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정지 능력으로 날로 먹는 법

28화: 눈을 뜬 기적
사흘이 더 흘렀다.
시우의 어머니 휴대폰으로 '용의자 검거 기여 포상 장학금 500만 원 입금 완료'라는 문자 알림이 띠링 울린 바로 그날 오후였다. 시우는 의식의 어렴풋한 경계선 너머로 어머니가 오 경장에게 감사의 전화를 돌리며 우는 목소리를 아주 기막히게 훔쳐 들었다.
'좋아. 장학금 무사 입금 완료. 감사장 소동도 며칠 지나서 서장님 관심사에서 멀어졌겠지.'
실리는 확실하게 챙겼고, 귀찮은 경찰 공무원들의 대대적인 스포트라이트 이벤트도 한풀 꺾였을 타이밍이었다. 시우는 이제 슬슬 깊은 잠의 가면을 벗고 인간 세상으로 귀환할 준비를 마쳤다. 더 누워 있다간 진짜로 욕창이 생길 지경이었으니까.
따스한 가을 햇살이 병실 유리창을 넘어 침대 위로 길게 늘어지고 있었다.
유나는 오늘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침대 옆 의자에 앉아 콧노래를 나직하게 흥얼거리며 사과를 깎고 있었다.
사각, 사각.
"어…… 어라?"
유나가 사과 껍질의 마지막 나선형 곡선을 돌리던 중, 칼끝이 미세하게 미끄러졌다. 껍질이 끊김과 동시에 울퉁불퉁하게 깎인 깎인 사과 알맹이가 손바닥 사이로 빠져나가 침대 아래 먼지 구덩이 바닥을 향해 수직 낙하하기 시작했다.
"앗! 내 아까운 사과……!"
유나가 다급하게 손을 뻗으려던 그 짧은 찰나.
스윽──.
하얗게 주둥이를 드러내고 누워 있던 시우의 오른손이, 침대 이불 속에서 번쩍 튀어 나왔다.
그의 긴 손가락은 바닥에 닿기 직전의 사과 알맹이를 공중에서 아주 우아하고도 정확하게 낚아챘다. 1초의 오차도 없는 신속하고 야무진 포획이었다.
탁.
"……어?"
유나는 뻗었던 손을 허공에 멈춘 채, 멍하니 침대를 쳐다보았다.
시우는 눈을 가늘게 뜨고 상체를 가볍게 일으키며, 낚아챈 사과를 쓱 옷자락에 닦아 아삭, 하고 한 입 베어 물었다. 그리고 시큼하게 웃으며 첫마디를 건넸다.
"유나야. 모양 진짜 엉망진창이네. 내가 사과를 깎으랬지 감자를 깎으랬냐?"
사과 씹는 아삭아삭한 소리가 평화로운 병실의 공기를 가볍게 흔들었다.
유나는 멍하니 시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산소마스크를 벗어 던지고, 뺨에 장난기 가득한 홍조를 띤 채 자신을 바라보며 사과를 씹고 있는 시우의 건강한 얼굴.
"너…… 너……."
유나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리더니, 이내 커다란 눈망울에서 눈물이 폭포처럼 쏟아져 내렸다.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과도를 바닥에 댕그랑 떨어뜨리고, 즉시 시우의 멱살을 잡고 그의 품 안으로 거칠게 몸을 던져 엎어졌다.
"바보야! 나쁜 놈아! 왜 이제야 일어나! 진짜 죽은 줄 알았잖아, 이 멍청아!"
유나는 시우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엉엉 울었다.
그녀의 격렬한 포옹에 시우는 갈비뼈 부근에서 억, 하는 신음을 내지었지만, 이번에는 예전처럼 폐포가 터질 듯한 날카로운 고통이 찾아오지 않았다. 다 타버렸던 세포들이 사흘간의 숙면 동안 완벽하게 치유되어, 정상적인 인간의 건강한 압박감만이 기분 좋게 다가올 뿐이었다.
"야, 야. 유나야. 아파, 아파서 죽겠다. 나 방금 막 일어난 중환자거든?"
시우는 툴툴거리면서도, 울어대는 유나의 머리를 쥐어박듯 가볍게 쓰듬어 주었다. 유나의 머리카락에서 흘러나오는 은은한 샴푸 향이, 자신이 진짜 살아 돌아왔음을 실감 나게 해주었다.
"흐윽…… 흑…… 넌 진짜 살아나서 처음 하는 말이 잔소리냐? 이 똥고집쟁이 자식."
유나는 코를 훌쩍이며 시우의 가슴팍에서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볼은 눈물과 콧물로 엉망이었지만, 입가에는 세상을 다 얻은 듯한 화사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야, 근데 바나나우유는 없냐? 병실 밥 대충 냄새 맡아봤는데 맛없을 것 같아. 매점 가서 바나나우유랑 초코빵 좀 사 와."
"치, 환자가 식욕 하나는 세계 제일이네. 누워 있어, 내가 다 사 올 테니까."
유나는 소매로 대충 눈물을 훔치며 씩 웃더니, 병실을 잽싸게 뛰어 나갔다.
시우는 멀어져 가는 유나의 뒷모습을 보며, 침대 헤드에 편안하게 몸을 기댔다.
그는 주머니 속에 들어있던 유나의 은제 팔찌 파편을 만지작거렸다.
시간을 멈추는 초월적인 기적의 능력.
시우는 이제 그 힘을 한동안 쓰지 않고, 마음속 깊은 금고 속에 조용히 봉인해 두기로 결심했다. 굳이 허파가 찢어지는 고통을 참아가며 시간을 멈추지 않아도, 곁에 있는 유나가 자신을 과보호하며 빵을 사다 주고 땀을 닦아주는 이 평화로운 일상 자체가 자신이 그토록 원하던 궁극의 '날로 먹는 인생'의 정수임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역시 인생은 날로 먹는 게 최고야."
시우는 사과 조각을 입에 털어 넣으며 달콤하게 미소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