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정지 능력으로 날로 먹는 법

5화: 보이지 않는 장벽
밤새도록 고민했지만 답은 하나였다.
경찰에 당장 신고할 수는 없었다. 신고하는 순간, 경찰은 "그걸 어떻게 발견했냐"고 물을 것이 뻔했다. 한밤중에 남의 영업장에 무단 침입해 카펫 밑을 뜯었다고 실토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만약 한도진이 눈치를 채고 물증을 다른 곳으로 옮겨버리기라도 한다면, 오히려 시우 본인이 주거침입 및 절도 미수 혐의로 엮여 철창신세를 져야 할 수도 있었다.
'게다가 그 인간…… 보통 영악한 놈이 아니야.'
시우는 교실 책상에 엎드린 채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범인의 정체를 확실히 알았지만, 당장 목을 죌 수단이 없다는 사실이 뼈아팠다. 그렇다면 지금 당장 시우가 해야 할 일은 단 하나였다.
최유나를 그 미친 연쇄살인마의 손아귀로부터 철저하게 격리하는 것.
"야, 강시우. 너 오늘 진짜 이상하다. 어제 밤늦게 돌아다니더니 감기라도 걸렸어?"
종례가 끝나자마자 유나가 가방을 메며 시우의 이마에 손을 얹으려 했다. 시우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뒤로 빼며 유나의 손을 피했다.
"아니, 감기 아냐. 피곤해서 그래. 그러니까 오늘은 딴 데 들르지 말고 바로 집으로 가자."
"치, 싱겁긴. 나 오늘 카페 '드림' 들러서 사장님한테 주말 알바 자리 물어보려고 했는데."
"뭐? 알바?!"
시우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유나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응. 사장님이 어제 나 가기 전에 넌지시 말씀하셨거든. 주말 파트타임 구하고 있으니까 생각 있으면 오라고. 시급도 엄청 많이 주신다고 했어. 용돈도 벌고 좋잖아?"
심장이 나락으로 쿵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한도진이 덫을 놓기 시작했다. 유나를 자신의 영역인 카페로 끌어들여, 자연스럽게 감시하고 통제할 수 있는 구도를 만드는 것이다. 연쇄살인마가 타깃에게 호의를 베풀며 거리를 좁히는 전형적인 사냥 수법이었다.
"안 돼."
시우의 목소리가 굳어졌다.
"어? 왜 안 돼?"
"……너 고3 올라갈 준비 안 하냐? 성적 떨어진다고 어머니가 걱정하셨잖아. 주말에 수학 학원 보충 들어가야지."
"무슨 소리야? 나 수학 학원 보충 없는데? 그리고 우리 엄마는 용돈은 스스로 벌어 쓰는 게 경제 관념에 좋다고 찬성하셨어."
"아무튼 안 돼. 내 감이 그래. 그 카페 왠지 불길해."
"하이고, 언제부터 그렇게 영험한 신기를 가지셨다고 그러실까? 난 갈 거야. 사장님이 어제 쿠키도 공짜로 주셨는데 예의가 아니지."
유나는 시우의 만류를 장난으로 치부하고 앞장서 걸어갔다. 시우는 이를 악물고 그녀의 뒤를 따랐다.
'미치겠네. 억지로 끌고 갈 수도 없고.'
결국 시우는 유나를 따라 다시 한번 그 소름 끼치는 살인마의 굴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딸랑──.
맑은 종소리와 함께 들어선 카페 '드림'은 여전히 평화롭고 아늑했다.
한도진은 카운터 안쪽에서 에스프레소 머신을 작동시키고 있었다. 향긋한 커피 향이 코끝을 스쳤지만, 시우의 눈에는 그 모든 풍경이 피비린내 나는 연출된 연극 무대처럼 보였다.
"어라, 유나 학생이랑 시우 학생 왔네요? 반가워요."
도진이 고개를 돌려 화사하게 웃었다. 그 완벽한 미소 뒤에 숨겨진 메스와 피 묻은 앞치마를 떠올리자, 시우는 소름이 돋아 입을 굳게 다물었다.
"안녕하세요, 사장님! 저 알바 제안하신 것 때문에 왔어요."
유나가 카운터 앞으로 싹싹하게 다가갔다. 도진의 눈동자가 유나를 향해 온화하게 가라앉았다.
"아, 알바요? 정말 고맙네요. 안 그래도 일손이 부족해서 걱정이었는데. 유나 학생처럼 성실한 친구라면 언제든 대환영이죠."
도진은 주방 냉장고에서 시원한 오렌지 주스 두 잔을 꺼내 카운터 위에 올려놓았다.
"고마움의 표시로 주스부터 한 잔 마셔요. 그리고 이건 알바 관련해서 부모님 동의서랑 간단한 매뉴얼 적어둔 종이에요."
도진이 유나에게 서류 한 장과 함께 귀여운 분홍색 캐릭터 텀블러를 건넸다.
"이건 오픈 기념 사은품인데 유나 학생 주려고 따로 빼뒀어요.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네."
"와! 사장님 센스 최고! 정말 감사해요."
유나가 기뻐하며 텀블러를 받으려 손을 뻗었다.
도진은 자연스럽게 유나의 가방을 힐끗 보더니, "가방 열려 있네요. 내가 넣어줄게요"라며 유나의 숄더백 지퍼가 반쯤 열린 틈새로 손을 뻗었다.
그 짧은 순간, 시우의 시야에 도진의 긴 손가락 사이에 쥐어진 아주 작고 얇은 검은색 칩이 포착되었다.
동전 크기만 한 스마트 태그. 위치추적 겸 도청이 가능한 기기였다. 도진은 유나에게 선물을 챙겨주는 척하며, 그녀의 가방 가장 깊숙한 안주머니에 그 추적기를 자연스럽게 집어넣으려 하고 있었다.
게다가 도진의 손가락 끝이 텀블러의 뚜껑 부분을 아주 미세하게 톡 건드리는 모습도 보였다. 텀블러 안쪽에서 묘한 백색 가루 흔적이 살짝 묻어나는 듯한 기시감이 스쳤다.
'이 개새끼가……!'
시우는 눈앞이 뒤집히는 분노를 느꼈다. 이대로 도진의 손길이 유나의 가방에 닿는다면, 유나는 24시간 내내 살인마의 감시 하에 놓이게 될 터였다.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시우는 주먹을 꽉 쥐고 허파에 공기를 가득 채웠다.
'정지!'
스우우우──.
세상이 어둠의 장막을 드리우듯 멈추어 섰다.
도진의 손가락이 유나의 가방 지퍼 틈새로 막 들어가려던 그 찰나의 자세 그대로 화석처럼 굳었다. 유나의 밝은 미소도, 컵에서 튀어 오른 주스의 미세한 포말도 허공에 얼어붙었다.
"읍……!"
두 번째 연속 사용으로 인해 시우의 갈비뼈 근처가 바늘로 찌르는 듯한 통증을 뿜어냈다. 목구멍에서 비릿한 피 맛이 올라왔지만, 시우는 이를 악물고 도진의 손 앞으로 다가갔다.
그의 얼굴을 정면에서 마주했다.
가까이서 본 도진의 눈동자는 멈춰진 세계 속에서 흐리멍덩하게 죽어 있었다. 시우는 도진의 검지와 중지 사이에 끼어 있던 검은색 스마트 태그를 아주 조심스럽게 빼냈다. 멈춰진 육체의 마찰 때문에 칩을 빼내는 것만으로도 도진의 손가락 피부가 끈적하게 달라붙어 떼어내기 힘들었다.
시우는 간신히 스마트 태그를 회수했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 칩을 어디에 두어야 도진이 가장 당황할까.
시우는 피식 웃으며 도진의 검은색 앞치마 뒷주머니 깊숙한 곳에 그 칩을 쑤셔 넣었다. 자신의 도청기를 자신이 차고 다니게 만드는 소심한 복수였다.
그리고 도진이 유나에게 건넸던 주스 잔과, 자신에게 건넸던 주스 잔의 위치를 완벽하게 바꾸어 놓았다. 만약 주스에 무언가 수상한 약물을 타 두었다면 스스로 마시게 될 터였다. 텀블러 역시 유나의 손이 닿지 않도록 카운터 아래 도진의 발치 옆 쓰레기통 구석으로 걷어차 밀어 넣었다.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다. 머리가 돌 것처럼 산소가 부족했다.
남은 시간은 10초.
시우는 원래 서 있던 자리로 잽싸게 돌아갔다. 손을 주머니에 넣고 자연스러운 자세를 취한 뒤, 터질 것 같은 허파를 부여잡고 외쳤다.
'풀려!'
쿠우우웅──!
소음의 파도가 덮쳐왔다.
"어머, 감사해요 사장님!"
유나가 가방을 챙기며 웃었고, 한도진은 유나의 가방에서 손을 떼어내며 손가락을 모았다.
그런데 그 순간, 한도진의 표정이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손가락 사이에 있어야 할 검은색 스마트 태그의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다. 분명 유나의 가방 안주머니에 칩을 툭 떨어뜨려 놓는 순간까지 확실하게 감각을 인지하고 있었는데, 눈을 깜빡인 찰나에 손끝이 허공을 짚고 있었다.
게다가 유나에게 건네주려던 분홍색 텀블러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어?"
도진의 입에서 낯선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는 자신의 손가락을 멍하니 쳐다보다가, 카운터 아래를 두리번거렸다.
"사장님? 왜 그러세요?"
유나가 의아하게 물었다.
"아, 아니요…… 제가 선물을 카운터 위에 둔 줄 알았는데…… 어디 갔지?"
도진의 이마에 얇은 핏대가 섰다. 그의 눈동자가 아주 빠르게 좌우로 흔들렸다.
자신의 기억과 물리적 현실 사이에 거대한 공백이 발생한 느낌이었다. 방금 전까지 자신의 통제 하에 완벽하게 흘러가던 세계의 톱니바퀴가, 아주 미세하지만 확실하게 엇나갔음을 본능적으로 감지한 것이다.
도진은 주스를 마시려 컵을 들려다가, 순간 컵의 위치가 자신이 놓아둔 자리와 미세하게 반대로 놓여 있는 것을 발견하고 손을 멈췄다. 그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정신이 없나 보네요. 요즘 피곤해서 환각을 보나 봅니다."
도진은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며 미소를 지었지만, 눈빛은 이미 깊은 혼란과 경계심으로 차갑게 굳어 있었다.
시우는 그런 도진의 반응을 차갑게 쳐다보며 유나의 팔목목을 잡았다.
"가자, 유나야. 너 아까 어머니가 마트 같이 가자고 문자 보내셨잖아."
"어? 진짜? 아, 맞다! 오늘 장 보는 날이었지."
유나가 시우의 재촉에 허겁지겁 가방을 고쳐 멨다.
"사장님, 저희 먼저 갈게요! 아르바이트 신청서는 내일 가져다드릴게요!"
"……그래요. 조심히 가요."
도진은 멍한 표정으로 배웅하며, 멀어져 가는 두 학생의 뒷모습을 주시했다.
그리고 문이 닫히자마자, 그는 자신의 주머니를 뒤적이다 뒷주머니에서 느껴지는 이질적인 물건에 손을 넣었다.
그의 손끝에 들려 나온 것은, 자신이 분명 유나의 가방에 넣었다고 생각한 검은색 스마트 태그였다.
"이게…… 왜 내 주머니에……?"
도진의 동공이 미친 듯이 수축했다. 그의 등 뒤를 타고 흐르는 것은 단순한 당혹감이 아니었다.
자신의 계산을 완벽하게 읽고 조롱하는 듯한 누군가의 보이지 않는 손길.
그 소름 끼치는 이질감에 연쇄살인마의 미소가 완벽하게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카페 밖으로 나온 시우는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었다.
가슴통증이 여전했지만, 한도진의 낯짝에 엿을 먹였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한 보상이 되었다.
"야, 강시우. 너 오늘 진짜 급하다. 무슨 아르바이트 얘기도 제대로 못 하게 만들고."
유나가 투덜대자, 시우는 유나의 머리를 가볍게 쥐어박았다.
"시끄러. 다 널 위해서 그런 거니까 군말 말고 집이나 가."
"뭐래. 진짜 웃겨."
유나는 입술을 내밀었지만 더 이상 묻지 않고 집을 향해 걸었다.
시우는 뒤편의 어두워진 카페 건물을 보았다. 보이지 않는 전쟁은 이제 겨우 시작이었다. 자신이 멈추는 세계 속에서 던지는 방해 공작들이 한도진의 숨통을 어떻게 조여갈지, 시우는 속으로 매서운 결의를 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