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정지 능력으로 날로 먹는 법

17화: 피와 빗물의 궤적
장대비가 시우의 머리칼을 사정없이 적시며 이마를 타고 흘러내렸다.
사거리 아스팔트 바닥에 떨어진 유나의 휴대폰과 그 액정에 선명히 찍힌 협박 문자.
[최유나를 살리고 싶다면 혼자서 신정동 구 정수장으로 와라. 경찰에 알리거나 허튼짓을 하면 그 즉시 여자의 목을 따겠다.]
시우는 이를 악물고 떨리는 가슴을 억누르며 남은 산소를 폐부 깊숙이 밀어 넣었다. 갈비뼈 전체가 비명을 지르며 찢어지는 듯한 격통이 온몸을 휘감았지만, 지금 이 순간 시우에게 육체의 통증 따위는 아무런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구 정수장까지의 거리는 대략 4킬로미터. 외곽 산비탈 길을 따라 한참을 올라가야 하는 외딴곳이었다. 정상적인 몸 상태로 뛰어도 20분은 족히 걸릴 거리인데, 폐가 파열되기 직전인 현재 상태로는 도중에 질식사해 쓰러질 게 불을 보듯 뻔했다.
시간을 정지시킨 상태에서 달리는 것 역시 기압 저항과 엄청난 체력 소모로 인해 자살 행위나 다름없었다.
"날로 먹어야 해…… 이 몸뚱이로 가려면 머리를 써야 한다."
시우는 길게 숨을 내쉬며 신호등을 바라보았다.
마침 사거리 신호등이 빨간불로 바뀌며, 구 정수장이 위치한 산길 방향(북부 외곽도로)으로 직진하기 위해 대기 중이던 대형 탑차 한 대가 눈에 들어왔다.
시우는 차갑게 속삭였다.
'정지.'
스우우우──.
세상의 소음이 순식간에 소멸했다.
하늘에서 사선으로 쏟아지던 수천수만 개의 장대비가 허공에 투명한 유리 못처럼 빳빳하게 고정되었다. 빗방울 하나하나가 만들어낸 미세한 파문과, 가로등 불빛이 물방울 표면에 반사되어 내뿜는 오렌지색 빛 무리까지 모두 박제가 되어버린 회색의 세계.
"커흑……! 컥! 커헉!"
시간을 멈추자마자 시우는 참았던 기침을 쏟아냈다.
목구멍에서 왈칵 뿜어져 나온 검붉은 선혈이 멈춰 있는 빗방울들 사이에 붉은 안개처럼 흩뿌려진 채 허공에 고정되었다. 시우는 소매로 입가에 묻은 피를 거칠게 닦아내며 멈춰 있는 탑차를 향해 달렸다.
시간이 멈춘 세계의 공기는 뻑뻑한 젤리 같아서 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지만, 짧은 거리라면 버틸 수 있었다.
시우는 탑차의 뒷바퀴와 범퍼를 딛고 올라타, 지붕 위로 기어 올라갔다. 그리고 빗물이 흘러내리다 멈춘 탑차 지붕 한가운데에 납작 엎드려 몸을 단단히 고정했다.
'해제.'
콰아아앙──!
시간의 태엽이 다시 세차게 돌아가며 탑차가 굉음과 함께 급가속했다.
"우오오옷!"
시우는 엄청난 바람과 빗줄기를 온몸으로 맞으며 탑차 지붕을 꽉 붙잡았다. 빗속을 뚫고 탑차는 미친 듯한 속도로 산길 초입을 향해 질주했다. 시우는 탑차의 이동 능력을 빌려 쓰며, 숨이 멎을 것 같던 허파와 근육에 잠시나마 휴식을 주었다. 체력을 극한으로 아끼는 그만의 기발한 이동 방식이었다.
몇 분 후, 탑차가 교차로에서 우회전 신호를 받으며 속도를 줄였다. 직진하면 구 정수장 방향이었지만, 탑차는 다른 방향으로 꺾으려 하고 있었다.
시우는 타이밍을 맞춰 다시 소리쳤다.
'정지.'
스우우우──.
다시 한 번 세상이 굳어졌다.
시우는 탑차 지붕에서 날렵하게 뛰어내렸다. 그리고 마침 교차로 꼬리물기로 멈춰 서 있던, 산길 배달용 소형 트럭의 적재함 뒤편으로 다가갔다. 적재함 천막 틈새로 기어 들어가 몸을 숨긴 뒤, 다시 외쳤다.
'해제.'
부르릉──!
트럭이 빗길을 박차고 구 정수장이 있는 산길 오르막을 오르기 시작했다. 천막 안에서 세찬 바람을 피하며 시우는 깨질 듯한 두통을 견뎠다. 두 번의 연속 정지와 해제로 인해 뇌 신경망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지만, 육체적 피로는 최소화할 수 있었다.
트럭이 마침내 구 정수장 진입로 입구 근처에 이르러 속도를 늦추자, 시우는 세 번째로 시간을 멈췄다.
'정지.'
세상이 멈춘 찰나, 시우는 적재함에서 기어 나와 빗속의 흙바닥에 착지했다.
눈앞에는 잡초가 무성하게 우거진 낡은 배수지와 콘크리트 정수장 건물이 안개 속에서 괴물처럼 아가리를 벌리고 서 있었다.
시우는 정수장 입구의 녹슨 철문 앞에 서서 숨을 골랐다.
'해제.'
스우우우── 쏴아아아아!
다시 내리는 굵은 빗방울들이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하아…… 하아……."
시우는 가슴을 움켜쥐고 거친 숨을 내쉬었지만, 탑차와 트럭을 번갈아 타고 온 덕분에 아직 몸을 움직일 만한 체력이 남아 있었다. 핏물로 붉게 물든 침을 빗속에 뱉어낸 시우는, 주머니 속에 든 유나의 망가진 스마트폰을 매만졌다.
"내가 간다, 이 개새끼야."
시우는 주머니 속에 든 쇠줄과 공구들을 확인한 뒤, 마침내 지옥의 아가리와 다름없는 구 정수장 지하 기계실 입구를 향해 한 걸음씩 걸어 들어갔다. 최후의 사투가 그 어둠 속에서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