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정지 능력으로 날로 먹는 법

12화: 꼬리 없는 도마뱀
"시간이 없어."
한도진은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변호사 김민석의 급박한 목소리에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 "도진 씨, 경찰들이 움직였어. 전파법 위반 혐의로 압수수색 영장을 받아냈더군. 카페 지하실에 둔 군용 전파 방해 장치(잼머) 때문이야. 지금 당장 수사팀이 출발했으니 늦어도 10분 내로 들이닥칠 걸세. 잼머랑 엮일 만한 것들은 물론이고, 다른 거슬리는 흔적들도 전부 치우거나 숨겨!"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한도진의 얼굴이 차갑게 굳어졌다. 전파법 위반이라니. 예상치 못한 우회 경로였다. 대포폰 건은 명의 도용과 복제 폰 핑계로 영장을 기각시켰는데, 잼머라는 생각지도 못한 아킬레스건을 찔린 것이다.
분명 그 고등학생 꼬맹이, 강시우 녀석이 오달수 경장에게 수사 팁을 준 게 틀림없었다.
"내 지하실을 털겠다고……."
도진은 서둘러 지하실로 내려갔다. 지하실 벽장에 숨겨두었던 군용 잼머 장비와, 자신이 범행을 저지른 후 보관해 오던 영광스러운 전리품들(피해자들의 학생증, 장신구 등)이 담긴 검은 가죽 가방을 꺼냈다.
이것들이 경찰의 손에 들어가면 전파법 위반 따위가 아니라 연쇄 살인마로 평생 감옥에서 썩거나 사형을 면치 못할 터였다. 도진은 잼머를 신속히 분해해 지하실 깊숙한 벽 틈새와 하수구 안쪽에 밀어 넣고, 피해자들의 유품이 든 가방을 소각용 드럼통에 넣어 불태우려 했다.
같은 시각, 카페 '드림' 뒷골목.
독서실 창문을 통해 카페 근처에 경찰 순찰차들이 조용히 집결하는 것을 지켜보던 시우는, 카페 불이 꺼진 상태에서 지하실 환기구 쪽 불빛이 어지럽게 흔들리는 것을 포착했다.
'그 새끼, 눈치챘어. 증거를 인멸하려는 거야!'
오 경장의 수사팀이 카페로 진입하기까지는 단 몇 분밖에 남지 않았다. 하지만 그 짧은 시간에 한도진이 잼머와 피해자들의 유품을 완전히 없애버린다면, 기껏 영장을 받아온 노력이 수포로 돌아간다. 그렇게 되면 놈은 아무런 타격도 입지 않은 채 풀려나 다시 자신과 유나의 목을 조르러 올 터였다.
시우는 가슴에 스멀거리는 통증을 억누르며 카페 뒷문 미닫이창 아래로 다가갔다. 갈비뼈 안쪽이 비명을 지르며 찢어지는 듯한 고통이 혈관을 타고 솟구쳤지만, 시우는 이빨을 악물고 차가운 밤공기를 깊게 들이마셨다.
'정지!'
스우우우──.
세상이 얼어붙었다. 허공을 부유하던 안개와 먼지들이 투명한 유리구슬처럼 박혀 버린 적막의 세계.
시우는 열려 있는 미닫이창을 통해 지하실로 기어 들어갔다. 멈춰진 공간의 공기는 액체처럼 무겁고 차가워 숨쉬기가 극도로 힘들었다.
"커흐윽…… 컥!"
소리조차 나지 않는 묵음의 고통 속에서 시우는 지하실 계단을 서둘러 내려갔다.
지하실 안쪽에는 한도진이 소각용 드럼통 앞에 성냥을 쥔 채 굳어 있었다. 그의 손에는 불을 붙이려던 라이터와 피해자들의 물건들이 담긴 검은 가죽 가방이 들려 있었다.
'이 가방을 가져가야 해. 이걸 경찰들이 바로 볼 수 있는 계단에 올려두면…….'
시우는 뻣뻣하게 굳어 있는 한도진의 손에서 가죽 가방을 낚아채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우웁……! 쿨럭! 컥……!"
갑자기 가슴을 송곳으로 후벼 파는 듯한 통증이 시우를 덮쳤다. 이전에 겪었던 통증과는 차원이 다른, 마치 허파가 갈기갈기 찢겨 나가는 듯한 극심한 폐통증이었다.
"아으윽……!"
시우는 가방을 채 움켜쥐기도 전에 무릎을 꿇으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입에서 울컥하며 뜨거운 붉은 피가 쏟아져 나와 시멘트 바닥을 적셨다. 멈춰진 세계의 압박이 그의 산소를 급격하게 빼앗아 가며 뇌를 마비시키기 시작했다. 눈앞이 하얗게 점멸했다.
'안 돼…… 여기서 쓰러지면 진짜 죽는다…….'
시우는 본능적인 공포를 느꼈다. 이대로 정지된 세계 속에서 의식을 잃으면 영원히 깨어나지 못할 터였다. 증거를 확보하는 것보다 일단 살아서 나가는 게 우선이었다.
시우는 이를 악물고 지하실 바닥을 기었다. 쏟아져 나온 피를 대충 훔치며, 간신히 지하실 계단을 기어 올라가 카페 뒷문을 탈출했다. 그리고 뒷골목 어두운 그늘로 몸을 던진 순간, 한계에 달한 의식을 붙잡으며 외쳤다.
'해제!'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하아아악! 컥, 쿨럭!"
시우는 골목 바닥에서 핏물이 섞인 침을 뱉어내며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몸이 납덩이처럼 무거웠고 가슴뼈 전체가 산산조각 난 것처럼 아파서 제대로 서 있을 수조차 없었다.
동시에 골목 어귀에서 경적 소리와 함께 강력계 형사들의 외침이 들렸다.
"압수수색 영장 집행합니다! 전원 진입해!"
오달수 경장이 이끄는 형사들이 카페 '드림'의 유리문을 박차고 들이닥쳤다.
지하실 안.
시간이 풀리자마자 한도진은 손가락 끝의 라이터를 켜 드럼통 안으로 던지려 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바닥에 낭자한 붉은 핏자국이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이…… 이게 뭐지?!"
불과 1초 전까지는 존재하지 않았던 신선한 피가 바닥에 흥건히 떨어져 있었다. 소각 가방 또한 누군가 억지로 당긴 것처럼 손 안에서 미세하게 비틀려 있었다.
'설마…… 그놈인가? 보이지 않는 사냥꾼!'
도진은 등골이 서늘해지는 공포와 전율에 휩싸였다. 하지만 계단을 뛰어내려 오는 형사들의 다급한 발소리가 들리자, 그는 서둘러 가방을 벽장 안쪽 이중 잠금장치가 된 비밀 금고에 처박고 문을 잠갔다.
"경찰이다! 한도진, 손 들어!"
오 경장과 형사들이 지하실로 들이닥치며 총을 겨눴다.
"어…… 오 경장님? 이게 무슨 일입니까?"
한도진은 억지로 침착함을 가장하며 손을 들어 올렸다.
경찰들은 즉시 지하실을 이 잡듯 뒤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이 찾아낸 것은 이미 분해되어 하수구에 던져진 잼머의 사소한 부품 부스러기와 안테나 몇 개뿐이었다.
"경장님! 잼머로 추정되는 부품 일부 외에는 범행에 쓰인 무선 전파 방해 장치 본체는 보이지 않습니다! 살인 사건 관련 증거도 없고요!"
"뭐라고? 지하실을 더 샅샅이 뒤져봐! 저 구석 벽장까지 전부 열어!"
오 경장이 소리쳤지만, 이중 비밀 벽장 속의 금고는 형사들의 눈에 쉽게 띄지 않았고, 바닥에 흥건한 핏자국은 그것만으로는 누구의 것인지 즉각 알 수 없었기에 구속 사유가 되지 못했다.
그때, 지하실 계단 위에서 말끔한 정장 차림의 남자가 구두 굽 소리를 내며 걸어 내려왔다.
한도진의 전담 변호사이자 부패한 법률가인 김민석이었다.
"거기까지 하시죠, 오 경장님."
김민석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영장 사본을 흔들었다.
"이 영장은 '허가받지 않은 무선 전파 방해 장치 소지 및 발신' 혐의, 즉 전파법 위반에 국한된 압수수색 영장입니다. 현재 발견된 건 정체불명의 전자 부품 몇 개가 전부인데, 이를 근거로 의뢰인의 신체를 무단으로 구속하거나 영장 범위를 벗어난 과도한 압수수색을 진행하는 건 명백한 직권남용이자 불법 수사입니다."
"김 변호사! 이 자식은 연쇄 살인 용의자야! 지하실에서 잼머 흔적이 나왔는데 그냥 보내라고?!"
오 경장이 분통을 터뜨렸지만, 김민석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연쇄 살인은 정황 증거뿐이지 않습니까? 대포폰 영장도 법원에서 기각된 마당에, 전파법 위반 혐의 조사라면 불구속 수사가 원칙입니다. 제 의뢰인을 이대로 강제 연행하겠다면 즉각 준항고를 제기하고 직권남용으로 형사 고소하겠습니다."
결국 경찰은 한도진을 긴급체포하지 못했다.
다만 불법 부품 소지 혐의로 임의동행하여 경찰서에서 간단한 조사를 한 뒤 훈방 조치할 수밖에 없었다.
경찰서를 나서는 한도진의 표정은 극도로 일그러져 있었다. 비록 구속은 면했지만, 경찰의 감시와 밀착 수사가 시작되었고, 무엇보다 자신을 겨냥하는 '보이지 않는 존재'에 대한 공포가 그를 벼랑 끝으로 밀어 넣고 있었다.
"유나…… 강시우……."
도진은 직감적으로 그 보이지 않는 사냥꾼이 자신을 조여 오고 있음을 느꼈다. 감시망을 뚫고 이 판을 뒤집으려면 극단적인 선택을 해야만 했다.
어두운 모퉁이에 숨어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던 시우는 피 묻은 소매로 입술을 닦으며 비틀거렸다.
계획이 실패했다. 한도진은 잡히지 않았고, 오히려 자신에게 남은 건 망가진 몸뚱이와 극심한 통증뿐이었다.
"하아…… 하아……."
가슴을 쥐어짜며 집으로 향하는 시우의 눈빛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한도진과의 싸움은 이제 물러설 수 없는 벼랑 끝의 혈투로 치닫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