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2호선으로 출근합니다만?

2화: 퇴근 승인 불가
강선우의 구두 밑창이 강남역 승강장 바닥을 밟았다.
찬 기운이 발목을 타고 올라왔다. 바닥에 쌓인 복사 용지가 젖은 눈처럼 눌렸다. 종이 위에 찍힌 검은 잉크가 그의 구두 둘레로 스며들더니 얇은 글자로 번졌다.
업무 담당자 등록
"하."
선우는 웃음 대신 숨을 뱉었다.
전동차 안에서 누군가 비명을 삼켰다. 문턱 너머의 사람들은 한 발짝도 나오지 못한 채 그를 보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다들 문을 열라며 소리쳤다. 이제는 아무도 문밖에 서고 싶어 하지 않았다.
"문가에서 떨어지세요."
선우는 뒤를 보지 않고 말했다.
"제가 밀리면 안쪽으로 당겨요. 괴물 손 말고 제 팔만 잡으세요."
"그게 무슨 소리예요!"
"괴물 손 잡으면 같이 야근합니다."
말장난처럼 들렸지만 선우는 진심이었다.
승강장 조명이 깜빡였다. 하얀 형광등 빛이 꺼졌다 켜질 때마다 강남역은 지하철역이 아니라 끝없는 사무실이 되었다. 기둥에는 회의실 예약표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고 광고판 자리에는 반려된 기획안들이 빼곡했다.
야근의 망령들이 다가왔다.
놈들은 같은 정장을 입고 있었다. 목에는 넥타이 대신 낡은 전선이 감겨 있었고 눈 밑의 그림자는 턱 아래까지 흘러내렸다. 손마다 결재판이 들려 있었다. 결재판 위에는 선우의 이름이 붉게 찍혔다.
강선우
긴급 수정 요청
가장 앞의 망령이 빨간 펜을 들었다.
"반려."
그 한마디가 머릿속을 긁었다.
선우의 눈앞에 회사 회의실이 겹쳐 보였다. 팀장이 팔짱을 끼고 있었다. 수정은 어렵지 않다는 말. 자료 하나만 더 보자는 말. 오늘만 고생하자는 말.
그는 이를 악물었다.
"퇴근한 사람한테 업무 배정하는 건 근로기준법 위반입니다."
망령은 대답 대신 결재판을 휘둘렀다.
선우는 몸을 낮췄다. 결재판 모서리가 얼굴 옆을 스쳤다. 종이 냄새와 토너 냄새가 코를 찔렀다. 모서리가 지나간 자리의 공기가 얇게 찢어졌다.
한 대 맞으면 끝이다.
그 판단이 늦지 않게 내려왔다. 그는 싸움에 익숙한 사람이 아니었다. 대신 보고서가 터졌을 때 어떤 항목이 먼저 무너지는지는 잘 알았다.
범위. 반응 조건. 회피 동선.
지금 필요한 것도 그 셋이었다.
선우는 일부러 문턱에서 세 걸음만 떨어졌다.
너무 가까우면 뒤의 사람들이 휩쓸렸다. 너무 멀면 그가 돌아갈 길이 끊겼다. 지하철 승강장에서 매일 계산하던 자리였다. 어느 칸 문 앞에 서야 덜 밀리는지 어느 계단 쪽이 덜 막히는지 몸이 이미 알고 있었다.
다만 오늘의 혼잡도는 사람이 아니라 괴물이었다.
망령 하나가 옆으로 비틀거리며 다가왔다. 놈의 구두 밑에서 복사 용지가 저절로 정렬됐다. 종이들은 얇은 레일처럼 깔리더니 선우의 발밑까지 미끄러져 왔다.
업무 범위 확대
글자가 떠오르는 순간 종이 가장자리가 발목을 감으려 했다.
선우는 발을 빼며 이를 갈았다.
"업무 범위는 합의하고 넓히라고."
선우는 왼손의 텀블러를 바닥에 기울였다. 남은 커피가 복사 용지 위에 떨어졌다. 커피 자국은 곧 검은 글자로 바뀌었다.
미결
망령들의 고개가 동시에 꺾였다.
"미결..."
"확인..."
"재검토..."
놈들이 커피 자국으로 몰렸다.
선우는 가방에서 구겨진 기획안 출력물을 뽑아 바닥으로 던졌다. 오후 내내 붙잡고 있던 캠페인 시안이었다. 제목도 못 정한 문서가 이제는 목숨값을 했다.
종이 뭉치가 펼쳐지자 망령들이 더 세차게 반응했다. 빨간 펜들이 허공을 찌르며 출력물 위로 떨어졌다. 펜촉이 박힐 때마다 종이가 수정, 보완, 재작성이라는 글자로 찢어졌다.
"업무 키워드에 끌린다."
선우는 낮게 중얼거렸다.
정보였다. 더럽게 싫은 정보였지만 살아남게 해 줄 정보였다.
그때 객차 안에서 남자가 튀어나왔다.
안경을 쓴 직장인이었다. 그는 휴대폰을 귀에 붙인 채 울먹이고 있었다.
"우리 애가 기다려요! 나가야 돼요!"
"멈춰요!"
선우가 소리쳤지만 늦었다.
남자의 구두가 문턱을 넘었다. 바닥의 복사 용지가 그의 발목에 감겼다. 광고판에 붙은 문서 하나가 훅 떨어지더니 남자의 이름을 빨아들였다.
최민호
잔업 투입
야근의 망령 셋이 동시에 방향을 틀었다.
선우는 욕을 삼키고 뛰었다.
망령의 결재판이 남자의 목덜미로 떨어졌다. 선우는 사원증 목걸이를 쥔 오른손을 뻗었다. 플라스틱 카드가 결재판 모서리에 걸렸다. 보통이라면 바로 끊어졌을 줄이 이상하게 버텼다.
찌릿한 열이 손목을 타고 올라왔다.
[소지품 반응 확인]
[사원증: 업무 권한 매개체]
[임시 무기화 가능]
"좋아."
선우는 이를 악문 채 사원증 줄을 비틀었다.
"회사가 드디어 쓸모가 있네."
결재판이 당겨졌다. 망령이 휘청였다. 그 틈에 선우는 안경 쓴 남자를 어깨로 밀었다. 남자는 객차 안으로 나동그라졌다. 안쪽에서 여러 손이 남자를 잡아끌었다.
"문 잡아요!"
선우의 외침에 승객 몇 명이 비로소 움직였다.
조금 전까지 얼어붙어 있던 손들이 문가로 나왔다. 손들은 떨렸고 서로 부딪혔다. 그래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손은 아니었다.
"당길 준비만 해요. 밖으로 나오지 말고."
"알았어요!"
대답이 돌아왔다.
그 짧은 대답 하나가 선우의 등을 붙잡았다. 그는 완전히 혼자 밖에 서 있는 게 아니었다. 물론 믿을 만한 파티라고 부르기에는 많이 부족했다. 하지만 회사에서도 신입 하나가 자료명을 맞게 저장해 주면 그날은 희망이 있었다.
안쪽에서 중년 여자가 가방끈을 풀어 손잡이처럼 내밀었다.
"이거라도 잡아요!"
다른 남자는 자신의 넥타이를 풀었다. 평소라면 보기 민망한 광경이었겠지만 지금은 구명줄이었다. 선우는 그들이 갑자기 용감해졌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사람은 보통 무섭다. 그래도 누군가 먼저 버티면 그 뒤에서 할 수 있는 만큼은 움직인다.
그 정도면 충분했다.
"제 팔 말고 줄을 잡아도 됩니다. 대신 제가 신호하기 전에는 당기지 마세요."
"왜요?"
"제가 아직 한 놈을 끌고 가야 해서요."
승객들의 얼굴이 굳었다.
선우는 그 표정을 보고도 물러서지 않았다. 무섭다는 걸 모르는 게 아니었다. 무서운 걸 알면서도 계산이 끝났을 뿐이었다.
망령들이 선우를 둘러쌌다.
강선우
긴급 수정 요청
퇴근 승인 불가
결재판마다 그의 이름이 떠올랐다.
머릿속에서 알림음이 울렸다. 팀 메신저 특유의 짧고 날카로운 소리였다. 선우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을 뻔했다. 화면이 보였다. 읽지 않은 메시지가 수십 개였다.
선우 대리님 이것만 보고 가세요.
선우 대리님 아직 계시죠?
선우 대리님 주말에 잠깐 가능하세요?
숨이 막혔다.
아니었다.
지금 숨이 막히는 이유는 일이 많아서가 아니었다. 괴물이 눈앞에 있고 뒤에는 사람이 있었다. 해야 할 일은 단순했다. 버티고 밀어내고 돌아간다.
"안 계십니다."
선우가 눈을 떴다.
"퇴근했습니다."
허공의 알림창이 유리처럼 깨졌다.
[정신 압박 저항 성공]
[특성 각성 조건 충족]
[특성: 직장인의 깡다구]
[효과: 피로 및 공포 기반 정신 공격에 대한 저항이 상승합니다.]
가슴속이 뜨거워졌다.
몸이 가벼워진 것은 아니었다. 피곤한 건 여전했다. 다리가 후들거렸고 목 뒤에는 식은땀이 흘렀다. 다만 쓰러지고 싶다는 생각이 사라졌다.
선우는 사원증 줄을 망령의 결재판에 감았다. 그리고 온몸의 체중을 실어 잡아당겼다.
망령이 앞으로 끌려왔다.
그는 텀블러를 거꾸로 쥐었다. 스테인리스 바닥이 형광등 빛을 받아 번쩍였다. 선우는 망령의 빨간 펜을 향해 그대로 내려쳤다.
깡!
펜촉이 부러졌다.
망령의 입에서 종이가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검은 그림자가 정장 안쪽에서 흘러나왔다. 결재판에 찍혀 있던 선우의 이름이 흐려졌다.
[스킬 개방: 사무용품 무기화 Lv.1]
[사원증 목걸이: 임시 구속 도구]
[텀블러: 둔기 판정]
"둔기 판정이라."
선우는 숨을 몰아쉬었다.
"내 커피값 생각하면 전설 무기여야 하는데."
그는 웃을 틈 없이 몸을 틀었다.
다른 망령이 옆구리로 달려들었다. 결재판이 갈비뼈를 때렸다. 통증이 번쩍 올라왔다. 선우는 뒤로 밀렸다. 객차 안에서 누군가가 그의 팔을 붙잡았다.
"지금!"
승객들이 선우를 잡아당겼다.
그는 문턱까지 끌려오면서도 사원증 줄을 놓지 않았다. 첫 망령이 바닥에 끌려왔다. 놈은 안전지대 경계에 닿자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몸이 종이처럼 접혔다.
푸른 불꽃이 터졌다.
망령이 있던 자리에 납작한 조각 하나가 떨어졌다. 지하철 표처럼 생겼지만 반으로 깨져 있었다. 조각 위에는 흐릿한 글씨가 떠올랐다.
강남역 승차권 파편 1/3
[강남역 하급 망령 처치]
[승차권 파편을 모아 강남역 개찰구 보스룸 입장 조건을 충족하십시오.]
객차 안이 술렁였다.
선우는 바닥에 한쪽 무릎을 짚은 채 파편을 보았다.
완성된 승차권은 아니었다. 다음 역으로 가려면 아직 부족했다. 당연했다. 강남역이 이렇게 쉽게 퇴근을 승인할 리 없었다.
승강장 안쪽에서 복사기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드르륵.
드르르륵.
광고판 뒤의 어둠이 벌어졌다. 더 많은 망령들이 줄지어 걸어 나왔다. 그들 뒤로 커다란 복합기 실루엣이 희미하게 보였다. 종이를 토해 내는 입구마다 붉은 도장이 찍히고 있었다.
추가 수정
긴급 배포
최종본_진짜최종
그 복합기 위에는 낡은 사무실 시계가 매달려 있었다. 초침은 열두 시를 지나지 못하고 같은 자리에서 떨었다. 야근이 끝나지 않는 시간이었다.
복합기 옆 벽면에는 개찰구 표시가 보였다. 평소라면 사람들을 밖으로 내보내던 통로였다. 지금은 붉은 결재 도장이 찍힌 철문으로 막혀 있었다.
철문 위에 글자가 떠올랐다.
승인권자 대기 중
선우는 그 문구를 보고 속으로 욕했다.
승인권자라니. 보스룸 이름으로 이보다 더 싫은 단어도 드물었다.
선우는 깨진 승차권 파편을 주웠다. 손끝에 차가운 전기가 올랐다.
전동차 안의 사람들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안경 쓴 남자는 바닥에 엎드린 채 울고 있었다. 누군가는 미안하다고 중얼거렸다. 누군가는 제발 돌아오라고 했다.
선우는 사원증 줄을 다시 손에 감았다.
"세 조각이면 되는 거죠."
그는 승강장 안쪽을 보았다.
"강남역답게 결재 라인이 더럽게 기네."
그리고 다시 문턱 밖으로 발을 내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