만, 도심 곳곳의 분위기는 불길할 정도로 삼엄했다. 특히 한강공원을 빠져나가는 주요 나들목 진입로 입구에는 음주 단속 차량을 위장한 순찰차 두 대가 불을 밝히고 지나가는 차량들을 유심히 살피고 있었다.
진혁은 가차 없이 핸들을 꺾어 좁고 복잡한 주택가 내부 이면도로로 진입했다. 수년 동안 배달 라이더로 마포구 구석구석을 누볐던 그의 뇌내 지도가 이 도주 작전에서 유일한 나침반이 되어주었다. 순찰차가 골목 저편에서 서행하며 접근할 때마다 진혁은 라이트를 완전히 소등한 채 빌라 주차장 음영 구역에 차를 세워 숨겼고, 경찰차가 시야에서 사라지면 가볍게 엑셀을 밟아 미끄러지듯 이동했다.
아슬아슬한 은신과 도주를 수 차례 반복한 끝에, 세아의 차량은 마침내 성산동의 한적하고 낡은 오피스텔 지하 2층 주차장 구석에 진입하여 안착하는 데 성공했다.
진혁은 탈진한 세아를 옆에서 부축하고, 다시금 한소윤을 등에 둘러업은 채 엘리베이터를 타고 7층 복도 끝방으로 향했다. 먼지가 살짝 낀 도어락 건반 위로 세아가 불러준 비밀번호를 누르자, 오랫동안 방치되어 쾌쾌한 종이 냄새와 냉기가 가득한 좁은 오피스텔 방이 열렸다.
진혁은 조심스럽게 소윤을 간이침대 위에 눕히고 곧바로 바닥 난방과 전기 온풍기를 최대로 작동시켰다.
“세아 씨, 얼른 욕실로 들어가서 따뜻한 물로 온몸을 씻고 몸을 녹이세요. 소윤 씨의 상태는 제가 온도를 체크하며 지켜보고 있겠습니다.”
“하지만 진혁 씨의 팔 자상이…… 계속 피가 나고 있잖아요.”
“저는 대충 물로 씻고 처치하면 괜찮습니다. 어서 들어가세요. 저체온증은 초기 골든타임에 조치하지 않으면 치명적인 후유증이나 심장마비가 올 수 있어요. 빨리요.”
진혁의 단호한 훈계에 세아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옷가지를 들고 샤워실로 향했다. 이내 물이 끓어오르는 소리와 자욱한 수증기의 온기가 방 안에 스며들기 시작하자, 진혁은 참았던 긴장감이 풀려 바닥에 풀썩 주저앉아 젖어 무거운 가죽 재킷을 바닥으로 벗어던졌다.
진혁은 싱크대 수돗물로 오른팔에 묻은 오물과 흘러내린 피를 씻어냈다.
배수로를 기어가며 유입된 구정물 탓에 상처 부위는 벌겋게 부어오르고 찢어진 자국이 보기 흉하게 벌어져 있었다. 그는 세아의 구급함에 들어 있던 식염수를 상처 부위에 통째로 들이붓고 붉은 빨간약을 상처 틈새에 흘려 넣었다. 뼈를 깎는 듯한 예리한 격통이 뇌리를 때렸지만 이빨을 꽉 깨물어 터져 나오는 비명을 참았다. 그리고 압박 붕대를 이빨과 왼손 끝으로 잡아당겨 찢어진 부위가 밀착되도록 강하게 조여 묶었다.
자가 처치를 간신히 끝마친 진혁은, 주저앉아 바닥에 쓰러진 자신의 가죽 재킷으로 시선을 주었다.
그는 떨리는 손을 뻗어 재킷의 깊숙한 안주머니 안쪽을 뒤적였다.
손가락 끝에 닿는 기분 나쁘고 차가운 금속과 빳빳한 종이의 촉감. 폐냉동고 제어실에서 챙겨온 거울 살인마의 끔찍한 전리품인 은색 손거울과 3년 전의 신문 스크랩이었다.
진혁은 침실을 둘러보았다. 욕실에서는 여전히 수증기와 물소리가 세차게 퍼지고 있었고, 침대 위의 소윤은 전기요의 온기 속에서 곤히 단잠에 들어 있었다.
그는 홀로 조명 스탠드 아래에 서서 피가 살짝 묻은 은색 손거울을 뒤집어 손가락으로 만져보았다.
거울 뒷면, 날카로운 강철 송곳이나 핀으로 긁어 기괴하게 새긴 듯한 비뚤비뚤한 필체가 그의 동공을 뚫어지게 자극했다.
‘다음 거울은 훨씬 더 가까운 곳에서 너를 비출 것이다.’
더 가까운 곳.
진혁은 마른침을 억지로 삼키며 신문 스크랩을 펼쳤다. 3년 전 수백 명의 인명 피해를 낸 중앙로역 화재 참사의 현장 기사. 그 지옥의 아수라장 속에서 자신을 똑똑히 응시하고 조소하던 살인마는, 진혁의 이름 석 자에 붉은색 잉크로 선명하게 동그라미를 쳐두었다. 놈의 목적은 단순한 예술적 희생양을 찾는 것을 넘어, 3년 전 완결되지 못하고 생존한 자신을 거울 속 대칭의 마지막 장식품으로 옭아매고 종말을 맞이하게 하려는 집요한 광기였다.
그렇다면 놈이 예고한 ‘더 가까운 곳’이란 구체적으로 어디인가.
매일 배달을 다녀오던 허름한 자취방 빌라 건물? 아니면 늘 들르던 밥집과 단골가게?
그것도 아니라면, 자신을 구하고 진실을 밝히기 위해 이 끔찍한 사냥의 무대로 직접 걸어 들어온 세아의 곁인가.
진혁의 가슴팍이 걷잡을 수 없는 죄책감과 막연한 공포로 조여들기 시작했다. 자기와 인연을 맺었다는 이유만으로 민세아와 한소윤은 영하 25도의 얼음 지옥에서 동사할 뻔했다. 놈은 자신이 범인의 시야를 강제로 동조받는 이능력 상태임을 이미 어렴풋이 꿰뚫어 보고 있거나, 혹은 이 현상 자체를 기괴한 예술적 주파수 공유로 해석하며 목줄을 당기고 있는 게 분명했다.
“더는 너 좋을 대로 두지 않겠다.”
진혁이 손거울을 움켜쥔 왼손에 핏대를 세우며 힘을 꽉 주었다.
달칵.
욕실 문이 스르르 열리고 머리를 수건으로 감싸 쥔 세아가 온기를 풍기며 밖으로 걸어 나왔다. 온수를 뒤집어쓴 덕에 그녀의 하얗게 질렸던 얼굴에는 생기 있는 엷은 핏기가 돌고 있었다.
진혁은 반사적으로 들고 있던 은색 손거울과 종이 스크랩을 재킷 안주머니 깊숙한 구석으로 쑤셔 넣었다. 살인마가 남긴 이 음산한 경고와 집착의 흔적을 세아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녀를 더 깊은 두려움 속으로 밀어 넣기보다, 이 저주받은 연결고리는 자신과 놈의 차가운 1대1 구도 속에서 피를 흘리며 매듭지어야 하는 영역이었다.
“진혁 씨, 소윤 씨는 어때요? 체온이 좀 올라간 것 같아요?”
세아가 침대 곁으로 걸어가 이마를 짚으며 나직하게 물었다.
“호흡이 아주 고르고 깊어졌습니다. 열도 서서히 정상을 찾고 있고요. 오늘 밤 푹 자고 나면 의식은 문제없이 회복될 겁니다.”
“정말 다행이에요…… 우리가 해냈네요, 진혁 씨.”
세아가 지친 미소를 지으며 진혁의 곁으로 다가와 섰다. 그녀의 시선이 진혁의 상처와 긴장으로 경직된 어깨를 가만히 훑었다.
“진혁 씨도 서둘러 젖은 옷 갈아입고 편히 쉬어요. 내일부터는 서 경감님의 수사망과 살인마의 단서를 동시에 쫓아야 하는 가시밭길이니까요.”
“예, 그래야지요.”
진혁은 나직하게 대답하며 소파에서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 순간이었다.
쿵-.
심장이 거칠게 찢어지는 듯한 불길하고 육중한 타격음이 가슴 정중앙을 때렸다.
“윽……!”
진혁은 가슴팍을 움켜쥐며 옆의 싱크대 모서리를 다급히 짚었다. 흐려지는 눈동자 너머, 검은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얼굴 위로 낯선 공간의 붉고 불규칙한 시야가 찰나의 스냅샷처럼 겹쳐 흐릿하게 명멸했다.
귀를 가차 없이 긁어대기 시작하는 삐이이이- 하는 가느다란 이명 소리.
다음 동조(Synchronization)의 차갑고 서늘한 핏빛 전조가, 그의 정신을 옭아매며 서서히 어둠 속에서 손을 뻗어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