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2호선으로 출근합니다만?

시놉시스
만성 피로에 시달리는 4년 차 마케팅팀 대리 강선우는 강남역에서 2호선 퇴근 열차에 오른다. 집에 가서 씻고 자는 것만 바라던 순간 열차가 멈추고 서울 지하철 2호선 전체가 무한 동력 던전으로 재편된다. 낯선 시스템 경고창과 강남역의 야근 망령들 앞에서 선우는 전동차 내부가 잠시나마 안전한 공간이라는 첫 규칙을 알아낸다.
1화: 퇴근 열차가 멈춘 날
강선우는 밤 열 시가 넘은 강남역 지하 통로를 걷고 있었다.
셔츠 깃은 목에 들러붙었고 사원증은 가슴팍에서 작은 플라스틱 추처럼 흔들렸다. 오른손에는 미지근해진 핸드드립 텀블러가 있었다. 왼손에는 오늘도 처리하지 못한 알림이 남은 휴대폰이 있었다.
팀장은 퇴근 직전에 내일 오전 보고용 자료를 다시 보자고 했다. 보고용이라는 말은 늘 마법 같았다. 이미 끝난 일을 끝나지 않은 일로 되살렸다. 죽은 파일도 살아나고 퇴근한 사람도 다시 사무실로 불려왔다.
"오늘은 진짜 집에 간다."
선우는 개찰구에 교통카드를 찍으며 중얼거렸다. 말이라도 해야 몸이 그쪽으로 움직였다.
승강장은 퇴근을 놓친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다들 비슷한 얼굴이었다. 화면을 보는 눈은 흐렸고 어깨는 젖은 종이처럼 내려앉아 있었다. 지하철이 들어오자 사람들은 약속한 것처럼 앞으로 밀렸다.
선우는 객차 안에 몸을 구겨 넣었다. 문이 닫히기 직전 등 뒤에서 누군가의 가방이 밀고 들어왔다. 그는 숨을 반쯤 접고 손잡이를 잡았다.
전동차가 출발했다.
그 순간 안내 방송이 끊겼다.
처음에는 평범한 전기 문제라고 생각했다. 형광등이 두 번 깜빡였고 창밖 터널의 검은 벽이 이상하게 늘어졌다. 휴대폰 화면 오른쪽 위에서 안테나 표시가 사라졌다.
누군가가 "데이터 또 안 터지네" 하고 투덜거렸다.
선우도 습관처럼 메신저를 열었다. 전송 실패 표시가 줄줄이 떠 있었다. 팀장이 보낸 마지막 메시지만 선명했다.
선우 대리님 혹시 아직 안 멀었으면 자료 하나만 더 봐주세요.
"멀었습니다."
선우는 답장을 보내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말했다. 객차 안에서 작게 웃는 사람이 있었다. 그 웃음이 끝나기도 전에 바닥 아래에서 쇠가 비틀리는 소리가 났다.
전동차가 급정거했다.
몸들이 한꺼번에 앞으로 쏠렸다. 선우는 손잡이를 붙잡은 팔이 빠질 듯한 통증을 느꼈다. 누군가의 노트북 가방이 그의 무릎을 찍었다. 아이 울음소리와 욕설이 동시에 터졌다.
"뭐야!"
"기관사님! 문 열어요!"
"이거 사고 아니에요?"
승객들의 목소리가 객차 천장에 부딪혀 돌아왔다. 그 순간 허공 한가운데 푸른 창이 떠올랐다.
[경고: 지하철 2호선 순환선 전체가 '무한 동력 던전: 링 오브 서울'로 재편됩니다.]
[현재 위치: 강남역]
[난이도: B+]
[기믹: 무한 야근과 과로의 망령]
[최종 미션: 43개 역을 모두 공략하고 집이 있는 역에서 하차하십시오.]
객차가 얼어붙었다.
누군가 웃었다. 장난이라고 말하려던 웃음이었다. 그러나 웃음은 오래가지 못했다. 고개를 돌려도 창은 사라지지 않았다. 눈을 감았다 떠도 같은 문장이 같은 자리에 있었다.
선우는 텀블러를 더 세게 쥐었다.
믿고 싶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는 보고서를 만들 때마다 싫어도 숫자를 봐야 했다. 싫은 사실은 싫다는 이유로 빠지지 않았다.
통신 두절. 열차 정지. 승객 패닉. 원인 불명. 모두에게 보이는 시스템 창.
그는 머릿속으로 항목을 나눴다. 정리한다고 해결되는 건 아니었지만 정리하지 않으면 더 빨리 망했다. 회사가 가르쳐 준 몇 안 되는 쓸모 있는 습관이었다.
문 위 전광판이 붉게 바뀌었다.
[전동차 내부는 임시 안전지대입니다.]
[강남역 공략을 시작하려면 하차하십시오.]
[승차권 미소지자는 다음 역으로 이동할 수 없습니다.]
"안전지대?"
선우가 낮게 되물었다.
열차 문이 열렸다.
문밖은 강남역 승강장이 아니었다. 정확히는 강남역의 형태를 하고 있었지만 내용물이 완전히 달랐다.
광고판 자리에는 결재 대기 문서들이 빽빽하게 붙어 있었다. 새로 나온 향수와 어학원 광고가 있어야 할 곳에 긴급, 재검토, 금일 중이라는 붉은 도장이 끝없이 찍혀 있었다.
바닥에는 복사 용지가 눈처럼 쌓였다. 용지 위에는 발자국 대신 검은 잉크 자국이 번졌다. 천장 조명은 하얗게 질린 사무실 형광등으로 바뀌어 있었고 깜빡일 때마다 승강장 전체가 야근실처럼 보였다.
승강장 끝에서는 정장을 입은 무언가들이 걸어왔다.
그것들은 사람처럼 보였지만 사람은 아니었다. 목이 비정상적으로 앞으로 빠져 있었고 눈 밑에는 검은 그늘이 턱까지 흘러내렸다. 손에는 두꺼운 결재판과 빨간 펜이 들려 있었다.
"보고서..."
"수정..."
"퇴근 금지..."
말소리가 바닥을 긁었다.
앞쪽에 있던 남자가 욕을 내뱉고 문밖으로 뛰어나가려 했다. 선우는 반사적으로 그의 후드 끝을 잡아당겼다. 남자가 뒤로 넘어지며 소리쳤다.
"뭐 하는 거야!"
"문턱 봐요."
선우는 승강장 바닥을 가리켰다.
정장 마수 하나가 손을 뻗고 있었다. 결재판 모서리가 문 앞까지 닿았다. 그러나 팔은 보이지 않는 유리벽에 막힌 것처럼 더 들어오지 못했다. 손목의 뼈가 우드득 꺾였는데도 놈은 객차 안으로 한 치도 들어오지 못했다.
마수는 입을 찢으며 객차 안을 노려봤다. 빨간 펜 끝에서 잉크가 피처럼 떨어졌다.
"퇴근 승인 불가..."
승객들이 한 걸음씩 뒤로 물러났다.
넘어진 남자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입을 다물었다. 방금 전까지 문을 열라고 소리치던 사람들도 숨소리만 냈다. 아이를 안은 여자가 울음을 삼키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선우는 심장이 뛰는 소리를 들었다. 하지만 머리는 조금씩 차가워졌다.
시스템이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면 전동차 안은 안전지대다. 대신 승차권이 없으면 다음 역으로 갈 수 없다. 그리고 승차권은 아마 저 바깥에서 얻어야 한다.
그는 문가에 떨어진 복사 용지 한 장을 보았다. 객차 안쪽으로 반쯤 넘어온 종이였다. 선우는 발끝으로 그것을 살짝 건드렸다.
종이는 아무 일 없이 밀렸다.
그가 텀블러 뚜껑을 열고 남은 커피 한 방울을 문밖으로 떨어뜨렸다. 커피는 승강장 바닥에 닿자마자 검은 문자로 번졌다.
미결 업무
정장 마수들의 고개가 동시에 돌아갔다.
"아."
선우는 뚜껑을 조용히 닫았다.
"커피도 업무로 치네. 강남답다."
누군가가 이 상황에 농담이 나오냐는 눈으로 그를 봤다. 선우는 농담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정보였다. 아주 더럽고 쓸데없이 현실적인 정보.
"다들 문에서 떨어지세요."
그는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뛰어나가면 바로 야근 확정입니다."
"당신이 뭔데요?"
중년 남자가 날카롭게 물었다.
선우는 자기 사원증을 내려다봤다. 이름 아래에는 대리라는 직급이 박혀 있었다. 이런 자리에서 아무 힘도 없는 직급이었다. 평소에도 그랬다.
"아무것도 아닌데요. 그래도 방금 한 명 덜 죽게 했습니다."
중년 남자의 입이 닫혔다.
선우는 객차 안을 훑었다. 사람들은 답을 원했다. 누군가가 확신 있게 말해 주기를 바랐다. 선우도 그런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없었다.
그럼 임시 담당자를 세워야 했다. 회사에서는 늘 그랬다. 담당자가 없으면 가장 먼저 문제를 발견한 사람이 담당자가 됐다.
빌어먹게도 이번에는 그가 그 사람이었다.
허공에 다시 창이 떠올랐다.
[강남역 공략 대기 시간이 3분 남았습니다.]
[시간 초과 시 전 객차 문이 강제 개방됩니다.]
[첫 승차권을 획득하지 못하면 열차는 출발하지 않습니다.]
객차 안의 공기가 바뀌었다.
숨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기다리면 더 나빠진다. 회사에서 이미 수없이 겪은 구조였다. 문제를 방치하면 일정이 터지고 일정이 터지면 주말이 사라진다.
이번에는 주말이 아니라 목숨이었다.
"경찰에 신고해야지."
누군가 휴대폰을 흔들었다.
"안 터집니다."
"비상 통화는 되잖아요."
"아까부터 안테나가 사라졌어요. 그리고 저 문구가 맞으면 여기는 더 이상 그냥 강남역이 아닙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요!"
"맞아요. 말이 안 됩니다."
선우는 그 사람을 똑바로 봤다.
"그런데 말이 되는 선택지만 고르다가는 3분 뒤에 문이 전부 열립니다."
침묵이 떨어졌다.
선우는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안에는 노트북 충전기와 구겨진 기획안 출력물과 여분의 펜이 들어 있었다. 평소에는 어깨만 망가뜨리던 짐이었다. 지금은 뭐라도 쓸 수 있는 물건처럼 보였다.
그는 사원증 목걸이를 손에 감았다. 플라스틱 카드가 손바닥에 닿았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던 회사 로고가 이상하게 단단하게 느껴졌다.
바깥의 야근 망령들이 문 앞으로 몰려들었다. 놈들은 문턱 앞에서 멈춘 채 결재판을 들어 올렸다. 결재판에는 승객들의 이름이 하나씩 떠올랐다.
김현수. 박미라. 오정택.
그리고 가장 앞의 결재판에 선우의 이름 석 자가 찍혔다.
강선우.
아래에는 붉은 글씨가 번졌다.
긴급 수정 요청
선우의 눈꺼풀이 떨렸다.
팀장의 메시지보다 더 보기 싫은 문구였다. 지하철이 던전으로 바뀌고 괴물이 나타나도 결국 그를 부르는 말은 수정 요청이었다.
"집에 가야 되는데."
그가 말했다.
목소리는 작았지만 이상하게 객차 안에 또렷하게 퍼졌다.
카운트다운 숫자가 줄어들었다.
2분 12초.
2분 11초.
승강장 형광등이 일제히 깜빡였다. 광고판의 문서들이 휘날리며 바닥의 복사 용지들이 소용돌이쳤다. 야근의 망령들이 같은 말을 반복했다.
"수정..."
"재검토..."
"퇴근 금지..."
선우는 텀블러를 왼손에 들고 사원증을 오른손에 감았다. 무선 이어폰 케이스를 주머니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쓸 수 있는 건 전부 챙겨야 했다.
"문 열리면 다 같이 밀려나갑니다. 그 전에 한 명이 먼저 나가서 놈들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봐야 합니다."
"그 한 명이 누군데요?"
누군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선우는 문밖의 결재판을 보았다. 거기엔 아직도 그의 이름이 떠 있었다.
업무 담당자 지정 완료.
꼭 그런 식으로 보였다.
선우는 헛웃음을 삼켰다.
"제 이름 걸렸네요."
"미쳤어요? 나가면 죽어요."
"가만히 있어도 문이 열립니다."
그는 열린 문 앞에 섰다. 문턱 너머로 찬 바람이 불어왔다. 바람에서는 지하철 먼지 냄새와 복사기 토너 냄새가 함께 났다.
강남역의 괴물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지긋지긋한 얼굴이었다. 퇴근 직전에 새 일을 들이미는 얼굴. 내일까지 가능하냐고 묻는 얼굴. 아무렇지 않게 남의 시간을 잡아먹는 얼굴.
선우는 이를 악물었다.
"퇴근길에까지 일 시키면 선 넘었지."
카운트다운이 1분을 끊었다.
그가 첫발을 내딛기 직전 허공에 작은 문구가 새로 떠올랐다.
[개인 적성 검토 중...]
[소지품 목록 확인 중...]
[사원증, 텀블러, 업무용 펜, 기획안 출력물]
선우의 손에 감긴 사원증이 희미하게 뜨거워졌다.
문밖의 야근 망령 하나가 빨간 펜을 들어 올렸다. 결재판 모서리가 칼날처럼 얇게 변했다. 놈은 선우의 이름을 긁으며 낮게 속삭였다.
"반려."
선우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 말은 내가 제일 싫어하는데."
그리고 강남역 던전의 바닥으로 발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