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정지 능력으로 날로 먹는 법

2화: 교문 위의 흔적과 스치는 그림자
"어떤 놈이냐."
낮게 깔린 목소리가 교실 안의 소란을 단숨에 잠재웠다.
1교시 시작 전, 아침 조회 시간. 교단에 선 2학년 3반 담임이자 학생부장인 마동철 교사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평소에도 '마동탁'이라는 별명답게 불같은 성격을 자랑하는 그였지만, 오늘 아침의 분노는 차원이 달라 보였다.
교실 안의 모든 학생들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마동철 교사의 가슴팍으로 쏠렸다.
그의 하얀 와이셔츠 오른쪽 가슴팍에는 아주 선명하고 정갈한 붉은색 도장 자국이 찍혀 있었다.
[참 잘했어요]
심지어 도장 옆에는 귀여운 미소를 짓고 있는 아기 천사의 얼굴까지 완벽하게 박혀 있었다.
"푸흡……!"
누군가 입을 틀어막는 소리가 고요한 교실에 울렸다. 마동철의 매서운 눈빛이 번쩍 빛나자, 소리의 근원지는 즉시 고개를 숙이고 책상과 물아일체가 되었다.
"다시 묻는다. 오늘 아침 8시 29분에서 30분 사이, 교문을 통과하며 내 몸에 이따위 장난질을 친 놈이 누구냐? 자수하면 벌청소 삼 주일로 끝내겠다. 하지만 내 손에 잡히는 날에는……."
마동철이 들고 있던 알루미늄 지휘봉을 가볍게 휘둘렀다. 쉭, 하는 날카로운 파공음이 교실을 흔들었다. 학생들은 마른침을 삼키며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범인은 이 교실 안에, 그것도 아주 태연한 표정으로 창밖을 바라보며 앉아 있었다.
강시우는 턱을 괸 채 하늘을 흘러가는 구름을 감상하고 있었다. 겉으로는 지극히 평온해 보였지만, 실상은 아침의 무리한 시간 정지 여파로 온몸의 뼈마디가 쑤시고 있었다.
'와, 진짜 죽을 뻔했지.'
겨우 1분 남짓한 시간 동안 세상을 멈추고 달렸을 뿐인데, 허벅지는 터질 것 같고 갈비뼈 안쪽은 찌르는 것처럼 아팠다. 산소가 멈춰버린 세계를 걷는 대가는 생각보다 무거웠다. 하지만 마동철의 셔츠에 박아버린 '참 잘했어요' 도장의 위력을 실물로 확인하니 쑤시던 뼈마디의 통증이 싹 가시는 기분이었다.
'그러게 왜 애들 지각 잡겠다고 교문 앞을 그렇게 가로막고 서 계십니까, 마 쌤.'
시우는 입꼬리가 올라가려는 것을 필사적으로 억누르며 딴청을 피웠다.
그때, 앞자리에 앉아 있던 최유나가 슬그머니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커다란 눈동자가 의심 가득한 빛을 띠고 있었다.
"야, 강시우."
"왜."
"너 진짜 아니지?"
"뭐가."
"아침에 너 교실 들어왔을 때 말이야. 온몸이 땀 범벅에 얼굴은 불타는 고구마 같았잖아. 꼭 100미터 달리기 전력 질주하고 온 사람처럼."
"하하, 유나야. 내가 지각 안 하려고 버스 지붕…… 아니, 버스를 잡으려고 좀 열심히 뛰긴 했지. 근데 내가 무슨 투명 인간도 아니고, 마 쌤 눈앞에서 저 도장을 찍고 유유히 사라졌겠냐? 마 쌤 시력이 마이너스도 아닌데."
시우가 어깨를 으쓱하며 능청스럽게 대꾸하자, 유나는 여전히 석연치 않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네가 그런 대담한 짓을 할 위인은 못 되지. 맨날 날로 먹을 생각만 하는 귀차니즘 말기 환자가 무슨 수로 교문을 뚫겠어. 그냥 타이밍이 묘하게 겹친 거겠지."
"그래, 임마. 나 같이 착하고 평범한 학생을 의심하면 못 써요."
시우는 속으로 십년감수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확실히 시간 정지 능력은 엄청난 사기지만, 그만큼 세상의 상식에서 크게 벗어난 힘이었다. 아무리 친한 소꿉친구라 해도 이 비밀만큼은 무덤까지 가져가야 했다. 괜히 털어놓았다가 국가 비밀 연구소 같은 곳으로 끌려가 평생 쥐 실험 대상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아무튼 오늘 아침의 영웅에게 감사해야겠어. 마 쌤이 저 도장 때문에 하루 종일 신경질이 나서 지각생들 야자 면제해 주기로 했거든. 증거 잡는 데 정신 팔리셔서 말이야."
유나가 킥킥거리며 웃었다. 시우도 함께 웃으며 책상에 엎드렸다.
'역시 인생은 날로 먹는 게 최고야. 조금 힘들었지만 결과적으로 평화롭잖아?'
점심시간, 급식실은 그야말로 전쟁터였다.
오늘의 메뉴는 시우가 목숨을 걸고 사수한 수제 치즈 돈까스였다. 바삭하게 튀겨진 돈까스 커틀릿 사이로 흘러내리는 뽀얀 모차렐라 치즈를 입에 넣는 순간, 시우는 온 세상을 다 가진 듯한 미소를 지었다.
"음, 이 맛이지. 역시 고통 뒤에 오는 치즈는 달콤하다."
"너 진짜 오버한다. 돈까스 하나에 목숨 거는 고딩은 너밖에 없을 거야."
식판을 든 유나가 시우의 맞은편에 앉으며 한심하다는 듯 말했다.
"유나야, 넌 인생의 진리를 모르는구나. 이 돈까스는 단순한 돼지고기 튀김이 아니야. 내 피와 땀, 그리고 끊어질 듯한 숨통을 대가로 얻어낸 승리의 전리품이라고."
"네, 네. 헛소리 말고 빨리 드세요, 전리품 씨. 이따 도서관 책 반납하는 것 좀 도와줘."
"귀찮아. 나 점심 먹고 매점 가서 초코우유 먹을 건데."
"내가 살게."
"가자. 친구 사이에 도서관 책 좀 나르는 게 무슨 대수라고."
시우의 태세 전환에 유나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혀를 찼다.
점심을 든든하게 먹고 매점에서 초코우유를 하나씩 입에 문 두 사람은 운동장을 가로질러 본관 뒷길로 향했다. 따스한 햇살이 내리쬐는 오후, 학교 안은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딸랑──.
갑자기 유나의 주머니에서 스마트폰 진동이 울렸다. 유나는 우유를 빨며 화면을 켜더니, 이내 미간을 찌푸렸다.
"어? 또 뉴스 떴네."
"무슨 뉴스?"
"그 있잖아. 우리 옆 동네에서 시작해서 최근에 계속 보도되던 의문의 실종 사건. 이번에는 우리 동네 바로 경계선 쪽에서 20대 대학생이 사라졌대."
"실종?"
시우는 유나의 폰 화면으로 시선을 옮겼다. 포털 사이트 메인에 걸린 사회 뉴스 헤드라인이 눈에 들어왔다.
[단독] 신정동 일대 연쇄 실종 의혹…… 경찰, 전담수사팀 구성 검토
최근 한 달 사이 반경 3km 이내에서 젊은 여성 3명이 잇따라 실종되었습니다. 유력한 단서나 목격자가 없어 경찰은 가출과 강력 사건의 가능성을 모두 열어두고…….
"와, 무섭다 진짜. 바로 옆 동네잖아. 걸어서 20분도 안 걸리는 곳인데."
유나가 팔을 비비며 으스스한 표정을 지었다.
"경찰들은 뭐 한대? 요즘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CCTV도 안 찍히고 사람이 감쪽같이 사라져?"
"글쎄. 그러니까 미스터리라는 거겠지. 가출치고는 소지품도 그대로 두고 사라졌다던데."
시우는 폰 화면에 작게 실린 실종자의 사진을 보았다. 밝게 웃고 있는 평범한 여대생의 모습이었다. 그 미소가 왠지 모르게 서늘한 이질감으로 다가왔다. 평화롭고 고요해 보이는 이 동네 이면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입을 벌리고 기다리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러니까 유나 너도 밤늦게 뽈뽈거리고 돌아다니지 마라. 덜렁거리다가 범인이랑 마주치면 어쩌려고."
시우가 툭 던진 말에, 유나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그녀는 폰을 주머니에 넣으며 시우를 흘겨보았다.
"뭐야. 너 지금 나 걱정해 주는 거야?"
"아니, 네가 납치당하면 내 초코우유는 누가 사주나 싶어서."
"죽을래?"
유나가 주먹을 쥐어 보이자 시우는 잽싸게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장난스러운 농담 속에서도 시우의 마음 한구석에는 묘한 찜찜함이 가시지 않았다.
'진짜 조심해야겠네. 몸조심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방과 후, 노을이 붉게 물들기 시작할 무렵 시우와 유나는 학교 건물을 나섰다.
동네 어귀로 들어서자 고소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사거리 모퉁이에서 연기를 풀풀 풍기며 풀빵과 붕어빵을 굽고 있는 노점 트럭이 보였다.
"아저씨! 안녕하세요!"
유나가 활기차게 소리치며 트럭으로 다가갔다.
"오, 반장 학생이랑 시우 왔냐? 마침 붕어빵 새로 구웠다."
밀가루 반죽을 틀에 부으며 땀을 닦던 붕어빵 아저씨가 너털웃음을 지었다. 동네에서 오랜 세월 장사를 해온 아저씨는 시우와 유나의 얼굴을 모를 수가 없는 터주대감이었다.
"오늘 날씨도 좋은데 붕어빵 천 원어치만 주세요!"
유나가 지갑을 뒤적이는 사이, 시우는 트럭 옆 골목길을 무심코 바라보았다. 골목길 안쪽에는 낡은 빌라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고, 그 너머로 새로 오픈한 한도진의 카페 '드림'의 세련된 외관이 대조적으로 서 있었다.
그때, 사거리 건너편 파출소 문이 열리며 익숙한 얼굴이 걸어 나왔다.
만년 경장 오달수였다. 순경 제복을 입고 있지만 묘하게 형사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약간 구겨진 인상의 40대 사내였다. 오 경장은 붕어빵 트럭을 보자마자 반갑게 걸어왔다.
"어이, 김 사장! 나도 어묵 국물 한 컵 줘. 오늘 당직인데 벌써부터 허리가 쑤시네."
"오 경장님 오셨소. 여기 뜨끈한 국물 드쇼."
아저씨가 종이컵에 국물을 담아 건넸다. 오 경장은 국물을 들이켜며 트럭 앞에 서 있는 시우와 유나를 쳐다보았다.
"어라, 너희들 하교하는 길이냐? 요즘 고딩들은 참 공부하느라 바빠."
"안녕하세요, 오 경장님. 순찰 도시는 길이에요?"
유나가 싹싹하게 인사하자, 오 경장은 한숨을 푹 쉬었다.
"순찰은 무슨. 요즘 저 윗동네 실종 사건 때문에 아주 동네 전체가 비상이야. 서장님이 밤낮없이 골목 구석구석 뒤지라고 꽹과리를 쳐대서 죽겠다니까. 특별히 수상한 놈이나 차량 본 거 없냐?"
"저희가 뭘 알겠어요. 그냥 매일 다니는 길만 다니는걸요."
시우가 대답하며 어묵 하나를 집어 물었다.
오 경장은 종이컵을 만지작거리며 씁쓸하게 입을 열었다.
"그렇지. 근데 참 이상하단 말이야. 사라진 피해자들 동선이 죄다 우리 관내 경계선 쪽에서 뚝 끊겨. 가해자가 차를 썼을 텐데, 그 시간대 통과한 차량 중에는 블랙박스나 폐쇄회로(CC)TV에 걸리는 게 단 한 대도 없어. 마치 유령처럼 말이지."
"유령이요?"
유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래. 흔적을 너무 깔끔하게 치워. 이 바닥 밥만 15년 먹은 내 감으로 보면, 이건 보통 놈이 아니야. 아주 꼼꼼하고, 계획적이고, 이 동네 지리를 머릿속으로 꿰고 있는 지능범이야. 너희들도 학원 끝나고 늦게 다닐 때 후미진 골목은 절대 가지 마라."
오 경장의 경고는 꽤 진지했다. 시우는 묵묵히 어묵을 씹으며 오 경장의 말을 곱씹었다.
'지리를 꿰고 있는 지능범이라…….'
세상의 흐름을 정지시키는 초현실적인 능력을 가진 시우에게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암약하는 현실의 범죄자는 서늘한 현실적인 위협으로 다가왔다.
"자, 여기 붕어빵 나왔다. 식기 전에 가져가라."
붕어빵 아저씨가 건네준 봉투를 받아 든 유나는 오 경장에게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오 경장님도 수고하세요!"
"그래, 조심히들 들어가라."
오 경장과 헤어져 집으로 향하는 길. 두 사람은 새로 지어진 카페 '드림' 앞을 지나갔다.
통유리창 너머로 따뜻한 오렌지빛 조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카페 안에는 여전히 단정한 셔츠 차림의 사장 한도진이 테이블을 닦고 있었다. 손님이 없는 시간대였는지 카페 안은 고요했다.
유리가 깨끗해서 안쪽의 모습이 손에 잡힐 듯 잘 보였다. 한도진은 행주로 테이블을 닦아내는 동작 하나조차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손끝이 아주 섬세하고 깔끔했다.
스윽──.
시우와 눈이 마주치자, 한도진은 닦던 테이블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온화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가볍게 목례를 건넸다.
시우 역시 얼떨결에 목례로 응수했다.
"진짜 잘생기셨다. 그치?"
유나가 작게 속삭였다.
"그러냐? 난 잘 모르겠는데."
"흥, 남자의 질투는 추하다고, 강시우."
"질투 같은 소리 하네. 그냥 굳이 따지자면 내 스타일은 아니라는 거지."
"누가 물어봤냐?"
유나가 핀잔을 주며 앞서 걸어갔다. 시우는 다시 한번 뒤를 돌아 카페 안을 슬쩍 보았다.
한도진은 여전히 그 자리에서 멀어져 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미소 띤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저 평범하고 친절한 동네 카페 사장님.
하지만 시우의 발걸음은 왠지 모르게 무거웠다. 아무런 증거도, 이유도 없었지만, 한도진과 눈이 마주쳤던 그 짧은 찰나에 등 뒤를 스치고 지나간 낯선 한기 때문이었다. 마치 멈춰진 세계 속에서 숨을 쉬지 못해 가슴이 조여오던 그 서늘함과 아주 닮아 있는 듯한 기분.
'……기분 탓이겠지.'
시우는 고개를 젓고는 앞서가는 유나의 뒤를 쫓아 달렸다.
"야! 최유나! 붕어빵 하나만 줘!"
"싫어! 내 돈으로 산 거야!"
"초코우유 내가 아침에 마신 거 유나가 사준 거잖아!"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노을빛이 길게 늘어진 골목길 사이로 두 고등학생의 왁자지껄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붉게 물든 하늘 아래, 고요하게 가라앉은 동네의 하루가 그렇게 저물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그림자 뒤로, 보이지 않는 균열이 아주 조금씩 넓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