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식창에 상태창이 떴다!

53화: 마녀의 제안
목요일 오후 4시, 뉴욕 맨해튼 5번가에 위치한 모건 클레이튼 본사 78층 VIP 접견실.
통유리창 너머로 맨해튼의 마천루와 센트럴 파크의 전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고급스러운 공간이었다. 문이 열리며 검은색 실크 드레스 차림의 여성이 우아하게 걸어 들어왔다. 큰 키에 조각 같은 이목구비, 그리고 얼음처럼 차가운 푸른 눈동자를 지닌 여성. 그녀가 바로 월가의 전설적인 매니징 디렉터이자 '얼음 마녀'라 불리는 빅토리아 벨 상무였다.
"웰컴 투 뉴욕, 한 의장님. 한국에서의 대단한 성과들은 뉴욕 월가에서도 큰 화제였습니다."
놀랍게도 그녀는 유창한 한국어로 도윤에게 인사를 건네며 테이블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도윤은 그녀와 가볍게 악수를 나눈 뒤 소파에 깊숙이 기댔다. 겉으로는 여유로운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도윤의 망막 위에는 이미 빅토리아 벨의 상세 프로필과 그녀의 속마음이 담긴 홀로그램 창이 실시간으로 디코딩되어 떠오르고 있었다.
[인물: 빅토리아 벨 (Victoria Bell)]
- 지위: 모건 클레이튼 매니징 디렉터 (월가의 얼음 마녀)
- 현재 심리: '가온에서 온 럭키 개미 놈이 돈 맛을 좀 봤나 보네. 연준 빅컷에 베팅해 수천억을 번 정보력이 어디서 나왔는지 모르겠지만, 뉴욕 월가에서는 그 돈을 지키기 힘들다는 걸 뼈저리게 가르쳐주지.'
- [상태창 극비 데이터 해독 완료]
- 빅토리아 벨은 겉으로는 '노바 테크놀로지'의 백기사 투자를 제안하지만, 실제로는 나스닥 상장 대기업인 '시냅스 테크놀로지'와 결탁해 있음.
- 안티그라비티의 자금 3억 달러(약 4,000억 원)를 노바 테크놀로지에 묶어둔 즉시, 시냅스 테크놀로지가 노바를 상대로 특허 도용 소송을 걸어 안티그라비티의 투자 자금을 영구 동결시키고 파산 청산 유도 계획 수립 완료 (이중 덫 작전).
"속으로는 내 돈을 통째로 강탈할 생각으로 가득 차 있으면서, 겉으로는 아주 천사처럼 웃고 계시는구먼."
도윤은 속으로 헛웃음을 삼켰다. 월가의 포식자라더니, 사기꾼 뺨치는 이중 덫을 설계해 한국의 자본을 뜯어먹으려는 양아치 짓에 다름없었다.
빅토리아 벨은 도윤의 속내를 모른 채, 우아하게 태블릿 화면을 넘기며 딜 설명을 시작했다.
"현재 실리콘밸리의 AI 핵심 NPU(신경망처리장치) 설계 전문 벤처기업 '노바 테크놀로지'가 유동성 부족으로 파산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그들이 보유한 3세대 NPU 아키텍처 특허는 엔디비아나 AMD의 칩 대비 전력 효율이 40%나 우수한 원천 기술입니다. 나스닥 상장사인 '시냅스 테크놀로지'가 이 기술을 헐값인 5,000만 달러에 적대적 인수합병하려 덫을 놓고 있습니다."
그녀는 도윤의 눈을 빤히 응시하며 목소리를 낮췄다.
"저희 모건 클레이튼은 안티그라비티가 3억 달러(약 4,000억 원)를 노바 테크놀로지에 투자해 지분 55%를 취득하는 백기사로 참여해 주시길 제안합니다. 우리가 힘을 합쳐 시냅스의 호시탐탐한 인수를 차단하고, 내년에 노바를 나스닥에 기업공개(IPO)시킨다면 기업 가치는 최소 20억 달러(약 2조 6천억 원)까지 치솟을 겁니다. 안티그라비티는 단숨에 6배가 넘는 이익을 거두게 되죠. 어떠십니까?"
도윤은 턱을 괸 채 잠시 생각하는 척 연기를 했다.
"3억 달러에 20억 달러라…… 상당히 군침이 도는 제안이군요, 벨 상무님."
"현명하신 한 의장님이라면 이 기회를 놓치지 않을 거라 믿었습니다. 계약서 초안을 주말 동안 검토하시고, 다음 주 수요일 서명식을 진행하시는 걸로 일정을 잡을까요?"
빅토리아 벨의 얼음 같은 눈동자에 미세한 승리의 희열이 스쳐 지나갔다. 가온에서 온 이 젊은 벼락부자가 월가의 정교한 금융 덫에 걸려들었다고 확신한 것이다.
"좋습니다. 그렇게 하죠. 긍정적으로 검토하겠습니다."
도윤은 흔쾌히 답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건 클레이튼 본사를 나와 맨해튼 플라자 호텔의 최고급 프레지덴셜 스위트룸으로 복귀한 도윤은 서은우 변호사를 마주 보았다.
"서 변호사님, 모건 클레이튼 내부 장부하고 시냅스 테크놀로지 미공개 악재 정보 싹 다 백업해 오세요."
"예? 의장님, 방금 긍정적으로 계약을 맺기로 하신 것 아니었습니까?"
"계약은 무슨 얼어 죽을 계약입니까."
도윤은 냉소를 흘렸다.
"빅토리아 그 여자가 우리 4,000억 원을 노바 테크놀로지에 묶어둔 다음에 시냅스랑 짜고 소송 걸어서 돈을 꿀꺽 삼키려는 이중 덫을 쳐놨어요. 대기업 회장실도 도청하는 마당에 월가 늑대들 속마음 하나 못 읽을까 봐."
서은우 변호사의 턱이 경악으로 벌어졌다.
"그, 그런 음모가 있었단 말입니까? 월가의 대형 IB가 대놓고 사기극을 기획했다니……!"
"돈 앞에 국경도 없고 명예도 없는 곳이 바로 월가니까요. 하지만 그 마녀가 실수한 게 하나 있습니다."
도윤의 두 눈에 매서운 광채가 서렸다.
"제 상태창 '신의 눈'이 시냅스 테크놀로지의 치명적인 아킬레스건을 찾아냈거든요. 시냅스는 현재 자사 제품의 NPU 아키텍처 특허를 도용해 제품을 출하한 혐의로, 다음 주 월요일 아침 뉴욕 연방법원에 정식 피소 및 가처분 신청 보고서가 대기 중입니다. 이 비밀 피소 사실은 내부 감사팀 말고는 아무도 모르는 극비 사안입니다."
도윤이 소파 테이블을 가볍게 두드렸다.
"월요일 아침 피소 사실이 뉴욕 연방법원 공시와 함께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되면, 시냅스 테크놀로지의 나스닥 주가는 즉시 3분의 1 토막으로 내려앉을 겁니다. 우린 주말 동안 시냅스 테크놀로지에 대한 대규모 선물 매도 포지션을 구축하고 풋옵션을 싹 쓸어 담습니다. 동시에 백기사 투자를 가장해 노바 테크놀로지의 대주주 창업자들을 비밀리에 만나, 주당 3억 달러 대신 8,000만 달러에 지분 60%를 직접 인수하는 적대적 인수를 완료할 겁니다."
빅토리아 벨이 깔아둔 이중 덫을 역이용해, 시냅스 테크놀로지의 숏 포지션에서 천문학적인 차익을 실현하고 노바의 지분까지 공짜 수준으로 강탈하려는 파멸적인 역공작이었다.
"의장님…… 월가의 얼음 마녀를 상대로 역으로 덫을 놓으시는 거군요."
서은우가 깊은 감탄을 뱉었다.
"덫을 쳤으면, 사냥꾼이 다칠 수도 있다는 걸 보여줘야 월가 놈들이 다시는 한국 자본을 우습게 못 보죠. 서 변호사님, 즉시 주말 미국 장외 거래 데스크 연결하세요. 월요일 아침 나스닥 개장과 동시에 시냅스 테크놀로지의 목줄을 쥐고 흔들 테니까."
뉴욕 맨해튼의 화려하고도 잔인한 밤하늘 위로, 대한민국에서 온 포식자 한도윤의 찬란한 사냥 그물이 어둠 속에 소리 없이 깔리기 시작하고 있었다.